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경계심 어린 황금빛 두 눈이 고요한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고요한은 붙잡힌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악력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디에스 라고는 그런 그의 손목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며 말했다.
“대답해.”
잘못하면 부러지겠다.
하지만 고요한은 손을 놔달라느니, 나는 만물의 사람이 아니라느니. 그런 말들을 지껄이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팽팽하게 조이는 공기를 느슨하게 푼 것은 유리한이었다.
“디에스, 그 손 놔.”
유리한이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디에스 라고가 흠칫, 몸을 떨고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유리한이 서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는 낯이었던.
“오, 역시 몸 하나는 진짜 튼튼하다니까? 아니면 요한이 능력 좋은 건가?”
매일, 몇 번이고 그리기만 했던 유리한이.
디에스 라고는 자신도 모르게 고요한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꿈인가? 그 긴 잠에서 나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건가?
하지만 쫙! 손뼉을 마주치는 소리에 디에스 라고는 제 눈앞의 여자가 꿈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어쨌든! 턱에 주먹을 그대로 맞고도 바로 정신을 차리다니 역시 대단해, 디에스.”
“…유리?”
“그래.”
유리한이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오랜만이야, 디에스.”
남자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 7. 만물(萬物) 】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디에스 라고가 일어날 생각을 않고 멍하니 읊조렸다. 유리한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디에스의 뺨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어때? 지금도 꿈인 것 같아, 디에스?”
나지막하게 들린 목소리에 디에스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꿈일 리가 없다. 제 뺨을 쥐고 있는 이 손은, 닿아있는 온기는, 분명 현실이었다.
디에스 라고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유리.”
“응.”
“유리한.”
“응, 디에스.”
몇 번이고 부르고 싶었던 이름.
디에스는 유리한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가 이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한 손으로는 유리한의 여린 허리를,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자그마한 머리를.
그렇게 디에스 라고는 유리한을 빈틈없이 제 품에 안았다.
“야아, 답답해.”
유리한이 좀 놔달라며 디에스의 등을 두드렸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사라질세라 더욱 세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 어깨를 짚는 손에 디에스는 유리한을 품에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만하세요.”
고요한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유리한 씨, 당신 때문에 지금 다치셨거든요.”
그 말에 유리한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 괜찮아요, 요한. 요한 덕분에 상처는 다 나았으니까요!”
“그래도요.”
유리한 씨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면서 고요한은 그녀의 손을 잡아 디에스에게서 떼어냈다. 디에스는 순순히 유리한을 놓아주었다. 대신 그는 고요한에게 물었다.
“유리가 나 때문에 다쳤다고?”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 부근의 살갗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 보였다. 디에스가 황급히 제 겉옷을 벗어 유리한에게 건네주려는 찰나.
“기억 안 나시나 보군요?”
고요한이 다소 날 선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디에스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눈앞의 남자가 왜 이렇게 제게 적대감을 보이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디에스, 이제 제발 좀 정신을 차려주면 안 될까……?’
간절하게 저를 향했던 목소리. 디에스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봉인을 억지로 깨뜨리면서 잠깐 흐려진 의식에 그녀를 공격하고 말았다.
눈앞에 보였던 유리한이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를 끌어안았어야 할 판국에.
“…유리, 내가 너를.”
공격하고 말았다.
유리한이 디에스의 얼굴에 비치는 죄책감을 보고는 황급히 그를 달랬다.
“아니야, 디에스. 보다시피 상처는 다 나았고…….”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유리한이 말했지만 디에스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유리한의 손바닥에 묻은 붉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흘린 피.
제 뺨에 뚝뚝 떨어졌던 것이기도 했다. 이를 상기해 낸 디에스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꺼내 들어 제 어깨에 찔러 넣었다.
“디에스!”
저 미친 자식이!
유리한이 경악하며 디에스의 팔을 끌어 잡았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내가 너를 상처 입히지 않았나, 유리.”
디에스는 제 어깨에 박아 넣었던 단검을 빼내고선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기껏 만난 너를, 내가…….”
“디에스!”
디에스 라고의 의식이 멀어졌다.
봉인을 억지로 깨부순 데에 이어, 유리한에게 턱을 가격당하기까지 했다. 그런 몸을 억지로 일으킨 데다가 스스로 상처까지 입혔으니 버틸 리가 만무했다.
유리한이 기울어지는 그의 몸을 황급히 받아 들었다. 고요한은 다소 놀란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리한 씨의 소중한 분께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살짝 미치신 분 같아요.”
“하하, 그런 면이 없지 않아서 부정할 수가 없네요.”
유리한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고요한은 유리한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디에스 라고.
그는 정말 미친 사람이었다. 유리한, 그녀에게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
그걸 왜 당신은 모르는 걸까?
고요한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고는 유리한을 바라보았다. 유리한은 의식을 잃은 디에스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한? 미안하지만, 디에스를 당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도 괜찮을까요?”
“네? 네, 물론이죠. 그리고 그분은 제가 부축할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아요.”
고요한이 유리한에게서 디에스 라고를 받아 들고는 그를 짐짝 들듯이 들었다.
유리한은 ‘사람을 저렇게 들어도 괜찮나?’라고 잠깐 생각하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태양교의 사제, 그것도 치유 능력을 가진 고요한이다.
정신을 잃은 사람을 다룬다거나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은 자신보다 뛰어날 터.
유리한은 기꺼이 디에스 라고를 고요한에게 맡겼다. 그러고는.
“아, 저기 요바네스 대주교님? 알아서 상황을 잘 정리해 주실 거죠?”
모든 상황이 끝난 후,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요바네스 한나에게 그리 물었다. 요바네스 대주교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지요! 걱정,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다 처리해 놓겠습니다!”
유리한이 그 대답에 만족스러워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머지않은 시일 내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유리한은 인사성 밝게 요바네스 대주교를 향해 고개를 살짝 꾸벅이고는 낡은 신전을 나갔다.
“허… 허어…….”
요바네스 한나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리프탄 라올의 시체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황망하게.
* * *
어쨌거나 유리한은 고요한과 함께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설 때와는 달리, 한 명이 더 늘어난 인원.
“어때요, 요한?”
“잠깐 정신을 잃은 것뿐이에요. 어깨의 상처도 그리 깊지 않으니 금방 깨어날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한 씨.”
디에스 라고를 침대에 내팽개치듯이 던져놓은 고요한이 유리한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유리한이 침대 끝에 걸터앉고는 입을 열었다.
“디에스가 깨어나는 대로 다시 탑을 올라가야죠.”
“디에스 씨와 함께, 말이죠?”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유리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한, 디에스는…….”
“알아요, 유리한 씨의 소중한 분이란 거.”
고요한이 디에스의 상처를 살피는 척, 그런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분과 함께 탑을 올라가는 데 불만을 표할 생각은 없어요. 저는 괜찮답니다, 유리한 씨.”
라고,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고요한이 말했다.
잔뜩 심통이 난 다람쥐 같네.
유리한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는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요한. 싫으면 싫다고 말씀해 주셔도 돼요.”
부드럽게 저를 달래는 목소리에 고요한은 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가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실 싫어요. 싫습니다.”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고요한은 말을 이었다.
“유리한 씨를 다치게 했잖아요. 이분도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럼 알아봤어야죠.”
자신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알아봤을 거다.
제 하나뿐인 태양을.
고요한이 분하게 이는 마음에 두 손을 주먹 쥘 때였다.
“그건 할 말이 없군.”
“디에스?”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디에스 라고가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유리한에게 잠깐 머물렀다가 고요한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그러니까 이름이…….”
“고요한입니다.”
“그래, 요한.”
디에스가 아직 몸이 불편한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에 유리한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디에스, 괜찮아? 조금 더 누워있지 그래?”
“괜찮다, 유리. 네가 말했듯 내가 몸 하나는 튼튼한지라.”
“얼씨구? 아주 잘나셨어요?”
유리한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디에스의 어깨를 쳤다.
그가 스스로 검을 찔러 넣었던, 바로 그 위치에.
“윽……!”
날카롭게 이는 통증에 디에스 라고가 자신도 모르게 앓는 목소리를 내었다.
유리한이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왜 그래? 아파?”
그럴 리가 없는데? 요한이 치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유리한이 당황하여 고요한을 보았다. 그는 태평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아, 이런. 죄송해요, 디에스 씨. 힐이 제대로 안 먹혔나 봐요.”
하지만 디에스 라고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식, 일부러 자신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 디에스가 이를 으득 갈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유리, 저 녀석은 뭐지?”
“저 녀석이 아니라 고요한. 조금 전에는 잘도 이름을 불렀으면서 갑자기 왜 그렇게 불러?”
디에스는 말없이 제 상처를 다시 치료하는 고요한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