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쐐액―!
화살이 날아들었다. 플레이어들 중에 궁수라도 있었나 보지. 유리한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동시에 스퍼트를 내며 검을 휘둘렀다.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
대각선으로 휘둘러진 것이 긴 궤적을 그렸다.
“피해!”
“소노라! 방어막 좀 펼쳐줘!”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다들 긴장 타!!”
파지직! 플레이어들 위로 생겨난 투명한 막이 유리한이 날린 검격에 의해 양 갈래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야, 저 괴물은!”
“자… 잠깐만! 나 알겠어, 저 여자! 분명……!”
플레이어들이 유리한을 상대하는 사이, 엘프들은 말을 몰았다.
무리의 선두에 선 엘프.
부장로인 라엘리브는 인간들이 저들끼리 싸울 때에 하프들의 마을로 가고자 했다.
하지만.
“끼야아악!”
“소노라!!”
마법사의 째질 듯한 비명에 그는 멈춰 섰다. 뒤돌아본 광경에, 얼굴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 앞에 피를 뚝뚝 흘리는 검을 쥐고 있는 여자도.
눈이 마주쳤다. 엘프는 시력이 좋다. 그렇기에 라엘리브는 여자의 검은 두 눈에 그대로 비치고 있는 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움츠렸다. 이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마는.
‘이 내가, 지금 두려움을 느낀 건가? 한낱 인간 따위한테?’
플레이어가 자신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하지만 엘프들은 언제나 그들을 덜떨어진 존재들이라 여겼다.
자제할 줄 모르고, 절제할 줄 모르는. 오직, 위로 향하고자 하는 욕구만 가득한 탐욕스러운 존재들.
그런 그들을 언제나 하찮은 미물로만 여겼건만.
라엘리브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는 사이 플레이어들 간의 싸움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소노라! 이 망할 년이……!”
“안 돼, 케인! 저 여자는!!”
촤악―!
오른쪽 쇄골 부근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길게 베인 남자의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케인!!”
인간들의 비명에 라엘리브는 결국 말을 돌렸다.
“반푼이들의 마을로 이동하는 건 조금 뒤로 미루도록 하지.”
라엘리브가 희고 고운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신호였던 듯, 형형색색의 마법진이 곳곳에 펼쳐졌다. 동시에 엘프들은 활시위를 끌어당겼다.
“다들, 저 인간을 처치하도록.”
라엘리브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수십 발의 화살이 유리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유리한을 노리려고 들던 플레이어들이 혼비백산하여 제 동료를 챙겨 들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유리한은 여유로웠다.
“보자…….”
엘프들이니까 활을 잘 쏘는 건 당연한 거고. 문제는 마법인데.
휘익, 탁.
유리한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어느새 기다란 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자세를 취했다.
상반신은 옆으로 살짝 틀고, 왼 다리는 앞으로 내밀어 지지대로 삼았다.
완벽한 창기지의 자세.
유리한은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화살 비를 향해 그대로 창을 집어 던졌다.
쐐애액―!
내리던 화살 비가 일어난 돌풍에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들을 가르며 지나간 것은 그대로 라엘리브의 목을 노렸다.
“……!”
눈 하나 좋은 라엘리브가 급히 고개를 틀었다. 몇 가닥의 머리칼이 날아든 창에 끊기고 말았다.
“라엘리브 님, 괜찮으십니까?!”
“저 인간 놈이……!”
왁왁, 동족들이 떠들어 대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라엘리브는 반응할 수 없었다. 아니, 반응하지 못했다.
그는 손을 잘게 떨며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싶더니, 이내 두 눈이 멀고 말았다.
라엘리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 그 인간의 짓이리라.
자제할 줄 알고, 절제할 줄 아는 고귀한 종족.
엘프의 부장로인 라엘리브가 벼락과도 같이 소리 질렀다.
“누구라도 좋다! 분수도 모르는 인간 놈을 형체도 없이 짓뭉개 버려라!”
곳곳에 펼쳐져 있던 형형색색의 마법진에서 파지직, 강한 전류가 튀기 시작했다.
유리한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몸이 옅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에 휩싸여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유리한을 놓칠세라, 그녀가 서있던 자리로 전격이 내리쳤다.
쿵, 쿠웅―!
그러나 유리한은 없었다.
“찾아! 흔적을 놓치지 마라!!”
“마구잡이로 공격이라도 해!”
곳곳에서 고성이 오갔으나 그 목소리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각에서 청각, 청각에서 촉각.
“아… 아아……!”
“뭐, 뭐야? 다들 어디 있어! 들리면 대답 좀 해!”
“아, 아무것도 안 보여! 안 들려! 안 들린다고……!”
미각은 친절함을 발휘하여 남겨두고 후각은 어쩔까?
“흑… 흐아악!!”
후각 역시 남겨둘까.
자고로 ‘공포’란 것은 상황에 따라 효과적인 무기가 되고는 했다.
“사, 살려……! 살려줘……!!”
바로 지금처럼.
바닥에 흩뿌려진 피 냄새를 맡았나 보다. 유리한은 손에 들려있던 나이프를 가볍게 쥐었다.
뚝뚝, 떨어진 피가 구둣발을 적셨으나 유리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수라장을 두 눈에 담을 뿐이었다.
서로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엘프들이 결국 마구잡이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후웅―!
뺨을 스치고 날아간 구체에 기다란 생채기가 나고 말았다.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고선 걸음을 내디뎠다.
서로를 학살 중인 엘프를 향해.
* * *
“크리브!”
고요한과 디에스 라고를 데리고 하프들의 마을에 들어서던 크리브가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아무 일도 없었지?!”
“응! 아무 일도 없었는데…….”
크리브를 향해 달려오던 하프들이 느릿하게 걸음을 멈추었다.
크리브의 곁에 있는 인간 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크리브가 하프들의 눈에 서리는 경계심을 읽고선 황급히 두 사람을 그들에게 소개해 줬다.
“아, 이쪽의 인간들은 그 이상한 인간 녀석의 동료들이야.”
“이상한 인간 녀석? 설마 유리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유리한 씨가 왜 이상한 사람이죠, 크리브 님?”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의 날 선 목소리에 크리브는 입을 다물었다.
인간들 말 중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뜻이라는데, 크리브는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을 보며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상한 인간과 함께 다니고 있던 둘이다. 두 사람 역시 이상한 인간일 게 분명할 터.
때문에 크리브는 두 사람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기로 했다.
디에스와 고요한은 물끄러미 크리브를 쳐다보며(혹은 노려보며) 그에게 대답을 촉구했지만.
“크리브가 돌아왔다고?”
“엘리!”
크리브에게 구세주가 나타나면서 그에게서 ‘유리한이 왜 이상한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됐다.
크리브는 곧장 엘리에게 달려갔다. 엘리가 반갑게 크리브를 안았다. 그렇다고 해도 크리브는 엘리의 허리를 겨우 넘는 키였다.
그러니까 엘리의 얼굴을 디에스 라고와 고요한이 그대로 볼 수 있었다는 말이다.
때문에 둘은, 아니. 디에스 라고는 엘리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엘리아프?”
엘프들의 마을을 떠날 때 버렸던 이름이 들려왔다. 엘리가 경계심을 드러내며 디에스 라고를 쳐다봤다가.
“당신은……!”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디에스 라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에스는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 고요한의 질문을 무시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분명 죽었다고 했는데.”
“그러는 디에스 님께서는 이곳에 무슨 볼일이세요? 탑을 올라가신 지 30년은 더 된 것 같은데.”
“아직 30년을 넘지는 않았다고 하더군.”
디에스가 엘리와 반갑게 안부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위 하프들은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결국, 크리브가 엘리의 옷깃을 죽죽 잡아당기며 그에게 물었다.
“엘리, 아는 인간이야?”
“디에스 씨, 아는 분이신가요?”
고요한 역시 마찬가지.
둘의 질문에 엘리아프와 디에스 라고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 하고 탄식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엘리였다.
“드워프들과 한창 전쟁 중일 때 엘프들을 도와줬던 플레이어셔. 나쁜 분은 아니야.”
“하지만 드워프분들께는 나쁜 분이셨겠죠.”
고요한이 끼얹은 찬물에 디에스 라고가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고요한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능청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에 디에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는 말했다.
“이쪽은 엘리아프. 분명 엘프 장로의…….”
디에스가 목소리의 끝을 흐렸다.
엘프 장로와 혈연지간인 것을 고요한에게 밝혀도 되는지 순간 고민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고민이 우습다는 듯, 엘리가 디에스의 말을 이었다.
“엘프 장로인 엘라이브의 둘째 아들입니다. 양아들이에요. 어머니가 플레이어이신 하프라, 아버지는 제가 태어날 때 돌아가셨었거든요.”
“아아, 그렇군요. 저도 혼혈이랍니다. 아버지가 플레이어셨죠.”
“정말요? 어머니 쪽은 평범한 인간이셨나 보네요. 신체적으로 두드러지는 특징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네, 평범하신 탑의 주민이셨어요. 비록 아버지를 사랑하신 죄로 제 어머니 역시 일찍 돌아가셨지만요.”
하프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고요한은 이종족 간의 하프를 보는 건 처음인지, 꽤 흥미가 돋은 얼굴이었다. 엘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하프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디에스 라고는 그들의 이야기를 도중에 끊게 됐다.
“그래서 엘리아프, 너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분명 서쪽의 전투에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아…….”
“그리고 유리는. 이봐, 크레커인지 크레브인지 너. 유리가 이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유리는 어디 있지?”
크레커도 아니고 크레브도 아니다. 크리브는 뚱한 얼굴로 디에스 라고를 쳐다봤다.
유리한이 하프들의 마을에 있을 거라고 한 건 맞다. 하지만 덧붙여 말하기도 했다.
하프들의 마을에 유리한이 없을 수도 있다고. 그런데 그건 생각도 나지 않나 보다.
하긴, 유리한과 함께 다니는 이상한 녀석이 자신의 말을 똑바로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크리브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 여기 있어, 디에스.”
“유리… 윽……!”
“유리한 씨!”
고요한이 디에스 라고의 어깨를 밀치고는 반가워 그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크리브 님께서 무사히 데리고 왔나 보네. 다행이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서 드러난 유리한의 모습에 고요한은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누가 죽었었다고?”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크리브가 멍하니 입을 뻐금거렸다.
누구 죽은 사람은 없는데, 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