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정신력이 많이 올랐네? 하긴, 달맞이꽃 채집하는 게 꽤 힘들었었지.’
절벽에 달라붙어, 꽃이 상할까 온 정신을 집중하여 채집했었다.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 유리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유리한 씨, 기분이 많이 좋아 보이시네요.”
“드디어 플레이어다운 스탯 능력치를 얻었거든요.”
레벨도 하루 만에 30까지 올랐다.
자신의 레벨과 맞지 않은 고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얻은 결과였다.
‘이대로라면 50까지 금방이겠어.’
혼란과 격변의 시대, 처절하게 굴러가며 스탯 능력치를 얻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세상 많이 좋아졌네.’
유리한이 라떼 IS 홀드를 시전하려던 순간이었다.
“요한, 왜 그래요?”
그녀는 함께 걷고 있는 고요한의 낯빛이 지나치게 어두운 것을 보고 말았다.
유리한의 말에 고요한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유리한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는 고요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닿는 시선에 고요한이 절절매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유리한 님께서 인기가 너무 많으신 것 같아서요…….”
“네에?”
제가요? 유리한이 크게 당황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안내소에서 모두 유리한 님을 보고 계셔서요.”
“아아.”
그랬지, 참.
“요한의 말대로 제가 인기가 좀 많기는 해요. 그런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봤잖아요? 아무도 저한테 오지 못하는 거.”
유리한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제 이야기 하는 건 엄청 좋아한단 말이에요? 어째,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건 달라진 게 없어.”
인기인의 삶이란 참으로 고달프다니까요?
유리한이 능청스레 말을 덧붙였다. 고요한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입을 열었다.
“불쾌하지 않으세요?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이 당신 뒷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요.”
“당연히 불쾌하죠!”
유리한이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괜찮아요. 워낙 익숙하기도 하고, 그리고…….”
성큼, 고요한의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온 유리한은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를 잘 알고 계시는 고요한 씨가 있으니까요!”
고요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선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저는 아직 유리한 씨를 잘 모르는데요.”
“네? 요한,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고요한이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문지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유리한에게 물었다.
“저녁은 맛있는 것으로 채우고 싶다고 하셨죠?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으음, 분식 있어요?”
“네? 그게 뭐죠?”
없나 보다.
유리한은 방긋 웃으며 34층에 있을 법한 음식을 이야기했다.
“파스타요!”
다행히도 34층에 있는 음식이었다. 고요한은 아는 맛집이 있다면서 유리한을 제가 알고 있는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오, 손님 많네요?”
“그새 플레이어분들께 소문이 난 모양이에요. 34층의 주민들밖에 이용하지 않았던 곳인데 말이죠.”
창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식기가 세팅됐다.
“저는 잘 모르니까, 요한이 주문해 줘요.”
“네, 유리한 씨.”
고요한이 종업원을 불러 메뉴를 여러 개 주문하기 시작했다. 유리한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려있지 않았다면, 뭘 그렇게 많이 시키냐면서 놀랐을 거다.
하지만 유리한은 지금 제 앞좌석을 주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 지금.”
“아씨, 찍다가 걸리면 죽는 거 아니야?”
“설마 죽이겠어? 빨리 찍어!”
두런두런 오가고 있는 이야기에 유리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자꾸 쳐다봐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호기심 많은 플레이어 후배분들이셨나 보다.
유리한이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한 플레이어가 소심하게 사진기를 들었을 때, 유리한은 친절하게 손가락을 들어 ‘V’를 그려주었다.
“허억!”
찍은 사진을 확인하던 플레이어가 숨을 들이마셨다. 유리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있잖아요, 저랑 사진을 찍고 싶으시면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 저희는 그냥…….”
식당에서 유리한을 봤다고 자랑하려고 했다. 올린 사진에서 정보를 좀 사고 싶다고 연락이 오면 더욱 좋고.
그런 마음에 몰래 사진을 찍으려고 한 거였는데.
“이렇게 몰래 촬영하면 어떻게 해요? 응? 기분 좋게 저녁 먹으러 왔다가 기분 살짝 망쳤잖아.”
유리한이 여자의 손에서 사진기를 뺏어 들고는 셀카 모드로 조작했다.
“자, 다들 웃어요. 웃어.”
“아… 하하, 하하하…….”
여자와 그녀의 동료 모두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찰칵, 유리한은 그 모두를 배경 삼아 사진 하나를 찍어주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유리한 씨?”
“팬 서비스 좀 하고 왔어요.”
유리한이 눈웃음을 지었다가 테이블 위에 세팅된 요리들을 보고는 놀라 소리 질렀다.
“세상에, 요한! 뭘 이렇게 많이 시키신 거예요?!”
“오늘 하루 종일 움직이셨잖아요. 든든하게 배를 채우셔야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 안 드시면 피로 회복제 하나 더 만들어서 드릴 거예요. 유리한 씨께서 주신 클로버가 아직 많이 남아있거든요.”
“…….”
내가 교육을 잘못 시킨 것 같다.
유리한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고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 * *
고요한이 안내해 준 34층의 맛집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 많던 음식을 깨끗하게 비우지 못했으리라.
“아, 배부르다.”
고요한의 집으로 돌아온 유리한은 그의 침대에 몸을 눕혔다. 고요한은 지금 거실에서 잠자리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거실에서 잔다니까, 참.”
어떻게 손님을 바닥에 재우겠냐면서, 고요한은 한사코 거절했더란다.
“이제 손님이 아니라 동료인데.”
유리한은 구시렁거리고는 방문 쪽을 흘긋거렸다. 지금에라도 나가서 자신과 바꾸자고 할까?
하지만 고요한은 분명 불편해할 게 뻔했다.
“에이, 모르겠다.”
결국 유리한은 이불을 꼭 덮고 잠을 청하기는 개뿔.
“킹 블러드 고블린한테서 얻은 아이템을 좀 살펴볼까?”
유리한은 인벤토리에 넣어뒀던 반지를 살펴보았다.
[성장의 문을 여는 열쇠(하급)]
등급: 레전더리
- 플레이어 전용 아이템(1人 사용 가능)
- 34층의 킹 블러드 고블린이 우연히 획득한 ‘성장의 문’으로 향하는 열쇠.
“성장의 문……?”
유리한이 미간을 좁혔다. 그보다 플레이어 전용 아이템이라니.
“킹 고블린께서 단순히 간지템으로 착용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사용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 간지용으로 착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리한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보자,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유리한이 꼼꼼하게 반지를 살피다가 손에 끼우는 순간. 달칵, 톱니바퀴가 짜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한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뭐야, 여기는.”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길이 나있었다.
길의 끝에는 하나같이 커다란 문이 놓여있었다. 층을 오를 때마다 보았던, 하얀 문이.
[1Lv~10Lv]
[11Lv~20Lv]
……
[81Lv~90Lv]
[91Lv~100Lv]
아홉 개의 문 앞에는 레벨이 표시되어 있었다. 유리한은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등장하는 몬스터의 레벨대를 표시해 놓은 건가?’
유리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성장의 문이라니.”
그것도 하급 열쇠라고 했다. 이 말은 즉, 중급과 상급 역시 존재한다는 말씀. 혼란과 격변의 시대가 끝난 후, 레벨의 제한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건 아무도 그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급과 상급도 이와 같다면, 레벨은 ‘300’이 최대겠지.”
그리고 이건 짐작건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정보.
유리한이 짙게 웃음을 지었다.
“흐음,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지금 당장 아홉 개의 길 중 하나를 걸어, 끝에 있는 저 문을 열어버릴까?
하지만 유리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고민할 것도 있고. 더욱이 온종일 수행했던 퀘스트로 몸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
괜히 몸을 움직여서 피로도를 높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 유리한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사망하지 않는 이상, 포기가 가능합니다.]
[포기한 이상, 얼마든지 재도전이 가능합니다.]
“다행이네.”
유리한은 우선 돌아가기를 선택했다. 오늘은 휴식.
성장의 문에 도전하는 것은 내일부터다.
“요한과 함께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반지는 착용자, 단 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유리한은 아쉬움을 뒤로하며 손가락에 끼웠던 반지를 빼냈다.
* * *
맞이한 아침.
유리한은 차려진 밥상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지런히 움직여 아침을 차려놓은 고요한이 유리한의 놀란 얼굴을 보고서 눈웃음을 지었다.
“아침을 미리 차려놓지 않으면, 유리한 씨가 벽곡단을 먹자고 할 것 같았거든요.”
어떻게 알았지?
유리한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들켰네요, 요한. 그보다 안 피곤해요? 아침부터 이렇게 진수성찬이라니.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났던 거예요?”
“글쎄요, 일어났을 때 시간을 안 봐서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침 해가 뜨기 전이었으니까 새벽이 아닐까요?”
세상에!
하루 종일 퀘스트를 돌고 온 몸이다. 그런 몸을 이끌고 새벽 댓바람부터 아침을 준비했다니!
유리한이 고요한을 걱정했다.
“요한,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한 거 아니랍니다, 유리한 씨.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에요.”
그렇다면야 뭐라 할 말이 없다.
유리한은 더 이상 고요한을 걱정하는 대신,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잘 먹을게요, 요한.”
“유리한 씨의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요.”
“요한이 만든 거니까 뭐든 맛있겠죠! 아, 피로 회복제 빼고요.”
유리한이 고요한에게 농담을 던지고는 밥 한 숟갈을 떴다.
한눈에 봐도 군침이 절로 도는 아침.
하지만 유리한은 밥 한 숟갈을 목구멍 속으로 넘기자마자 바닷물의 짠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 유리한은 입 안에 감도는 짭조름한 맛에 쩝쩝거리고는 나물을 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깼나? 밥에서 바다의 맛이 느껴질 리가 없는데.’
유리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물을 입에 넣었다.
“오…….”
분명, 자신은 콩나물을 닮은 것을 입 안에 넣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건 해조류 본연의 맛.
미역을 딴 즉시 그대로 입에 삼킨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