93화
* * *
끼기긱―!
날 선 것끼리 맞붙으면서 불쾌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유리한과 검을 맞댄 남자가 눈가를 찡그렸다.
“당신들 뭡니까?”
그에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남자를 향해 창을 휘두르려는 디에스 라고를 눈짓으로 말리면서 말이다.
“그쪽부터 정체를 밝혀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아.”
아?
바람 빠진 소리를 낸 남자가 검을 거두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체를 밝혔다.
“서문기율입니다. 한국인이고요.”
얼떨결에 이름과 함께 국적을 알게 됐다.
‘순순히 알려줄 줄은 몰랐는데.’
유리한은 당황하여 입을 뻐금거렸다.
“어… 유리한이라고 해요.”
“유리한? 한국인입니까?”
“그렇기는 한데…….”
얼버무리는 대답에 남자가 환한 얼굴을 보였다. 그는 유리한을 향해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반갑습니다! 한국인을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 그렇군요? 저도 한국인은 오랜만인데 반갑네요.”
사실 그렇지는 않았지만 유리한은 예의상 그렇게 대꾸해 줬다.
‘특이한 사람이네.’
제 이름을 듣고 한국인이라면서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쨌거나 남자는 그런 유리한의 손을 덥석 잡고는 흔들었다. 그에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의 눈초리가 매서워질 때.
“기율 님, 그분들은…….”
“아.”
불안해하는 마을 주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맞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유리한을 향해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당신들은 이곳에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이번에 새로 올라온 분들 같은데, 그렇다면 아직 진영을 선택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진영?”
유리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십니까?”
“네, 몰라요. 우리가 알고 있는 건 49층의 시험이 땅따먹기란 것뿐이거든요.”
“땅따먹기……?”
서문기율이 미간을 좁혔다. 그때 디에스 라고가 입을 열었다.
“49층의 시험은 수인족과 플레이어가 서로의 땅을 빼앗는 것이었다고 기억한다만.”
“그 시험이 변질된 지가 언제인데 그래?”
그렇게 말한 사람은 서문기율이 아니었다.
털이 풍성한 귀를 쫑긋 세운 수인족 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문기율 뒤에서 반쯤 몸을 숨긴 채로 말이다.
“이곳의 시험은 인간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 오래야. 침입자니, 수호자니. 우리 목숨을 두고 내기의 장이 된 지 오래라고!”
꼬마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씩씩거리며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아이의 날 선 시선에 유리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서문기율은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네쥬의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상처가 워낙 많은 아이라서 말입니다.”
“누가 상처가 많다는 거야?!”
수인족 소녀, 네쥬가 두 손을 번쩍 들고는 서문기율을 향해 휘둘렀다. 그는 전혀 타격 입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버릇이 없어도 그러려니 하십시오. 어쨌든, 49층의 시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단 말씀이시군요.”
“그런 것 같네요.”
시험이 변경된 줄 알았다면 T-Network를 통해 49층의 정보를 알아보고 올 걸 그랬다.
유리한은 아쉬움을 뒤로하며 서문기율에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49층의 시험에 관해 알려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습니다.”
서문기율이 검을 거뒀다. 눈앞의 플레이어들이 이 마을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아니란 판단이 들어서였다.
유리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기가 다른 마음을 품어 공격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렇게 쉽게 검을 거둔단 말인가?
하지만 서문기율은 유리한이 저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굴었다.
“따라오십시오. 숙소를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야! 뭘 안내해 줘?! 처리해야지, 저것들!”
“네쥬, ‘저것들’이라니. 저분들께 실례입니다.”
“실례고 자시고!”
서문기율은 그렇게 네쥬와 함께 티격태격하며 걸음을 옮겼다.
유리한은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와 눈을 맞췄다.
그녀와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한의 뜻에 따르겠다는 태도.
유리한은 피식 웃고는 서문기율의 뒤를 따랐다. 그때 곁에 조용히 있던 니르로르가 입을 열었다.
- 유리한아.
“왜.”
- 저렇게 수상쩍은 녀석을 따라가도 괜찮은 것이냐?
“괜찮아.”
유리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서문기율의 안내에 따라 플레이어를 위한 숙소에 도착한 유리한은 곧장 그로부터 49층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들었다.
“흐음, 그러니까 여기는 혈맹의 지배 아래에 놓인 지 오래됐다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20여 년 전에 혈맹의 맹주가 수인족의 왕을 죽이고 이 층을 지배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침입자’와 ‘수호자’로 진영을 나눠 시험을 주관하고 있다는 거고요?”
“네.”
유리한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할 짓 더럽게 없나 보네.”
서문기율은 말했다. 49층의 시험은 수인족의 마을을 수호하는 쪽과 침입하는 쪽으로 나뉘어 치러진다고 말이다.
마을을 빼앗으면 침입자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수호자의 승리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남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유리한의 신랄한 말에 서문기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문기율 씨? 수인족의 수호자는 당신 하나뿐인가요?”
“저 말고 셋이 더 있습니다. 모두 제 동료들이지요.”
“그럼 다 합해도 네 명뿐이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아이고.
유리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서문기율로부터 49층의 정보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 예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야, 약자를 지키는 것보다 사냥하는 쪽이 훨씬 더 편하니까.’
유리한이 고민에 잠긴 얼굴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릴 때였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저…….”
서문기율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유리한 씨가 어느 진영으로 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주셔도 되는데?”
“그렇다면 수인족을 지켜주십시오. 수호자가 되어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서문기율이 고개를 한껏 숙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낮춘 자세였다.
“수인족의 마을은 원래 이곳을 제외하고도 서른 곳 가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남은 곳은 태초의 마을인 이곳뿐입니다.”
태초의 마을이라…….
“원래 다른 마을들은 이곳처럼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지 않았나 보네요?”
“네.”
서문기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마을은 이곳뿐이었습니다. 오래전, 호의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마법사가 그려준 것이라고 하더군요.”
“흐음.”
마법사라.
최근 들어 그들과 워낙 자주 얽히는 유리한이었다.
‘뭐, 만물의 마법사를 가리키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유리한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서문기율에게 물었다.
“플레이어들에게 침략당한 마을들은 모두 어떻게 됐나요?”
“흔적도 없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마을에 살고 있던 수인족은 모두 노예가 됐고요.”
“노예……?”
유리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서문기율이 말했다.
“유리한 씨도 보셨다시피 이곳은 경작할 땅이 부족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개간해야 하는데…….”
“그걸 수인족을 통해 이뤄내고 있다는 소리군요?”
서문기율이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은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도대체 왜?’
수인족을 노예로 부릴 이유는 없을 텐데?
유리한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서문기율이 말했다.
“재미있으니 말입니다.”
안 그래도 한껏 찌푸려졌던 유리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49층의 시험을 통과한 플레이어 중 위로 올라가는 자는 적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신들보다 강한 플레이어가 득실거리고 있으니까요?”
“정답입니다.”
서문기율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그들 사이에서 도태되느니 이곳의 수인족을 지배하기를 선택한 거지요.”
하, 유리한이 실소를 흘렸다.
“탑을 올라가는 것이 자신 없으면 그냥 밖으로 나가도 될 텐데 말이에요.”
“바깥세상에서는 저들 마음대로 활개 치고 다닐 수 없으니까요.”
탑 밖은 엄연히 ‘법’이란 것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더욱이 저들보다 강한 플레이어 역시 존재하기도 했고.
‘한심해.’
유리한은 가볍게 혀를 찼다.
숙소의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야! 서문기율!!”
들어온 사람은 네쥬. 서문기율 뒤에서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향해 화를 냈던 수인족 꼬마였다.
“네 동료들이 너 찾아.”
“아.”
서문기율이 얼빠진 소리를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른 궁금한 건 이 녀석한테 물어보고 하십시오.”
“누구 마음대로 물어보라는 거야?! 알려줄 생각 없거든! 야! 서문기율, 어디 가?! 야아!!”
그는 네쥬가 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수인족 꼬마는 닫힌 문을 보며 씩씩거렸다. 그런 아이에게 유리한이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네쥬라고 한 것 같은데 맞을까요?”
“지, 지금 나한테 조… 존댓말 쓴 거야?”
“네, 듣기 싫다면 편하게 말을 낮추도록 할게요.”
“아니!”
네쥬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유리한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른 취급 받는 걸 좋아하는 아이인 모양이었다.
네쥬는 우물쭈물 유리한의 눈치를 보다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서문기율, 저 자식이랑 이야기 다 끝낸 거 아니야? 이곳에 대해 다른 궁금한 거라도 더 있어?”
“네.”
유리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에게 물었다.
“이곳은 혈맹이 지배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분들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유리한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네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입자가 될 생각이라면 꺼져! 알려줄 생각 따위 없으니까!”
네쥬는 버럭 소리 지르고는 숙소를 나가버렸다.
쾅!
신경질적으로 닫힌 문에 유리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물었나 봐.”
“아니에요, 유리한 씨. 저분이 오해하신걸요?”
“맞다, 유리. 혈맹과 손을 잡을 생각 따위 없지 않나?”
“글쎄.”
유리한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는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왜? 당연히 수인족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
두 남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유리한은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니르로르는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 역시 짐의 부하이니라. 참으로 악랄하도다, 유리한아.
“닥쳐. 지금 누가 누구의 부하라는 거야?”
유리한이 손을 들어 니르로르의 둥근 이마를 쥐어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