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 평화 】
20■1년 1월 1일.
오랫동안 전 세계인의 마음을 병들게 했던 전염병과의 전쟁이 인류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게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축배를 들 때.
[Hello, Earth?]
그것은 느닷없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눈앞에 떠오른 푸른 윈도우 창.
고개를 아무리 저어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며, 두 손을 암만 휘저어 봐도 가려지지 않았다. 하물며 답을 보낼 수도 없었다.
일방적인 의사소통에 모두가 당황을 표할 때.
“어… 어엇? 저거 뭐야!”
“괴, 괴물… 괴물이다!!”
곳곳에서 생긴 싱크홀과 함께 온갖 괴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훗날 ‘몬스터’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들의 등장이었다.
“으아악! 피해!!”
“사, 살려줘! 아, 아악! 아아악!!”
역병을 이겨내기 무섭게 찾아온 것은…….
혼란과 격변의 시대였다.
* * *
20▲0년 10월 3일.
혼란과 격변의 시대가 개막되고 9년이 지났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새로운 용어가 많이도 정립됐다. 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싱크홀의 이름은 게이트.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은 몬스터.
[태평양 에리어의 보스 몬스터, 니르로르의 속박이 00: 59: 37 후에 풀리게 됩니다.]
잊을 만하면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는 시스템.
그리고.
“그래, 저 망할 드래곤만 처리하면 다 끝난다는 거지?”
플레이어(Player).
손에서 불을 내뿜거나, 허공에서 전기를 내리치는 등.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넘어선 힘을 가진 그들은 ‘플레이어’라고 불리며 몬스터들과 싸웠다.
그리고 여기,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라고 불리는 여자.
유리한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바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길었다, 정말.”
태평양 이전에 대서양과 인도양. 그 전에는 북극해와 남극해까지.
“남극이 제일 짱이었지. 거기 보스 몬스터 죽인다고 개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그래도 남극의 펭귄들을 지켰잖아, 유리한. 자랑스러워하라고.
유리한은 뿌듯하게 웃었다.
바다에 나타난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기 전에는 대륙이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남극까지.
유리한이 손가락 일곱 개를 접었다가 하나를 펼쳤다.
“아, 여기서 남극은 빼야지. 남극해랑 같이 묶여있던 곳이니까.”
그렇게 대륙에 나타났던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고, 바다에 등장한 보스 몬스터도 처치하고. 그리고 마지막.
“니르로르.”
태평양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에 밤을 몰고 온 암흑의 드래곤.
저 드래곤만 죽이면 끝난다.
유리한은 동료들과 함께 태평양 이전, 대서양 에리어의 보스 몬스터를 죽였을 때를 떠올랐다.
[대서양 에리어의 보스 몬스터, 파프니르가 처치되었습니다.]
안도감도 잠시.
[태평양 에리어에 보스 몬스터, 니르로르가 등장했습니다.]
[니르로르를 처치하면 ‘지구’는 안전해집니다.]
두 눈을 의심케 만드는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유리! 이거……!”
“나도 보여!”
지구가 안전해진다.
이 말은, 몬스터의 위협에서 안전해질 거라는 말.
유리한은 환호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플레이어,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 그들 모두가 한데 모여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몰랐다.
- 어리석은 인간들아, 낮을 잃은 너희에게 희망은 없느니라.
밤을 몰고 온 암흑의 드래곤.
니르로르는 어둠이 존재하는 한, 불사(不死)의 드래곤인 것을.
니르로르의 등장과 함께 지구는 낮을 잃었다.
해는 뜨지 않게 되었고, 그와 관련된 속성을 가진 플레이어들은 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드래곤을 어떻게 잡으란 것인지, 저 망할 드래곤의 배 속에 잡아먹힌 플레이어만 해도 수천 명이었다.
그러나 무너진 천장에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니르로르를 공략할 방법이 나타났다.
그 방법은 바로…….
“리한 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상념이 깨졌다.
유리한이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말했다.
“저도 알고 있으니까 재촉하지 말아주실래요?”
한국인이 암만 빨리빨리를 좋아한다고 해도, 죽으러 가는 길을 재촉당하는 건 싫었다.
‘그래도 가야지.’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이제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바다로 떠나야 했다.
그렇게 유리한이 안개가 자욱하게 낀 밤바다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을 때다.
“유리! 멈춰!!”
그녀의 걸음을 멈춰 세우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한이 한숨을 작게 내쉬고선 고개를 돌렸다. 양팔에 마력 제어구가 채워진 남자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방법이 있을 거다, 유리! 네가 희생하지 않아도 될 방법이……!”
“없는 거 알잖아.”
유리한은 남자의 말을 매몰차게 끊고는 혀를 찼다.
‘제대로 가둬놨다더니.’
남자의 이름은 디에스 라고.
미국에서 영웅이라 추앙받는 플레이어로 유리한에게는 몇 번이나 함께 사선을 넘나든 동료였다.
“디에스, 나는 괜찮아.”
“거짓말.”
들켰네.
유리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디에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제발 가지 마, 유리.”
애절하게 그녀를 붙잡고자 했다. 그러나 유리한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가기로 마음먹은 일이다.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지구에 낮을 선물해 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기도 했고.
하나 미련이 있다면.
‘한이.’
하나뿐인 가족, 유지한.
이제 열두 살인 남동생을 이 세상에 혼자 남겨두게 된다는 것.
“디에스.”
그는 어느새 플레이어들에게 붙잡혀 무릎이 꿇린 상태였다.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다. 유리한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내 부탁 기억하지?”
디에스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억 못 해. 몇 번이나 말해도 기억 못 할 거다. 하지 않을 거야, 유리.”
그러니까 가지 마.
덧붙여 들린 목소리에 유리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디에스는 제 양팔을 붙잡은 플레이어들을 뿌리친 후, 유리한에게 손을 뻗었다.
“제발, 유…….”
그러나 디에스의 손은 유리한에게 닿지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그녀가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큭… 으…….”
“미안, 디에스.”
유리한이 기울어지는 디에스의 몸을 부축하고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내 부탁, 꼭 들어줘야 해.”
유리한은 디에스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히고는 걸음을 옮겼다.
자욱하게 안개가 낀 밤바다.
니르로르가 속박되어 있는 곳을 향해.
* * *
찰박―
고요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쇠사슬에 묶여있던 드래곤, 니르로르가 고개를 들었다.
- 하하, 짐이 배가 고플 것 같아 먹이라도 바친 건가.
“엿이나 드세요.”
니르로르 앞에 멈춰 선 유리한이 그에게 신랄한 욕설을 내뱉어 준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린이 직접 나서서 속박 마법을 펼쳤다고 하더니, 과연.”
대마법사 멀린.
그 이름대로 완벽하게 펼쳐진 마법이었으나.
- 멀린이라면, 주제도 모르고 나를 이리 만든 마법사를 말하는 거겠지. 지금은 짐의 배 속에 있는.
“그래, 네 배 속에 있는 친구를 말하는 거 맞아.”
유리한이 날카롭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멀린도 알고 있었을 거야. 너를 그렇게 만들면 자신도 죽을 거라는 걸.”
그럼에도 멀린은 마법을 행했다. 니르로르를 쓰러뜨릴 유일한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 그리고 유리한은 제 친구가 지핀 불씨를 거대한 불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유리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니르로르가 눈가를 찡그렸다.
- 그래서 인간. 너는 무슨 생각으로 짐을 찾아온 거지? 먹이로 찾아온 게 아니라면.
“구경이지, 구경.”
그게 아니라면 왜 찾아왔겠어?
유리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분히 저를 놀리는 태도에 니르로르가 이를 드러냈다.
- 속박이 풀리면 그 즉시 죽여버리겠다. 이 어리석은 인간이여.
“어휴, 뭘 힘들게 죽여준대. 그리고 누가 누구보고 어리석대?”
유리한이 넘실거리는 파도 위를 바닥 삼아 앉고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죽기 전에는 사람이 말이 많아진다고 하거든? 그래서 말 좀 많이 할게? 그게 클리셰거든.”
- 뭣……?
니르로르가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유리한은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며 재잘거렸다.
“네가 꿀꺽 먹어버린 내 친구는 대마법사라고 불리던 마법사셨지. 이름은 멀린.”
풀 네임은 멀린 아서.
대마법사라고 불리던 플레이어였으나, 검술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던 자였다.
‘자기는 대마법사가 아니라 마검사로 불려야 한다고 투덜대곤 했었지.’
유리한이 과거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니르로르를 빤히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말이야. 그 대마법사보다 마력이 더 높은 플레이어가 존재한다면 믿을래?”
- 헛소리.
모든 플레이어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마력을 토대로 제게 주어진 스킬(Skill)을 사용할 수 있었다.
스킬.
평범한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규격 외의 힘을 이르는 말.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마법사’는 조금 더 상식을 벗어난 힘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들이었다.
마나 하트라고 하여, 심장 옆에 마력을 보조해 주는 기능을 하나 더 달고 있었으니까. 플레이어의 정보에 박식한 니르로르가 눈가를 찡그렸다.
-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닐 터. 너 따위가 그 녀석보다 더 높은 마력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지.
“그래, 믿지 않을 줄 알았어. 그런데 그럴 수 있거든.”
바로, 이 내가.
유리한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시야에 9년간 수차례 변화를 겪었던 상태 창이 나타났다. 그중 그녀의 시선을 끄는 건, 유일하게 변하지 않았던 스탯.
[마력: ∞]
대마법사 멀린보다 높았던 마력.
그냥 높은 것도 아니라, 무한.
유리한이 씨익 웃으며 한 팔을 쭉 내뻗었다.
“어둠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게 될 거다, 용용아.”
활짝 펼친 손바닥에 칠흑과는 대조적인 하얀 빛이 점점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밝은 빛의 구체에 니르로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수 없을 텐데……!
“멍청아. 이건 마법이야. 하나의 속성으로 치부할 수 없는 복잡한 연산의 집합체라고.”
물론, 유리한은 복잡한 연산 따윈 치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럴 머리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유리한이 하고 있는 건, 단순한 ‘흉내’였다.
하얀 구체가 어느새 유리한의 상반신을 집어삼킬 만큼의 크기가 되었다.
-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냐, 인간!
“에이, 알면서 뭘 물어?”
유리한이 웃으면서 니르로르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내가 말했잖아, 용용아. 어둠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게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