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달이 기우는 늦은 밤, 청예신은 유리한이 떠난 자리에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됐다.’
유리한이 제 부탁을 들어줬다.
‘반쯤 도박이었는데.’
그 도박이 이렇게 들어먹힐 줄은 몰랐다.
청예신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가려진 시야에 불현듯이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영아…….’
설영, 그 이름은 잊을 만하면 떠올라 제 머릿속을 지배했다.
‘아니지, 내가 언제 영이를 잊었다고 그래.’
청예신이 자조적인 웃음을 작게 흘렸다. 수년 전, 44층을 떠난 그 순간부터 잊은 적이 없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장성하여 제 출입을 금지한 지금까지도 말이다.
설영, 그녀가 제 출입을 제한할 때 뭐라고 했더라?
‘어머니, 더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북해빙궁주로서 여행객인 당신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그 말을 내뱉던 아이의 얼굴은 어땠더라?
얼어붙은 눈과도 같이 차가웠던가? 아님, 녹아내리는 눈과도 같이 일그러져 있던가?
아무리 그때를 떠올려 보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오직 제 출입을 금하던 서린 날과 같은 차가운 목소리뿐.
청예신이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였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단장님.”
목소리의 주인은 엘던스 테레시였다.
그는 청예신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유리한과 청예신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킨 참이었다.
청예신이 그를 보고는 온화하게 미소를 그렸다.
“엘던스, 마침 잘 왔어. 유리한 님과 그분의 일행들을 위한 겨울옷 좀 준비해 줄래? 이왕이면 움직이기 가벼운 것으로.”
“겨울옷을 말입니까?”
엘던스 테레시가 놀란 눈을 보였다. 유리한과 청예신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자신은 청예신의 명령을 따르는 기사. 암만 43층의 지배자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고?
엘던스 테레시가 청예신이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시킬까 하여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43층에서 재미난 일이 일어났었다지?”
날카로운 질문에 엘던스 테레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알고 계셨구나!’
조금 전, 따로 대화를 나눌 때만 해도 그런 이야기는 일절 나오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다.
청예신은 얼굴이 희게 질려가는 그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죽었다는 마법사들은 걱정하지 마. 만물 측에서 아무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은폐할 생각인 게 분명했다.
‘아니면 죽었다는 마법사들이 별 쓸모 없는 녀석들이었다거나.’
하여튼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이었다.
“뭐, 어쨌든 엘던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라이가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질 수 있어. 보고할 때, 단단히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43층에서 일어났던 참상은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상부에 보고할 일이었다.
엘던스 테레시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네, 단장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날이 암담한 모양이었다.
엘던스 테레시가 제 앞에 드리운 먹구름에 한숨을 내쉴 때였다.
“그리고 일을 정리한 후, 빈민가에 복지 정책 좀 펼치도록 해.”
“복지… 말입니까……?”
“응.”
청예신이 미소를 그렸다.
“구시대의 영웅님께서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했거든.”
그러나 그녀는 43층의 빈민가에서 일어났던 참상에 대해 입 하나 벙긋하지 않았다.
‘모르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어떻게 처리할지 두고 볼 생각인 거겠지.’
저를 이런 식으로 시험하려고 들다니, 다른 사람 같았다면 겁도 없이 맹랑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바로 그, 유리한.
하는 짓이 깜찍하다고 낮잡아 볼 수 없는 여자였다.
“그럼, 엘던스. 부탁할게.”
“네, 단장님.”
엘던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음에 찾아오셨을 때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좋아. 기대할게.”
청예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이제 올라가실 겁니까?”
“아니, 이곳에서 기다릴 사람이 있거든. 두고 볼 일도 있고. 그러니 잠시 실례 좀 할게.”
기다릴 사람이라니?
엘던스 테레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눈치 좋게 상관에 대한 궁금증을 지우기로 했다.
그가 괜히 43층의 지배자 자리에 올라있는 게 아니었다.
청예신은 눈치 한번 기가 막히게 빠른 부하의 모습에 싱긋 웃음을 지었다.
청예신이 기다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설영이었다. 자식과도 같이 기른 아이.
청예신은 믿었다.
44층의 일이 정리되는 순간, 제게 가하진 출입 제한이 풀릴 것이라고.
그래, 분명히 그렇게 될 거라고 청예신은 믿었다.
* * *
“요즘 애들 능구렁이더라.”
유리한이 니르로르의 솜사탕을 뺏어 먹으며 구시렁거렸다.
그에 ‘요즘 애들’인 고요한이 몸을 움찔거렸다. 유리한이 그것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요한은 제외예요!”
유리한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이 능구렁이라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한테 데리고 오세요.”
그 입을 아주 꿰매버릴 테니.
유리한이 비릿하게 웃으며 뒷말을 삼켰다. 고요한은 유리한의 말에 안도하며 미소를 그렸다.
“유리한 씨께 데려갈 일 없이 그런 사람이 있으면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게요.”
몸 안에서 요동치던 마력은 안정된 상태였다.
‘더욱이 니르로르 씨가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으니까.’
곧 유리한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있을 거다.
‘동등하게.’
고요한의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걸릴 때였다.
“잘도 그러겠군.”
디에스 라고가 코웃음을 쳤다. 그에 고요한이 웃음을 지었다.
“잘도 그럴 거랍니다? 디에스 씨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요.”
“누가 언제 걱정을 했다고 그러는 거지?”
“제 걱정 한 거 아니었나요?”
파지직, 마주친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이 벌어졌다.
승자는 고요한이었다.
디에스 라고는 고요한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유리한에게 말했다.
“새롭게 청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주인이 그런 면모가 있다는 건 들었다. 하지만 유리,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권모술수에 능한 자인가 보군.”
니르로르와 함께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의 신경전을 구경하고 있던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권모술수에 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입은 정말 잘 놀리더라고. 괜히 청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게 아닌 모양이야.”
청예신, 그녀는 아주 능구렁이처럼 제게 자신의 일을 떠맡겼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지한이를 걸고 넘어가는데 그걸 어떻게 거절해?’
순간, 유리한은 궁금해졌다.
“디에스, 요한. 너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좋을 대로 이용당했다면 어떻게 할래?”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그 질문에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죽여버릴 거다.”
“저도요.”
유리한은 떨떠름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용당한 사람을……?”
“그럴 리가.”
디에스 라고가 유리한의 얼굴을 두 눈에 빤히 담고서는 말했다.
“이용한 녀석을 죽여야지.”
아주, 철저히.
시체 한 조각 찾지 못하게.
살벌하게 덧붙이는 목소리였다. 그에 고요한이 말했다.
“맞아요, 유리한 씨.”
그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덧붙여 말했다.
“이용한 녀석을 죽여야죠.”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유리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끝에는 역시 죽여야겠지.”
떨어진 낙엽이 발끝에 밟힌 것처럼 버석한 목소리였다. 니르로르가 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리한아, 너는 너를 이용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그럴 리가. 그리고 딱히 ‘나’라고 규정한 적 없어.”
유리한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곧, 그녀는 얼굴을 풀고서 말했다.
“그저, 부탁하고 싶어서 물어본 것뿐이야.”
“무엇을 말이냐?”
니르로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도 궁금하다는 얼굴을 보였다. 유리한은 실없이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만약, 내가 그런 녀석들을 용서하려고 들면 대신 좀 죽여달라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그렇다고 해도 유리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유지한, 제 하나뿐인 동생을 좋을 대로 이용했던 오광의 모두를 용서할 일은 없을 거라고.
청의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
전대가 저지른 과오라고 하나, 그와 얽혀있는 자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모두 처리해야지. 한 명도 남김없이.’
몇 년이 걸리든 제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녀석들을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죽일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굳게 결심한 얼굴에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말했다.
“걱정 마라, 유리. 네가 나서기도 전에 그런 녀석들은 내 손으로 모두 죽여줄 테니.”
“저도요, 유리한 씨. 유리한 씨가 괜한 피를 묻히지 않게 할게요.”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유리한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좋아, 두 사람만 믿을게.”
유리한의 한껏 풀어진 얼굴에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미소를 지을 때였다.
“유리한 님.”
엘던스 테레시, 43층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자의 두 손에 종이봉투가 한가득 들려있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두툼한 겨울옷이 가득했다.
“빠르기도 하지.”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다들 가볼까?”
“그 전에, 유리한아.”
니르로르가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한껏 낮춘 목소리에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별일은 아니다. 다만…….”
다만?
두근, 유리한이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니르로르를 쳐다봤다. 영겁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 니르로르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냈다.
“솜사탕을 하나 더 다오.”
정말로 별일이 아니었다.
유리한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시끄러.”
니르로르가 입술을 삐죽였다.
유리한은 그 얼굴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제 다시 탑을 올라갈 시간.
유리한은 제 동료들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겨울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것치고는 꽤 비장한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