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있었느니라. 수년 전, 한 여행객이 그 아이를 돌봤었다고 그 늙은 인간이 말해줬느니라.
유리한은 그 여행객이 청예신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그 여행객은 다른 마을로 충분히 떠날 수 있는데도 한동안 이 마을에 계속 남아있었다고 하더군.
하지만 결국 여행객은 떠났다.
- 그리고 그 여행객이 떠나자마자 궁주란 여자는 곧장 북해빙궁에 입문했다고 했느니라. 그런데 그 노인이 말하기를 그때의 기억이 오락가락한다고 하더군.
“그게 무슨 소리야?”
- 여행객이 먼저 떠난 것인지, 아니면 그 여자가 북해빙궁에 먼저 들어간 것인지 헷갈린다고 하더구나.
“흐음.”
그거야 나중에 청예신한테 물어보면 되는 일.
‘굳이 지금 묻지 않아도 되고.’
유리한이 아래턱을 만지작거리고는 니르로르에게 물었다.
“북해빙궁과 관련해서 다른 건?”
- 한 달 전, 북해빙궁이 일주일이 넘도록 대문을 개방하지 않았다고 했느니라.
설영이 세뇌에 걸린 것은 그때일 거다.
“대문을 개방하지 않은 것 말고 특별한 일은 없었대? 비명이 들렸다거나 뭐 그런 거.”
- 없었다고 했느니라.
없을 만도 했다.
‘마법을 사용했겠지.’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소리를 차단하는 것 따위, 마법사들에겐 손쉬운 일일 터.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니르로르가 말했다.
- 짐이 알아 온 것은 이제 끝이니라. 만족하느냐, 유리한아?
“그래, 수고했어.”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동그란 머리를 무성의하게 두드려주고는 말했다.
“마지막으로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 배부르게 먹고 돌아가자.”
- 국밥이 무엇이냐? 한 그릇만 먹어야 하는 것이냐?
“아니, 맛있으면 배가 터지도록 먹어. 어차피 내 돈 아니거든.”
이왕 이렇게 된 거, 한이연의 재산을 쪽쪽 빨아먹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국밥집에서 유리한은 원 없이 국밥을 시켰고, 그 금액은…….
“이 망할……!”
한이연에게로 날아갔다.
그는 마을에서 날아온 명세서를 보고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기를 정비하러 마을에 간다더니만, 아무래도 식도락을 즐기기 위해 간 모양이었다.
‘내 돈!’
한이연이, 아니, 그의 몸에 정신이 깃들어 있는 만물의 네크로맨서 리신이 이를 악물었다.
“사제, 무슨 일인가?”
“아, 사형.”
리신이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한이연의 얼굴로 선하게 웃었다.
눈앞의 남자는 동하. 한 달 전 북해빙궁의 대문이 닫혔을 때 그 자리에 없던 남자였다.
즉, 자칫 잘못하면 북해빙궁에 생긴 이상을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자라는 말이었다.
‘죽일까 했지만.’
만년빙정을 탈취할 때 써먹을 곳이 있을 수도 있어 섣불리 죽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리신은 웃는 낯으로 입을 나불댔다.
“별일 아닙니다. 궁주님의 손님들께서 마을에 잠깐 나갔다 오셨는데 재미난 하루를 보내신 것 같아서요.”
“그것참 다행이군.”
다행이기는!
리신이 속으로 한껏 욕설을 지껄였다.
동하는 사람 좋게 웃더니 물었다.
“그나저나 궁주님께서는 괜찮으신가? 폐관 수련을 끝내신 후 과중한 업무에 몸이 많이 상하셨다고 들었네만.”
북해빙궁주, 설영의 안부를 묻는 말에 리신이 눈웃음을 지었다.
“많이 괜찮아지셨습니다. 당장 저녁 식사 자리에 북해빙궁에 머물고 계시는 여행객분들을 초대하기로 하셨거든요.”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동하가 안도의 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연.”
“네, 사형.”
“궁주를 잘 부탁하네. 자네는 궁주께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시는 친우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리신이 동하를 향해 한껏 고개 숙였다. 동하는 리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는 자리를 떴다.
리신은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망할, 빨리 만년빙정을 찾고 이곳을 떠나야겠군.”
이러다가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 리신은 뒷목을 꾹꾹 누르다가 바람 빠진 목소리를 내었다.
“살점이 떨어졌잖아?”
리신이 한이연의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시체의 몸은 이래서 불편했다.
리신은 떨어진 살점을 꾹 눌러 붙이고는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유리한.”
그녀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당장 이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리신이 손을 들어 멀쩡하게 붙어 있는 목을 어루만졌다.
유리한, 그녀에게 들키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목적을 달성하고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20. 북해빙궁 (2)
드르륵, 탁!
유리한이 저를 찾아온 북해빙궁의 사람과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 남자들이 쓰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반 시진 이후에 데리러 온대.”
“반 시진이라면…….”
“30분 후예요. 여기 봐요, 옷도 따로 준비해 줬어요.”
유리한이 받아 온 치렁치렁한 옷을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니르로르가 유리한의 머리 위에 앉았다.
- 유리한아, 궁금한 게 있도다.
“뭔데?”
- 북해빙궁에서 저녁 식사 자리를 준비한 것을 잊었던 것이냐?
“아니, 알았는데?”
- 그런데 왜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온 것이냐?
“그야, 당연히…….”
그 자리에선 제대로 저녁을 못 먹을 것 같아서.
라는 말을 유리한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니르로르에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가보면 알아.”
니르로르가 미간을 좁혔다.
- 지금 말해다오, 유리한아.
“싫어.”
유리한은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옷을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에 맞춰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도 복장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리한이 입술을 오므렸다.
“와우, 두 사람 다 잘 어울린다!”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유리한의 칭찬에 고요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태양교 신관 일을 할 때 입었던 사제복과 비슷한 양식이라 좀 그러네요.”
“그것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걸요?”
유리한이 초롱초롱 두 눈을 빛내며 고요한의 차림새를 구경했다.
“유리, 너도 잘 어울린다.”
“땡큐! 디에스 너도 잘 어울려! 하지만 앞판은 좀 여며주지 그래?”
“답답하다.”
디에스 라고는 보란 듯이 상의 앞판을 여미고 있던 끈을 완전히 풀었다.
그에 유리한이 와락 얼굴을 구기고는 그가 풀어버린 끈을 손수 묶어주었다.
“궁주님과 처음 가지는 식사 자리잖아? 얼굴도 처음 보는 거고. 그러니까 옷차림에 신경 쓰세요, 디에스 라고 씨.”
디에스 라고는 마지못해 유리한의 말을 따랐다.
고요한은 순간 자기도 앞판을 묶고 있는 끈을 풀어버릴까 고민했다.
‘참자.’
애같이 구는 것 같아서 참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해빙궁의 사람이 그들을 데리러 왔다.
“마을 밖에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셨습니까?”
한이연이었다.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그를 반겼다.
“네, 덕분에요!”
밝기 그지없는 목소리. 한이연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을 유리한은 놓치지 않았다.
“그럼, 만찬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한이연이 걸음을 옮겼다. 유리한은 그 뒤를 따르며 북해빙궁 곳곳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별로 없네요?”
“대부분 폐관 수련에 들어간 상태라서 말입니다.”
“얼마 전, 궁주께서 폐관 수련을 끝내고 나오셨다면서요?”
“하하, 북해빙궁은 원래 윗사람부터 차례대로 폐관 수련에 들어간답니다.”
“아하, 그렇군요.”
유리한이 싱긋 웃었다.
“그럼, 한이연 씨는요?”
“네?”
“한이연 씨께서는 궁주님을 보좌하는 분이라면서요? 같이 폐관 수련에 들었던 건가요?”
“그럴 리가요.”
한이연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저는 검에 재능이 없어서요. 말 그대로 궁주님의 행정 업무만 보좌하고 있답니다.”
한이연은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멋쩍은 얼굴을 보였다. 유리한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랬군요. 제가 괜한 걸 물어본 것 같네요.”
“아닙니다. 그보다 도착했습니다.”
쏴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한겨울의 버드나무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아래, 푸른 기와를 올린 건물이 보였다.
북해빙궁에서 마련한 만찬장이었다.
“궁주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이고, 귀한 분을 기다리시게 만들었네요.”
유리한이 한껏 미안해하는 얼굴을 보이며 바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보다 한 걸음 앞서 안으로 들어간 한이연이 입을 열었다.
“궁주님, 여행객분들이 도착했습니다.”
상석에 앉아있던 여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북해빙궁주, 설영.
그녀의 푸른 눈이 유리한에게로 향했다가 거둬졌다.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푸른 눈을 보자 유리한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한이연은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궁주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을 위해 직접 마련한 자리이니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렴요!”
유리한이 설영의 옆에 앉고서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궁주님!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44층에서 편안하게 지내네요.”
설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그저 술이 가득 따라진 잔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유리한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 모습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목소리를 내었다.
“청예신.”
쨍그랑―!
설영의 손에 들려있던 푸른 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궁주님! 괜찮으십니까?!”
한이연이 놀라 그녀를 살피려고 했지만.
“유리!”
“유리한 씨!”
설영이 유리한의 멱살을 잡는 것이 더 빨랐다.
설영이 푸른 눈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네년,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듣는 년 기분 나쁘게 년이라니요? 초면에 무례하시네.”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제 멱살을 잡고 있는 여린 손을 덥석 잡았다.
“제 이름은 유리한이에요, 설영.”
갑작스럽게 끌어당기는 힘에 설영의 몸이 힘없이 기울어졌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유리한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유리한이 생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몸이 안 좋다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북해빙궁의 주인이라는 분께서 이렇게 힘없이 쓰러지다니.”
“네년……!”
설영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유리한이 그녀의 멱살을 잡고서 말했다.
“그러니까 듣는 년 기분 나쁘다니까요?”
유리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설영의 귓가에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었다.
“어젯밤, 왜 안 찾아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