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상대가 제 치부를 드러냈으니, 이쪽도 하나 밝혀야지.
어둠을 밝히던 빛이 시간이 지나자 수그러들었다. 이내 완전히 찾아온 어둠에 잎사귀가 어지럽게 흐드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한의 두 눈은 금방 어둠에 적응했다.
그녀는 클로버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요한이 탑의 바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원래 그렇게 매력적인 세상이 아니었거든요.”
좀비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부모님은 그것들에게 물린 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되어 저와 제 동생을 죽이려고 들었다. 때문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
혼란과 격변의 시대.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은 흔하게 일어났었다.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후에 다들 ‘죽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하고 후회했을 뿐.
“뭐…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요한은 얼굴 밖으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유리한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유리한은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깨 펴라고요.”
패륜아인 나도 영웅이라고 불리며 잘만 살고 있으니까.
조카의 목숨으로 되살아난 이런 나도 웃는 중이니까.
유리한은 많은 말을 삼켰다.
본 지 이제 하루, 아니 이틀이 넘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리한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남들로부터 손가락질받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함부로 대해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요한은 애달프게 웃었다. 유리한은 그 웃음이 그의 진심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유리한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요한 리스체가스의 호감도를 100% 달성했습니다!]
유리한이 입술을 오므렸다.
[특별 시험의 응시 조건을 달성함에 따라 시험이 공개됩니다.]
[9층의 지배자, 리스체가스 가문을 몰락시켜 요한 리스체가스를 9층에서 해방시키세요!]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네.
유리한은 요한을 바라보며 뜻 모를 눈웃음을 지었다.
* * *
쨍그랑―!
앤티크한 느낌의 도자기들이 속절없이 깨지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은하의 언덕으로 향했다니! 그곳이 어디라고 감히……!”
“어머니, 진정하십시오.”
“너라면 진정하겠느냐! 그 빌어먹을 것의 아비가 어디서 튀어나와 나타샤를 앗아갔는지 알지 않느냐!”
트리샤 리스체가스가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며 소리 질렀다. 나타샤, 내 가여운 딸. 저를 잡아먹고 태어난 버러지도 아들이라고 아꼈던 내 불쌍한 딸.
그렇기에 차마 죽이지 못했다. 죽이는 대신, 태양교에 집어넣어 영영 안 보기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역시, 어릴 때 죽였어야 했다! 그 버러지 같은 녀석을 진작 죽였어야 했어!”
“어머니, 좋게 생각합시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자식, 리스체가스 가문의 후계자인 아레스가 제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를 달랬다.
“오늘 하루, 분수도 모르고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하나 그 녀석은 리스체가스의 훌륭한 쓰레기통이지 않습니까?”
트리샤가 이를 악물었다.
“쓸모가 다하면 버릴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어머니. 쓰레기통이라고 해도 쓰레기를 꾸역꾸역 담다 보면 곰팡이가 들어 사용하지 못하게 되니까요.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읍시다.”
아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트리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요한과 닮은, 아니, 그가 닮은 트리샤의 은빛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리는 순간이었다.
* * *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유리한은 요한과 함께 제가 묵고 있는 여관에 도착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 하루 종일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낸 남자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오늘 어땠어요, 요한?”
“즐거웠습니다.”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
유리한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오늘도 이렇게 놀면 되겠네요! 즐거웠다고 하셨으니까!”
“네? 아니, 그게…….”
“솔직하게 말하세요, 요한. 조금 전에는 제 질문을 미리 준비라도 한 것 같았다고요.”
요한 리스체가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그는 유리한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즐겁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스텔라 거리가 아닌, 다른 곳에 갔으면 합니다. 사실, 그곳에는 제 취향인 옷이 없어서 사지 않았거든요.”
유리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제 속마음을 드러내 줬으면 했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말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요한은 뒤늦게 제가 내뱉은 말이 걱정되는지,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다음이란 것이 있으면요.”
“있어요.”
이번에는 요한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리한은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저 당분간 9층에 머물 거라고.”
요한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유리한 씨.”
“다음이 뭐예요? 당장 내일이 있는데!”
“내일은 좀…….”
곤란하다는 듯이 난처하게 웃는 모습에 유리한은 결국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요. 내일은 봐주죠. 하지만 조각상 앞에서 하루 종일 서있지는 마요. 제때 밥 먹고 그러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유리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겠다고 했어요, 요한? 저 내일 조각상 앞의 벤치에서 지켜볼 거예요.”
“유리한 씨는 할 일이 없으신가 보네요.”
“뭐라고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유리한은 조용히 요한을 노려보다가 피식거렸다. 요한 역시 작게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어서 들어가세요, 유리한 씨.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오늘까지 제대로 잠을 청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많이 피곤하겠군요.”
요한의 말대로 유리한은 이틀에 걸친 시간 동안 단 한 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 유리한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활기차게 말했다.
“요한이 준 피로 회복제가 정말 좋더라고요! 잠을 자지 않아도 씽씽하네요!”
그리고 틈틈이 그가 자신에게 힐을 걸어준 것을, 유리한은 모르지 않았다. 유리한의 말에 요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초록빛 액체가 담긴 병을 유리한에게 내밀었다.
“여기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사양할게요.”
유리한은 단호하게 거부, 아니, 거절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끔찍한 맛을 한 번 더 겪기 싫었다.
유리한은 거절의 의미로 올렸던 손을 그대로 흔들었다.
“이만 들어가세요, 요한!”
요한이 고개를 꾸벅거리고는 몸을 돌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뜬 보랏빛의 달 아래서 요한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졌다. 유리한은 흔들던 손을 내려놓고는 오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앞에 특별 시험을 담은 시스템 창이 다시금 나타났다.
[9층의 지배자, 리스체가스 가문을 몰락시켜 요한 리스체가스를 9층에서 해방시키세요!]
시스템이 괜히 이런 시험을 내준 것은 아닐 거다.
“흐음.”
요한 리스체가스는 왜 9층에 묶여있는 것이며, 리스체가스 가문은 뭐 하는 곳이기에 이러는 걸까?
“한번 알아볼까?”
알아보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적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 적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철칙에 따라 유리한은 리스체가스 가문의 대저택을 몰래 방문하기로 했다.
넓은 저택은 자고로 비밀 통로 하나쯤은 있기 마련.
그리고 그 비밀 통로는.
“헤이, 거기.”
온종일 자신들을 따라다녔던 리스체가스의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쥐새끼처럼 졸래졸래 쫓아다니는 것이 어찌나 귀엽던지.
가문으로 돌아가려던 리스체가스의 기사가 흠칫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야, 여기.”
여관에 들어가는 대신, 불 꺼진 집의 담장에 걸터앉아 있던 유리한이 예쁘장하게 웃었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이 언니가 너한테서 알아낼 게 좀 있거든요.
* * *
리스체가스의 밤은 보랏빛 달만이 밝힌다. 요한이 거처로 삼고 있는 곳은 그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낡은 저택이었다.
오직, 간단하게 잠을 청하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곳.
요한은 오랜만에 이른 시간에 귀가했다. 물론, 그에게나 이른 시간이었지. 자정이 훌쩍 지난 지 오래였다.
요한은 입고 있던 사제복을 벗은 후 제 몸을 확인했다. 왼쪽 옆구리에서 오른쪽 어깨까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검은 문양이 나뭇가지처럼 뻗어져 있었다.
“그새 번졌네.”
단, 하루.
플레이어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고 제 몸에 새겨진 저주가 움직였다.
요한은 문가에 기댄 후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지 않느냐? 버러지 같은 네놈도 쓸모가 있으니.’
그 쓸모가 바로 리스체가스에 올라온 플레이어들을 위해 치유 능력을 사용하는 것.
그러지 않으면 저주가 몸을 갉아먹었다.
몸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문양이 목까지 뻗는 순간, 심장이 멈추게 될 거라고 했던가.
요한은 피식 웃고는 빛바랜 셔츠로 상체를 가렸다.
오늘의 일에 후회는 없었다.
24년의 삶 동안, 오늘만큼 하루를 즐겼던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러나 행복했던 하루를 돌아볼 시간은 없었다. 아침 일찍 움직이기 위해서는 지금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하지만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그의 정신을 깨웠다.
방문이 아닌, 벽 쪽의 창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잘못 들은 건가 했지만 아니었다.
“유리한 씨……?”
요한이 놀란 눈으로 창문을 열었다. 창틀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있던 유리한이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요한! 안 자고 있었네요? 다행이다!”
요한은 당황했다.
제가 사는 곳은 어떻게 아셨나요?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 오셨어요?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막상 그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다른 질문이었다.
“그… 옆구리에 끼고 있는 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사람이에요.”
“아, 사람…….”
요한이 멍하니 읊조리다가 놀라 물었다.
“사람이요?”
“네! 리스체가스의 기사님 같은데, 요한한테 잠깐 맡길까 싶어서 찾아왔어요.”
“그걸, 아니, 그분을 왜 저한테 맡기신다는 건지…….”
“사실, 제가 묵고 있는 여관방에 가두려고 했는데 말이에요. 창문이 잠겨있지 뭐예요?”
유리한의 목소리는 밝았다.
“부수면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요한을 찾아왔어요. 리스체가스에 아는 사람은 요한뿐이라서요!”
“아하.”
“그러니까 부탁 좀 할게요, 요한!”
유리한은 막무가내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여자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여자를 받아 든 요한이 당혹감에 잠긴 눈으로 유리한을 쳐다봤다.
유리한이 그 시선에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금방 돌아올게요, 요한. 혹시 저 기사님이 요한께 못 할 말을 한다거나 하면 한 대 때려버리세요.”
사제한테 잘도 말한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