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아, 기절하셨네. 왜지?”
비좁은 개구멍에서 빠져나온 유리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거나 한 명 잡았다.
유리한은 이름 모를 플레이어의 머리띠를 벗겼다.
[클라라 리온 님이 잡혔습니다!]
[남은 플레이어, 26명.]
“디에스는 아직인가 보네.”
그런 소리를 하기 무섭게 시스템 창이 떴다.
[데르나르 로덴 님이 잡혔습니다!]
[남은 플레이어, 25명.]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물쩍거리면 디에스에게 지겠는데?”
그럴 수야 없지.
승부욕이 불타오른 유리한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아래에서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찾아.”
내뱉어진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그림자가 의지를 가진 듯이 사방으로 뻗어갔다.
유리한이 지하에 숨은 클라라 리온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바로 ‘어둠을 지배하는 자(S)’의 효과 덕분이었다.
43층에 올라온 직후만 하더라도 유리한은 어둠을 지배하는 자(S)의 힘을 겨우 전투에 응용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칭호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이유.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유리한이 사방으로 뻗어나간 제 그림자를 보며 턱 언저리를 긁적였다.
유리한, 그녀도 자신이 어떻게 어둠을 지배하는 자(S)의 효과를 이런 식으로 발휘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저 직감에 따라 명령을 내리고 있을 뿐.
확실한 건, 일주일 전 사토 하루나와의 전투로 인해 자신이 달라졌다는 거다.
어쨌거나 어둠을 지배하는 자(S)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건 분명할 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서아.’
자신을 살린답시고 미래를 포기한 조카를 깨울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진 거니까.
유리한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스슥―!
사방으로 뻗어나간 그림자 중 한 갈래가 유리한에게 돌아왔다.
“찾았나 보네?”
유리한에게로 돌아온 그림자가 의지를 가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 술래로서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 * *
“저기 있다! 잡아라!”
“오른쪽으로 갔어! 잡아!!”
사방이 시끄러웠다.
고요한은 분수대 근처의 벤치에 앉아, 술래와 도망가야 하는 플레이어들의 숨 막히는 추격전을 구경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건 고요한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다.
- 하늘 머리 인간아, 심심하지 않느냐? 같이 솜사탕이라도 사러 가자꾸나.
제 머리 위의 작은 드래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인 것 같았지마는 말이다.
니르로르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고요한이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시간에 솜사탕을 파는 가게는 없어요, 니르로르 씨.”
해가 저문 지 오래인 시간이었다.
니르로르가 불퉁하게 말했다.
- 형편없구나.
언제는 43층의 솜사탕이 온 탑에서 제일이라고 하더니.
고요한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새끼 용의 모습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도 곧 시험이 끝날 거예요.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주세요.”
- 지루하도다.
니르로르가 고요한의 정수리 부근에 둥지를 텄다. 반가운 메시지가 떠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랑 블랑 님이 잡혔습니다.]
[남은 플레이어, 12명.]
유리한과 디에스 라고 중 누가 ‘랑 블랑’을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빠르게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2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벌써 열 명이 넘는 플레이들을 잡아버리다니.
고요한은 유리한과 디에스 라고의 능력에 새삼 감탄했다. 동시에 씁쓸해졌다.
‘나도 유리한 씨와 함께 시험을 치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심장 근처가 욱신거렸다. 고요한은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며 손을 들어 가슴 부근을 끌어 잡았다.
고요한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니르로르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 유리한, 그 녀석은 짐의 힘을 가졌으면 진작 시험을 끝내고 모습을 보여야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한심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고요한은 니르로르의 투정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입을 열었다.
“니르로르 씨.”
- 왜 부르느냐, 하늘 머리 인간아.
“궁금한 게 있어서요. 여쭤봐도 될까요?”
- 편하게 물어봐라, 하늘 머리 인간아. 너는 어두침침한 인간과 다르게 짐의 마음에 쏙 드니 특별히 궁금한 건 뭐든 답해주겠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고요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니르로르에게 물었다.
“유리한 씨만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가 뭔가요? 그것도 어느 순간 갑자기요.”
어느 순간 갑자기는 아니었다.
고요한은 니르로르가 언제부터 유리한을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는지 알고 있었다.
사토 하루나.
에델라이어 주교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만물의 마법사 때문에 유리한이 폭주했을 때부터였다.
고요한이 던진 질문에 니르로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 짐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고요한이 선하게 웃었다.
“저 역시 니르로르 씨에게 이름으로 불릴 수 있도록 열심히 니르로르 씨의 관심을 끌어보도록 해야겠네요.”
- 음흉하고 음험한 속내를 가진 인간의 이름 따윈 불러주지 않을 거다, 하늘 머리 인간아.
“제가 언제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 그러세요? 억울하답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니르로르는 기가 찼다. 유리한을 볼 때마다 그 눈빛이 어떤지, 니르로르는 고요한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고요한과 니르로르가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콰과광―!
43층의 도시가 크게 울렸다.
* * *
“아오……!”
유리한이 신경질적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저기요, 언니. 힘 빼지 말고 순순히 저한테 잡히는 게 어떠세요?”
“그럴 수는 없죠. 그리고 언니라니요.”
여자가 반달 모양의 커다란 칼을 유리한을 향해 치켜들었다.
“저보다 연상이시잖아요.”
내뱉어진 말은 서늘했다. 여자가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쥐 모양의 머리띠만 아니었다면 꽤 긴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거참, 재미없는 언니네.”
유리한이 우두둑, 손을 풀고는 곧장 걸음을 박찼다. 여자가 월도를 크게 휘둘렀다.
유리한은 검날을 타고 가볍게 날아올라 여자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광―!
내뻗은 주먹이 내리친 것은 바닥이었다. 유리한이 몸을 바로하고는 씨익 웃었다.
“오, 날래.”
가까스로 유리한의 주먹을 피해낸 여자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검을 드시죠. 아니면 다른 무기라도 드십시오.”
“왜요?”
여자는 쥐고 있는 월도를 유리한을 향해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다칠 테니까요.”
“재미없는 줄 알았더니 재미있는 언니였네.”
유리한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자가 놀라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은 고요했다.
아니, 그건 아니었다. 함께 43층의 시험을 치르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곳곳에서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주변만큼은 죽은 듯이 조용하군.’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여자는 알았다. 유리한이 모습을 숨긴 채, 제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저기요, 언니. 이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주변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쉬에화입니다.”
“오, 예쁜 이름.”
감탄 어린 목소리와 함께 웃음이 들려왔다.
“기억하도록 할게요, 쉬에화 씨. 영광인 줄 아세요. 제가 누군지 알아도 이렇게 겁 없이 저와 싸우려고 드는 플레이어는 오랜만이라서 그런 거니까.”
서로 적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쉬에화는 시대의 영웅에게 칭찬을 들었다며 좋아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시험을 치르는 중이었다.
쉬에화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유리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겸사겸사 조금 봐줄게요.”
“봐준다니……!”
“가르침을 주겠다는 거예요.”
“……!”
쉬에화가 놀라 헛숨을 삼켰다.
유리한의 손이 어깨에 가볍게 닿아있었다.
‘도대체 언제?’
쉬에화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네요. 월도를 잡고 있는 손도 그렇고요.”
쉬에화가 황급히 월도를 휘둘렀다. 부웅, 묵직한 칼은 허공을 베어냈다.
가볍게 월도를 피해낸 유리한이 웃는 낯으로 말했다.
“새로 무기를 구하는 게 어때요? 아니면 경량화 마법이나 그런 특성이 무기에 깃들게 해봐요.”
유리한의 손에 쉬에화의 것과 똑같은 월도가 들렸다. 유리한은 이를 가뿐하게 휘둘러 잡고는 몸을 움직였다.
“무게가 나가는 만큼 타격감은 죽여주겠지만, 그만큼 느려지는 법이라서요.”
후웅―!
허공을 가르며 들어온 것에 옅게 바람이 일었다. 쉬에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때요? 저, 빠르죠?”
유리한의 월도가 제 코 앞에 멈춰있었다.
쉬에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한이 들고 있는 건, 저와 똑같은 월도가 분명했다.
제 몸집만 한 반월의 모양을 띠고 있는 커다란 검.
그런데 그런 검을, 이런 속도로 휘두르다니!
쉬에화가 분한 얼굴로 들고 있던 월도를 내렸다.
“졌습니다. 여기, 머리띠를 드리겠습니다.”
쉬에화가 직접 머리위에 씌워져 있던 머리띠를 벗어 유리한에게 넘겨줬다.
유리한이 방긋 웃으며 쉬에화에게서 머리띠를 받아 들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35층에 ‘크리브’라고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있어요. 한번 그분께 새 무기를 부탁해 보세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쉬에화가 황급히 유리한을 쳐다봤다. 유리한이 그 시선에 방긋 웃었다.
“이거 귀한 정보인데, 마음에 들어서 특별히 가르쳐 주는 거예요.”
쉬에화가 입을 뻐금거리다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감사 인사를 하려는 찰나.
“유리.”
디에스 라고가 나타났다. 손에 웬 사내를 들고서.
쥐 모양의 머리띠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잡아야 하는 플레이어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유리한이 활짝 웃으며 디에스에게 다가갔다.
“많이 잡았어?”
“너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는 잡았다. 그보다 조금 전에 이 근처에서 큰 소리가 들렸는데…….”
“아아, 그거? 잠깐 일이 있어서 그랬어. 그보다.”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의 손에 들려있던 사내의 머리띠를 벗겼다.
[토마스 리엄 님이 잡혔습니다!]
[남은 플레이어, 10명]
“얘, 내가 잡은 거다?”
디에스 라고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쉬에화에 이어 토마스 윌리엄.
두 사람을 연달아 잡은 유리한이 활짝 웃었다.
남은 플레이어는 이제 열 명.
아직, 3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