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성장의 세 번째 문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유리한이 피곤한 낯을 문질렀다.
“후우… 지친다, 지쳐…….”
바깥으로 나오면서 신체에 남은 상처와 피로는 모두 회복됐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그대로였다.
더욱이 유리한은 스탯 능력치 중 ‘정신력’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른 능력치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상태였다.
어쩔 수 없었다. 시험이든 퀘스트든, 유리한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성공시켰다.
‘정신력’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스탯 능력치였는데, 시련과 고난. 두 단어는 모두 유리한과 거리가 먼 단어들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탑을 한 번 오른 경험이 있는 디에스 라고가 있었고, 다칠 때마다 힐을 시전해 주는 고요한이 자신의 동료였다.
옆에서 정신 사납게 날개를 열심히 흔들고 있는 드래곤은 또 어떻고. 시련과 고난을 겪고 싶어도 겪을 수가 없는 구조였다.
니르로르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않는 유리한에게 말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인 것 같다.
“그런 나약한 존재에게 죽었던 너는 한심한 존재겠네.”
- …….
니르로르가 저를 존경할 줄 모르는 인간을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래 봤자 자그마한 몸집에서 나오는 기세. 유리한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니르로르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유리한이 그를 향해 한껏 웃음을 지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숙소로 돌아가기나 하자.”
안락한 침대 위에 드러눕고 싶었다.
돌아가자는 말에 니르로르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유리한의 어깨 위에 앉았다.
- 인간, 돌아가는 길에 가게 좀 들르자.
“어떤 가게?”
- 솜사탕.
“응, 안 돼.”
무슨 드래곤이 솜사탕같이 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42층에서 한번 엿 먹어보라고 장난삼아 먹여봤었던 음식인데, 그게 드래곤의 취향을 저격할 줄이야.
- 인간아, 솜사탕…….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먹고 싶었으면 제대로 좀 가르쳐 주지 그랬어?”
- 짐은 제대로 가르쳐 줬다. 인간, 네 머리의 용량이 부족해서 짐의 말을 따르지 못한 거지.
하하, 우리 새끼 드래곤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말하네.
“솜사탕 두 번 다시는 없을 줄 알아.”
- 못된 인간 같으니라고.
“응, 내가 좀 못됐어.”
유리한은 니르로르의 구시렁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숙소로 향했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온 유리한은 안락한 침대 위에 드러눕는 대신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 * *
“…유리?”
“오, 디에스. 씻고 나온 거야?”
돌아온 유리한을 반긴 건, 허리에 수건만 두르고 있는 디에스 라고였다.
유리한이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노크라도 하고 문을 열 걸 그랬네.”
유리한은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려 숙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43층의 시험은 지배자가 원하는 때에만 치러지고 있어 장기적인 투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호텔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9층의 리스체가스와 같이 중세 유럽풍의 건물이 즐비한 이곳에서 호텔의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은 찾을 수가 없었다.
‘좀 만들지.’
43층의 지배자는 플레이어라고 들었는데, 그런 숙박 시설도 만들지 않고 뭐 했는지 모를 유리한이었다.
어쨌든,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보인 디에스 라고의 반나체에 유리한은 두 손을 모아 사과했었다.
“쏘리.”
“미안할 것까지야.”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디에스의 모습에 유리한은 키득거리고는 안으로 들어서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어……?”
유리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곁에 있는 니르로르도 황당하다는 듯이 붉은 눈을 끔뻑였다.
그때,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한 씨,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요한?”
아무래도 고요한이 현관문을 닫아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왜?
유리한이 당혹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현관문 안쪽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디에스 씨, 그런 차림새로 돌아다니면 어떻게 합니까? 유리한 씨 시력 떨어뜨릴 일 있어요?”
“뭐? 말 다 했나, 지금?”
“아니요. 아직 다 안 했습니다.”
요 며칠 평화롭게 지낸다 했더니 살벌하게 말싸움을 시작하는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였다.
둘의 설전이 조금 길어질 것 같아 유리한은 현관문에 기대어 앉아있기로 했다. 니르로르가 그녀의 머리 위에 앉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 이상한 걸로 싸우는군.
“이상한 건 아니지. 누구라도 남에게 나체를 들키면 부끄럽고 당황스러울걸? 제삼자의 일이라고 해도 말이야.”
하지만 당사자인 자신과 디에스 라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야, 혼란과 격변의 시대에 숱하게 겪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리한의 친절한 설명에 니르로르는 미간을 좁혔다.
- 짐은 언제나 나체 상태이다만.
유리한이 떨떠름한 얼굴로 새끼 드래곤을 쳐다봤다.
“어… 그래…….”
- 뭐지, 그 반응은?
“알 거 없어.”
저를 무시하는 태도에 니르로르가 이를 드러냈다. 유리한에게 별다른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때,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고요한이 얼굴을 내밀었다.
“유리한 씨, 죄송해요.”
“아니에요, 요한. 디에스와 설전은 다 끝났나요?”
“설전이라니요.”
고요한이 유리한에게 손을 내밀며 눈웃음을 지었다.
“서로 지내는 데 필요한 예의를 알려준 것뿐이랍니다.”
하긴, 남녀가 함께 지내는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나나 디에스는 서로 못 볼 꼴 볼 꼴 다 본 사이라 상관없지만, 요한은 아니니까.’
유리한이 방긋 웃으며 고요한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렇게 들어선 안, 디에스 라고는 위아래를 꽁꽁 싸매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디에스, 옷 입었네?”
“저 녀석이 하도 난리라.”
디에스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보였다. 고요한은 그런 그를 못 본 척 무시하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유리한 씨. 디에스 씨께 충분한 주의를 줬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요한. 저도 디에스 앞에서 가운만 입고 돌아다닌 적 있는걸요?”
“네……?”
고요한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그는 당신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다는 눈길로 디에스 라고를 노려보았다.
디에스는 헛기침을 두어 번 터트리고는 유리한에게 물었다.
“볼일은 모두 끝마치고 왔나?”
“응.”
유리한이 니르로르를 향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망할 용 새끼가 너무 완벽하게 가르쳐 주셔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내고 왔어.”
반어법이었다.
하지만 니르로르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뿌듯하다는 얼굴로 날갯죽지를 으쓱여 댔다.
유리한이 눈치라고는 없는 새끼 용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디에스 라고에게 물었다.
“시험에 대해서는 좀 알아왔어?”
43층 이전까지의 시험은 디에스 라고의 기억에 의존하여 준비하고 치렀었다.
그의 기억과 달라진 부분이 크게 없어 빠른 속도로 탑을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43층은 디에스 라고의 기억과 상당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지배자가 탑의 주민에서 플레이어로 바뀐 것부터가 그랬다.
아는 것이라고는 43층의 시험은 지배자가 원하는 때에만 치러지는 시험이라는 것.
그 주기는 보통 한 달에서 석 달 정도라고 했다.
유리한의 질문에 디에스 라고가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그것이…….”
대답해 주기 곤란하다는 눈치였다. 그를 대신하여 답해준 사람은 고요한이었다.
“아무래도 43층에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유리한 씨.”
“어차피 그러기로 한 게 아니었나요?”
질문을 던졌던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고요한이 저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43층의 지배자가 자리를 비웠다는군.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 * *
유리한은 43층의 지배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을 들은 뒤,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아주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이다.
“지배자가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도 돼?”
“플레이어니까.”
유리한은 앓는 목소리를 내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래서 자리를 비우신 그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대?”
“9층이요.”
“9층이라면…….”
유리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리스체가스에 있다고요?!”
도대체 왜?
유리한이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고요한이 설명을 붙여주었다.
“우리가 리스체가스를 떠난 후, 새로 지배자를 뽑는 시험이 열렸다나 봐요.”
“플레이어들의 상대로 말이지.”
디에스 라고가 고요한의 말을 뒤이어 입을 열었다.
“오광(五光)의 녀석들이 유리, 너를 쫓고 있었다는군.”
“나를?”
“그래, 서로의 길드에 입단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말이다.”
유리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녀석들이 바로 오광이었다.
‘그런데 자기네 길드에 들어오라고 사람을 보냈었다니.’
염치란 것을 도대체 어디로 내다 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까드득, 이가 절로 갈렸다.
하지만 분노에 이성이 잠식되어서는 안 됐다. 유리한은 분노로 들끓는 머리를 빠르게 식혔다.
그러고 보니 34층, 태양교의 신전에서 만났던 만물의 마법사들이 그랬다.
‘도대체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하면 만물의 높으신 분들께서 그렇게 기를 쓰며 모시고 오라 할까? 또…….’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유리한이 짜증스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니르로르가 갈무리되지 못한 유리한의 성난 기운을 느끼고선 그녀를 흘긋거렸다.
유리한은 알아차리지 못한 새끼 드래곤의 작은 시선이었다.
디에스 라고 역시 유리한에게로 향하는 니르로르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어 말했다.
“43층의 지배자는 청의 기사단 소속이지. 그는 윗대가리들의 명령을 받고 너를 만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재수 없게 9층의 지배자를 새로 뽑는 시험에 휘말리게 된 거고?”
“그래.”
유리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9층의 지배자를 새로 뽑는 시험은 아직 진행 중이야?”
“아니요. 끝난 지 한 달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고요한의 친절한 대답에 유리한이 얼굴을 찌푸렸다.
“요한, 지배자의 자리를 두 개 이상 가질 수 있나요?”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도 43층으로 올라오고 있지 않다니.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남아서 새로 지배자가 되신 분을 도와주고 있나 보네.”
그리고 9층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신 분께서는 같은 길드인 청의 기사단 소속일 거고.
유리한이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층이나 제대로 돌볼 것이지. 일이 꽤 귀찮아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