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여자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꼴을 보니, 플레이어는 아닌 것 같고…….”
여자는 지학진에게 다가와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인?”
지학진은 답해주는 대신 도리어 여자에게 질문했다.
“어디서 보낸 사람입니까?”
“응?”
“오광(五光) 중 한 곳에서 보낸 사람 아닙니까?”
“오광? 화투도 아니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래?”
여자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보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내 얼굴을 아무도 모르다니.”
그 말에 지학진은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다, 당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죽은 지 오래인 세계의 영웅이 사지 멀쩡한 채로 나타나다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나를 노린 누군가 환상을 펼치고 있는 거다!!’
하지만 지학진은 곧 깨달았다.
“당신이라니, 내 이름 제대로 불러야지? 가르쳐 줘? 나 좀 유명한 사람인데.”
너스레를 떨고 있는 여자는 현실이었다.
지학진이 경악 어린 얼굴로 유리한을 쳐다봤다. 그녀는 그 시선에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내 이름은 유리한이야.”
지학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뭘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학진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던 단검을 빼 들고는 그대로 목을 그어버렸다. 단번에 목숨을 끊기 위한 행위였으나, 단검은 동맥을 비켜가고 말았다.
“쿨럭… 끄, 윽…….”
지학진이 제 목을 움켜잡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을 타고 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유리하는 그 모습을 감흥 없이 쳐다봤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소장님? 나한테 들키면 안 되는 거라도 있나 봐?”
정답이었다.
유리한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죽은 자의 기억을 헤집는 능력 따위 없었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지학진 씨? 그런데 어쩌지?”
유리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이 ‘나’라는 존재를 피하기 위해 죽었기 때문에, 나는 속 편하게 당신의 기억을 엿볼 수 있게 됐네?”
뭣……?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지학진의 숨은 머지않아 끊어졌다. 유리한은 즉시 망자의 아우성을 사용했다. 지학진의 기억이 유리한의 머릿속으로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는 날 때부터 천재…….
“패스.”
였으나 최연소로 연구소장에 오르자 탐욕에 물들기 시작했다.
유리한은 지학진이 어떻게 탐욕에 젖어가는지를 모두 보았다.
그것이 절정을 찍은 것은 오광과 손을 잡았을 때.
오광.
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 중인 다섯 개의 길드를 일컫는 말이었다.
지학진의 탐욕이 절정을 찍은 때는, 그 다섯 개의 길드로부터 공통적인 의뢰가 들어왔을 때였다.
다섯 길드가 지학진에게 맡긴 의뢰는 바로.
[현재 등급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한 망자의 기억입니다.]
이후로도 중요한 장면이 펼쳐지려고 할 때마다 같은 메시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망할.”
유리한이 스킬을 종료했다. 그래도 수확이 있었다.
‘오광이라.’
그들이 지학진에게 맡긴 의뢰로 동생은 그렇게 망가졌을 거다. 유리한이 신경질적으로 웃음을 터트리고는 소장실을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연구소장을 겁박하여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죽었으니 혼자서 움직여야지.
유리한은 유유히 센터를 벗어나 떠들썩하게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유리한의 눈에 경건하게 식이 치러지고 있는 무대가 잡혔다.
세계에는 평화를, 플레이어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선사한 지 올해로 30주년. 단상에 선 남자는 오늘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조국의 영웅, 유리한.”
오우, 미쳤나 봐.
유리한이 온몸을 부르르 떨고는 인벤토리를 뒤졌다. 파손되지 않은 아이템은 이것이 마지막. 유리한은 손에 잡힌 물약을 쥐고서 남자에게로 향했다.
경건하게 행사가 치러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무대 아래를 경호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수상함을 감지하고서 유리한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어…? 어엇……?”
그들의 감각이 빠르게 상실됐다.
유리한은 플레이어들이 엉뚱한 곳을 향해 손을 뻗어대고 있을 때, 편하게 남자의 앞에 도달했다.
“아… 안 보여! 누구, 내 목소리 들리는 사람 있어?! 내가, 내가 지금 말을……!”
“도대체 뭐에 당한 거야!!”
무대 아래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그 덕분에 유지한의 얼굴을 하고서 연설문을 읊고 있던 남자는 말을 멈춘 상태였다. 유리한은 그런 남자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곧장 내던졌다.
“꺄악! 유지한 님!”
“저 미친년 뭐야?! 경호원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안 잡고!”
곳곳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유리한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지한 님! 괜찮으세요? 이거로 일단 닦……. 지, 지한 님……?”
남자가 뒤집어쓴 제 동생의 얼굴이 벗겨지기를 말이다. 무대 아래에서 유리한이 짝짝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와아, 다행이다. 성형한 거였으면 물약의 효과를 볼 수 없었을 텐데 말이야.”
웃음기가 다분히 섞여있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제 얼굴이 벗겨진 것도 모르고 소리 질렀다.
“다, 당신 미쳤어?! 내가 누군 줄 알고!”
“가짜지, 가짜.”
유리한이 남자의 말을 가볍게 끊고는 이를 갈았다.
“감히, 내 동생을 흉내 낸 가짜.”
유지한은 오 년 전에 죽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오 년 전에 죽은 제 동생의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아마 동생에게 실험이 자행됐을 때부터 그를 대신하는 대역이 세워졌을 거다.
남자는 당장에라도 저를 죽일 듯이 구는 유리한의 살벌한 기세에 입을 다물었다. 유리한은 그대로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상석에 앉아있는 각계 인사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을 기념하는 경건한 행사에 웬 미친년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미친년이 영웅이다.
세계를 위해 희생을 선택했던 플레이어, 유리한.
그녀가 상석에 앉아있는 이들 중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내가 말했잖아. 내 동생 잘 부탁한다고.”
목소리가 향한 곳은 플레이어 협회장이 앉아있는 자리였다.
플레이어 협회.
플레이어를 위한 기구. 그곳의 협회장인 그녀 또한 유서아의 기억 속에서 본 자였다. 그리고 유리한이 알고 있는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유리한은 협회장의 코앞까지 다가서고는 목소리를 뱉었다.
“내 동생뿐만이 아니야. 내 동생이 결혼을 하면 그 부인도.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그 아이의 아이도!”
끝으로 갈수록 분노가 실렸다.
유라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원망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감히 내 가족을 건드려?”
협회장이, 한때 유리한의 동료였던 주아라가 황급히 두 손을 있는 힘껏 내저었다.
“그… 그게, 오해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엿이나 처드셔.”
유리한은 오랜 전우였던 협회장, 주아라의 면상에 주먹을 냅다 꽂아버렸다.
“꺄악! 협회장님!!”
“이…! 이런 미친……!”
주아라 주변에 있던 각계 인사가 비명을 질렀다.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중계 카메라는 무대가 아닌 유리한을 잡고 있었다.
유리한이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저 가짜 새끼가 나한테 물었었지. 내가 누구냐고.”
유리한이 제 동생의 대역을 서고 있던 남자를 삿대질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내 이름은 유리한.”
그녀는 제 왼쪽 어깨 아래쪽에 한 손을 얹고는 모두에게 선포했다.
“유리한이다.”
영웅이 돌아왔음을.
【 3. 준비 운동은 가볍게 】
[세계의 영웅, 유리한! 30년 만의 귀환! …그녀는 정말 ‘유리한’이 맞는가?]
[플레이어 협회, “진짜 유지한은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에 묵묵부답]
……
[플레이어 협회 산하의 A 연구 센터 간밤의 불로 전소]
온 세상이 난리였다.
유리한은 허공에 띄웠던 기사를 끄고는 자리에 풀썩 누웠다. 그러기 무섭게 행복 머니의 직원들이 시끄럽게 굴기 시작했다.
“에이, 퉷! 이 새끼들이 지금까지 국민들을 우롱해 놓고 못 하는 말이 없어!”
“맞습니다, 형님!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들이 읽고 있는 기사는 플레이어 협회가 내놓은 입장문이었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유리한 님, 서로 오해가 깊은 것 같으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유리한으로서는 절로 코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백상철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리며 말했다.
“그 전에 유리한 님의 동생분을 어떻게 한 건지 제대로 밝히기나 하지!”
“뭔가 구린 게 있으니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형님!”
백상철의 말에 우철만이 맞장구를 쳤다.
우철만은 유리한에 의해 옥상 아래로 떨어졌던 남자였다. 그는 병원에서 값비싼 치료를 받은 뒤 곧장 복수를 위해 행복 머니로 돌아왔는데, 그 순간 TV로 본 것이 유리한이 제 존재를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유리한의 오랜 팬이었던 우철만은 돌아온 유리한에게 스스로 ‘을’을 자처하며 그녀와 계약을 맺었었다. 단 하루 만에 태도가 바뀐 우철만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유리한에게 말했다.
“유리한 님, 협회의 인간들을 이대로 놔둘 겁니까? 그 자식들은 지금 유리한 님의 뒤를 캐고 있을 겁니다!”
“걱정 마, 못 캘 테니까.”
유리한의 손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책이라고 하기에는 잡지. 딱 그 정도의 두께였다. 유리한이 이를 도웅에게 넘겼다.
“도웅 씨, 여기.”
얼떨결에 유리한이 준 것을 받아 든 도웅의 두 눈이 떨렸다.
“이, 이건……!”
파라오의 눈과 닮아있는 금색의 눈이 왼쪽 모퉁이에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린 아서가 자신이 제작한 아이템에 새겨 넣었던 일종의 표식으로, 도웅이 지금까지 유리한이 꺼내 든 멀린의 아이템을 알아본 이유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한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멀린이 내게 줬던 스킬 북이야. 모두 마법에 관련된 것들인데, 다 써버렸거든.”
멀린 아서.
그가 유리한에게 줬던 스킬 북은, 일정 마력이 주입되는 즉시 마법이 발동되는 아이템이었다. 마법에는 재능이 없으나, 마력만큼은 무한이었던 유리한만을 위해 그가 손수 제작한 아이템이었다.
“그냥 버릴까 했는데, 도웅 씨가 멀린의 팬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이, 이제 아닌데…….”
“그래? 그럼 줘. 그냥 버리게.”
아예 불로 태워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