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밤새 지독하게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해가 뜨자마자 그쳤다.
“날씨 한번 기가 막히네.”
“그러게 말이다.”
유리한의 감상에 디에스 라고가 동의했다. 그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입김을 보며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돌려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춥지도 않은지 잘도 돌아다니는군.”
고요한은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을 붙잡고 넉살 좋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침부터 일찍이 북해빙궁에서 마련해준 숙소를 빠져나온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들이었다.
아침에 대문을 넘자마자 고요한이 말했다. 자신이 대장간이나 객잔 등등 마을 시설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오겠다고 말이다.
“귀엽게 봐줘. 신기할 테니까.”
고요한에게 이런 겨울은 처음일 테니 말이다. 그는 지금 생선 맛을 처음 본 고양이처럼 굴고 있었다.
마을 사람과 이야기를 끝마친 고요한이 눈길에 발자국을 꾹꾹 찍으며 일행에게 돌아왔다.
두 뺨을 붉게 물들인 그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입을 열었다.
“유리한 씨, 대장간은 이대로 쭉 내려가면 보일 거래요.”
“그래요? 어제 만났던 그 어르신은 어디 계시데요?”
“대장간을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가면 낡은 기와집이 있는데 거기 사신다고 해요.”
“들었지, 니르로르?”
- 그래, 들었다.
“그럼 부탁할게.”
니르로르가 코웃음을 쳤다.
- 짐이 한낱 인간의 부탁을 들어주는 날이 오게 되다니. 영광으로 알거라.
“영광이고 자시고 얼른 다녀와.”
- 고마운 줄 모르는 녀석 같으니라고.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입술을 씰룩이고는 고요한이 말한 낡은 기와집을 향해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르로르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잠시 지금의 모습으로 안에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기로 했다.
니르로르의 몸을 감쌌던 검은 연기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졌다. 이내 드러난 것은 대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였다.
그는 그대로 척척 걸어가 대문을 열어젖혔다.
“인간, 있느냐?”
“뉘시오?”
니르로르가 뒷짐을 졌다.
“여행객이다. 고개를 조아려 짐을 반기도록 하거라.”
저 예의 없는 꼬마는 도대체 뉘 집 자식일꼬?
노인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마을에서 못 보던 꼬마이니 여행객이란 말은 맞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저렇게 어린 여행객은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여행객이 맞는가? 아님, 여행객들 사이에서 난 아이인가?’
노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니르로르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찾아왔다.”
노인은 이제 얼이 빠진 얼굴로 두 눈을 끔뻑였다.
그는 예의라고는 밥 말아 먹은 아이의 입을 찰싹 때려버릴까 하다가 그 입에 다른 것을 물려주기로 했다.
원체 아이를 좋아하는 그였기에 좋게 생각하기로 한 거였다.
“그래, 아가. 무엇이 궁금하여 이 늙은이를 찾아왔느냐?”
위대한 죽음의 드래곤인 이 몸에게 ‘아가’라니!
니르로르는 얼굴을 굳혔지만, 그 순간 솜사탕 못지않게 단맛이 나는 것이 입안에 쏘옥 들어오자 기분이 좋아져 헤실거렸다.
그래서 그는 노인의 무례를 가볍게 넘어가 주며 물었다.
“이곳의 궁주는 어떤 사람이지? 최근 들어 북해빙궁에 이상한 일은 없었나?”
유리한이 니르로르가 알아내 오기를 원하는 정보들이었다.
노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북해빙궁주께서는…….”
* * *
“니르로르 씨가 과연 잘하고 계실까요?”
“잘하고 있을 거예요.”
유리한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아니, 많이 부족한 도마뱀 새끼이기는 하지만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하긴 잘하고 계시겠죠.”
어제 만난 노인에게서 북해빙궁에 관한 정보를 얻어 오면 원 없이 솜사탕을 사주겠다고 약속한 유리한이었다.
니르로르, 그라면 솜사탕을 위해서라도 노인한테서 정보를 얻어내고자 할 터였다.
그 때문에 유리한은 걱정 없이 마을을 구경 중이었다. 바로,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 안에서.
“여행객분들, 음식 나왔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음식들이 상 가득 차려졌다. 유리한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종업원에게 말했다.
“북해빙궁의 ‘한이연’이라는 이름 앞으로 달아주세요.”
“아이고, 한이연 님의 손님분들이셨군요? 네네, 알겠습니다!”
유리한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 석 자에 객잔에 앉아있던 플레이어들이 두 눈을 빛냈다.
‘몇 달째 44층에서 시험이 치러지지 않는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그 때문에 북해빙궁의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 몰려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리한은 자신을 보는 플레이어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어깨를 툭 치면서 말을 건다면 모를까, 이 탑에서 유리한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그건 그녀의 일행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유리, 이 많은 것들을 다 먹을 수 있나?”
“당연히 못 먹지.”
유리한이 씨익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 시켜본 거야. 어차피 남의 돈이잖아?”
“그럼, 유리한 씨… 이것도 시켜봐도 되나요……?”
고요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더니 덧붙였다.
“무슨 음식인지 궁금해서요.”
“시켜요, 요한! 제가 말했잖아요? 어차피 남의 돈이라고!”
유리한이 호탕하게 웃고는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요, 하나 더 주문할게요!”
“그렇다면 이것도…….”
“좋아요, 좋아!”
디에스 라고는 순간 생각했다. 유리한이 애를 버려놓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애라고 하기에는 크지만…….’
뭐, 유리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으니까 신경 쓰지 말도록 할까?
디에스 라고는 그렇게 생각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가 고른 음식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칼국수였다.
유리한은 만둣국을 골랐고 고요한은 자신이 시킨 새로운 음식들을 먹었다.
그렇게 배를 채운 세 사람은 음식점을 나온 후에 곧장 대장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한이연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또한, 35층 엘브리스크의 무기를 검증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엘브리스크의 무기는 아주 훌륭한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좋은 무기라니! 죄송하지만 여행객님, 이걸 어디에서 얻으셨습니까?”
대장장이가 크게 감격하며 유리한에게 엘브리스크의 무기를 제게 팔라고 애원했다.
유리한은 배시시 웃으며 남자를 달래었다.
‘이곳을 포함해서 총 열 곳의 대장간에서 엘브리스크의 무기가 훌륭하다고 검증받았어.’
이만하면 검증은 끝내도 됐다.
유리한은 44층을 벗어나는 즉시, 유명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경매를 열어버리기로 했다.
돈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얻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유리한은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대장간의 사내들을 겨우 떼어놓고는 거리로 다시 나왔다.
“유리, 사람들한테 궁주에 대해 물어보지는 않아도 되나?”
“응, 괜찮아.”
궁주를 비롯하여 북해빙궁에 관한 정보는 니르로르가 열심히 수집 중일 터였다.
자신들은 마을을 구경하는 척, 정말 여행객이라도 된 기분으로 곳곳을 돌아다니면 됐다.
“마을 분위기는 어때 보여?”
“괜찮아 보인다만.”
“요한은요?”
“평화로워 보여요.”
“그렇죠?”
고요한의 말대로 마을은 굉장히 평화로워 보였다. 어떠한 이상도 없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유리한은 난데없이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느냐는 두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고서 잡화점으로 향했다.
딸랑, 종이 울리기 무섭게 잡화점 주인이 조르르 달려 나와 유리한과 그녀의 일행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세요.”
유리한은 가볍게 인사하고는 곧장 유리 진열대로 향했다.
“혹 찾으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네, 이곳에 ‘만년빙정’이라는 장신구가 있다고 들어서요.”
“만년빙정 말씀입니까?”
“네, 그런데 아무래도 이곳에는 없나 보네요.”
“아이고, 여행객님! 그건 북해빙궁의 보물입니다. 당연히 이곳에 없지요! 어디에서 헛소문을 듣고 오셨나 보군요?”
“북해빙궁의 보물이요? 이상하다. 저는 눈 결정과 같이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들었거든요.”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담? 여행객님, 만녕빙정은 장신구 따위가 아닙니다.”
잡화점 주인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만년빙정은 북해빙궁의 무인들에게 있어서 말 그대로 ‘보물’ 그 자체입니다.”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까요?”
“어휴, 당연히 알 수 있지요!”
주인이 너스레를 떨고는 말했다.
“만년빙정은 내공을 무한으로 증진시킬 수 있거든요. 물론, 그 과정에서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다고 하지만…….”
어차피 만년빙정은 궁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서 그가 덧붙여 말했다.
“또한 만년빙정은 어떠한 화마도 잠재울 수 있는 보물이지요. 그거 아십니까? 아주 옛날, 이곳에 커다란 화마가 덮쳤던 적이 있습니다.”
그 화마를 그때의 궁주가 만년빙정을 사용하여 잠재웠었다며 잡화점 주인이 나불거렸다.
그러자 유리한은 옳다구나, 하고 웃음을 지었다. 만물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70층 공략을 위해서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만물의 마법사들이 난데없이 44층에서 수작질을 벌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유리한은 잡화점 주인의 쉴 새 없는 이야기에 한참을 어울려주다가 가게를 빠져나왔다.
- 유리한아.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니르로르가 유리한의 머리 위에 앉았다.
그녀가 그의 목덜미를 잡고서 물었다.
“부탁한 일은?”
- 짐은 위대한 드래곤, 니르로르이니라.
그러니까 잘 처리하고 왔다는 소리였다. 유리한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그를 다시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 잘했어. 앞으로 솜사탕이 보이는 족족 사줄게.”
- 솜사탕은 됐느니라.
“그럼?”
- 달고나란 것을 다오. 늙은 인간이 만들어줬는데 맛있었느니라.
“…….”
유리한은 제 귀를 의심했다.
무엇을 달라고? 달고나? 지역 축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그게 맞는 거겠지?
“나 참, 이 세계에도 달고나란 게 있구나.”
그런데 왜 김치는 없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유리한이 새삼스레 생각나는 한국의 맛에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알았어. 북해빙궁에 돌아가서 한번 물어볼게.”
니르로르가 기쁘다는 듯이 꼬리를 파닥거렸다. 그러고는 노인한테서 얻어 온 정보를 유리한에게 들려줬다.
- 궁주란 여자는 어린 나이에 그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혈혈단신으로 북해빙궁에 입문하여 단기간에 궁주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더군.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니르로르가 그걸 말이라고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