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266화 (266/285)

266화

우주와 차영웅이 앞장서서 마을로 들어갔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때까지 표정없이 길을 오가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크게 놀라며 황급히 골목으로 가서 숨거나 아니면 거리를 둔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우린 당신들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 없소. 얌전히 보내준다면 아무일 없을테니 걱정마시오.)”

우주가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일본어로 말했다.

하지만 알아듣지를 못하는지 이렇다할 반응이 없었다. 눈을 깜빡이며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

우주는 주변을 둘러보며 뜸을 들이다 금세 차영웅을 쳐다봤고, 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가 손짓을 하며 양팀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길을 막고 구경하던 마을 주민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열어주었다.

“혹시 모르니 사방을 주시하며 걸어오시오.”

팀원들이 주민들을 지나쳐 걷는동안 이태평이 그들을 보며 비웃었다.

마을주민들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얼굴에 구정물이 묻어있는 등 행색이 초라했다. 더구나 마을 아낙네들은 때가 묻어 까맣고 축 늘어진 젖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며 TV속 아프리카 부족민들에게서나 볼법한 원시적인 모습을 갖고 있었다.

“참 미개한놈들이네. 저 복장봐. 그지가 따로 없잖아. 하다못해 신발은 신고다녀야지 안그래? 일본에 왜 게단가 뭔가 있지 않았나?”

“게다 살돈도 없나보지 뭐.”

나란히 걷던 동료가 대꾸하자 태평은 한심하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 옛날 백제가 안도와줬으면 니들은 평생 이렇게 살았을거야.”

그렇게 수백년 묵은 나무가 우뚝 서 있는 마을 중앙 공터까지 쭈욱 걸어가면서 주민들에게서 특별한 적대심은 느끼지 못했다.

주민들은 그들을 보고 마냥 신기해 하면서 따라다니기만했다.

어떤 자들은 연합MSC 팀원들을 보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고 생각했는지 집에서 기르던 개나 닭을 잡아서 갖다 바치거나 바닥에 엎드려 절하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사내는 자신의 친딸까지 내주려고도 했다.

그때 우주가 냅다 달려가서 극구 사양했으니 망정이지 안그랬다간 필요도 없는 팀원만 한 명 더 늘어날뻔했다.

“까아악! 깍!”

까마귀 하나가 팀원들의 위를 가로지르더니 마을 한복판 오래된 고목의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우주는 흠칫해서 그 까마귀를 올려다보았으나 별반 다를게 없는 보통의 까마귀였다.

그 바로 아래 일부러 가져다 놓은 듯한 큰 돌덩이에 걸터앉아 쉬고 있던 차영웅이 자신들을 빤히 구경하고 있는 주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는것 같군. 마을을 일일이 뒤져봐야 할것 같은데. 여길 탈출하려면 말야.”

차영웅이 말하고 나서 우주는 시야를 넓게 보며 먼곳을 둘러보았다. 산으로 가로막힌 마을. 멀리서 새가 지저귀는 평화로운 소리까지 들려왔다.

홍콩에서 겪은 나락처럼 알기 쉽도록 다음 단계로 통하는 문이라도 보이면 좋았겠지만, 여기는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러한 이정표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저 한가로운 고대 일본 마을이었다.

“흩어져서 찾아볼 수 밖에 없는가...”

우주는 고민에 빠졌다. 마을 크기는 대략 읍,면,동 중에서 동보다 작아보였지만 50명씩 몰려다니며 수색하기에는 왠지 커보였다.

“흩어져야지. 인원을 나누는게 좋겠어. 그게 더 효율적이라고 보네.”

“꺼림칙 하긴 하지만 그 수가 좋을 것 같구려.”

“좋아. 그럼 이들의 생활수준으로 미루어 보아 만일의 불상사가 발생하여도 첨단 무기를 가진 우리가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두 명씩 25조 어떤가?”

우주는 홍콩에서 겪은 나락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섯 명씩 10조으로 합시다. 차 대장도 나락에 빠져봐서 알겠지만, 거대한 요물이라도 나타나면 큰일이오. 팀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두 명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외다.”

“그러지.”

차영웅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섯 명씩 10조로 나눠서 마을을 수색하기로 했다.

이후 연합MSC 팀원들은 다섯 명씩 한 조로 뭉쳐 다니며 이곳저곳 살피고 다녔고, 마을 주민들에게 가능한 피해를 주지 않을 생각에 조심스레 다니는 조가 있는가 하면, 성미가 급한 조는 집집마다 처들어가 집주인을 밀쳐내고 방안과 부엌이라든지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방해되니까 꺼져!”

한가지 신기했던 점은, 집주인을 비롯해 소란을 듣고 몰려든 이웃들까지 순수하고도 순진하게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고, 그 누구도 감히 저항할 생각을 안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냥 사람 형상을 한 병풍들 같았다. 아니면 게임 내 존재하는 NPC 라든지 말이다. 그들은 아는 것도 없어보였고, 화를 낼줄도 모르는것처럼 보였다.

“등신들 아닌가 몰라.”

한쪽에서 마을 주민들을 비웃고 히히덕 거리는 일이 벌어지는 동안, 우주는 자신의 조를 이끌고 마을 외곽 숲속을 주로 살피고 다녔다.

잘 하면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동굴 입구나 지하통로 같은 것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속에 다섯 명이 일정 간격으로 흩어져서 수풀을 헤쳐다녔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뒷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우주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나노슈트의 식별센서가 자동으로 동작하면서 수풀에 가려진 인물을 포착하더니 곧바로 신원확인 결과를 디스플레이 창에 띄웠다.

“뭐?”

우주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몇번인가 푸석푸석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그녀가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단발이었던 머리를 길게 기른 여성, 작았던 가슴을 수술을 통해 D컵으로 만든 여성, 자신의 어깨까지 오던 머리가 눈썹까지 올 정도로 수술을 통해 키가 훌쩍 커버린 여성,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고 쌍꺼풀이 더욱 짙어진 여성!

우주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하나 낭자...”

예전에는 풍부한 표정을 갖고 있었지만, 어쩐지 지금은 표정이 하나도 없는 그 얼굴은 마치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보였다.

하나는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우주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더니 나노슈트를 해제하고 두 눈으로 똑바로 마주보며 입술을 열었다.

“당신한테 궁금한게 있어요. 질문에 대답해주시겠어요?”

“......?”

뭐지 이건?

무엇인가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목소리.

처음보는 사람한테 하는 말투.

우주는 살짝 당황했지만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나노슈트의 헬멧을 해제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신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질문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오. 뭐든 좋으니 말해보시오.”

하나가 즉시 대꾸했다.

“당신은 누구죠?”

“뭐? 아, 아니. 네? 지금 뭐라고 했소?”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다구요.”

우주는 순간 기가막혔다.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던 자신을 평생 원망하고 증오해도 좋을 판에, 모른다고?

어색하게 웃으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하하하. 천하그룹의 회장 신우주라면 다들 알테지 말...”

“그런것 말고요.”

하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가위로 자르듯 우주의 말을 끊었다.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박력. 그리고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한 초롱초롱한 눈빛.

그 안에 빠져드는 것은 둘째치고 그야말로 우주는 난감했다. 그녀에게 뼈아픈 과거를 다시금 들추게 하고 싶지는 않고 이 상황을 빨리 얼버무리고 싶었다.

“에이, 장난이 지나치시오.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었다지만 소생을 모르다니~”

그녀가 일부러 그러나?

머릿속이 슬슬 혼란스러워질 무렵, 하나가 여전히 사막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왜 당신을 볼때마다 내 마음이 아픈거죠?”

“뭐, 뭣이오?”

한순간 짠했다.

우주는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깄었군.”

차영웅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두 사람에게 다가오더니 하나를 보며 말했다.

“갑자기 사라졌길래 찾으러 왔다네. 동료들도 자네를 찾고 있으니 얼른 가보도록해. 여기 있을때가 아니네.”

“네.”

스르릉, 척!

하나는 짧은 대답과 함께 나노슈트를 1초만에 착용한 뒤 우주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이내 마을쪽으로 사라졌고, 그때까지 멍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우주는 바로 정신을 차리며 차영웅에게 따지듯 물었다.

“대체 하나 낭자에게 무슨 짓을 한거요!”

차영웅이 피식 웃어보였다.

“무슨짓이라니. 우린 아무짓도 안했어. 했다면 자네가 했겠지.”

“......!”

차영웅은 하나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며 예전 일을 떠올렸다.

“2년 전이었어. 어느날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게 아니겠나. 그러고는 내게 하는 말이 기억의 일부분을 지워달라고 하더군.”

“기억을...?”

“난 바로 이선주 회장님과 상의했지. 그때 회장님에게서 자네와 하나 양과의 관계를 알게됐고 팀의 전력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나둬선 안되겠다는 결론을 냈네. 하나 양은 신라MSC 내에서 딜을 잘뽑아주는 정상급 딜러거든. 그대로 꽃이 꺾이게 놔둘 순 없었지.”

차영웅은 우주를 돌아보며 웃어보였다.

“그날 이후 부모님의 동의하에 기억 일부분을 지워버렸네. 그 일부분이야 당연히 자네에 대한 기억이었지.”

“맙소사...!”

우주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차영웅은 계속 말했다.

“난 이번 레이드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레이드에 앞서 몇가지 돌발변수에 대한 대처방안을 미리 준비해왔네.”

“하나 낭자가 그 돌발변수 중에 하나란 말이오?”

“맞아. 내가 그녀의 과거를 아는 이상 내버려둘순 없었지. 자네와 접촉하고 나서 정신상태가 혼란스러워질걸 예상했었어.”

“그럼 데려오지 말았어야지! 미쳤어?”

우주가 갑자기 성을 내며 소리쳤다. 차영웅이 나노슈트를 입었기에 망정이지 멱살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면 당장 잡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차영웅은 여유를 보이며 그를 꼬집었다.

“우린 지금 바쿠의 디버프를 받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자네가 정말로 흥분하는 것인지 디버프 때문에 흥분하는 것인지 스스로 자각하는게 좋을거야.”

“......!”

“그리고 내 의지가 아니야. 복제인간이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나? 우습군. 그녀가 여기에 온 이유는 별거 없어. 신라그룹 내 전문가들이 며칠 동안 연구하고 모의테스트를 해본 결과, 그녀가 없으면 총딜량에서 자네와 천하MSC를 이길 수 없다는 분석이 나왔지. 단지 그 뿐이야. 타이탄급 사체는 사람 목숨보다 더 진귀하고, 고용된 직원들은 개인사가 어찌되었든 계약에 따라 개처럼 일하면 그만일세. 비단 신라그룹뿐이 아니라 생각해보게. 타이탄급 사탄의 사체가 걸려있다면 그 어떤 기업이라도 무리를 해서 욕심을 부릴게 아닌가.”

기업의 이익을 따진다면 그렇다. 이에 관해 설명하자면 복잡하다. 이 시대 이윤을 얻기 위한 기업의 각종 불법적이고 야비한 행태에 관해서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엔 정부의 통제를 넘어섰고, 우주가 일부일처제 시대에 여러부인을 맞아들이려는 것처럼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그들의 행위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같은 기업인으로서 그 이유를 알기에 우주도 더는 말안했다.

됐다. 넘어가자.

우주는 디버프로 인한 거짓된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며 말을 돌렸다.

“몇가지 돌발변수가 있다고 했는데, 하나 낭자 말고 다음은 무엇이오. 도와줄 수 있으면 내 도와줄테니 내게도 알려주시오.”

“다음? 다음이라...”

어째서인지 차영웅은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며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이내 대답했다.

“다음 돌발변수는...”

“꺄아아아악!”

그때였다.

갑자기 여성의 비명소리가 허공에서 크게 울렸다.

우주와 차영웅은 소리가 난쪽을 동시에 바라보더니 마을쪽을 향해 즉시 내달렸다.

그로부터 30분 전.

“요즘 어떻게 지내?”

조원들과 함께 곳간을 찾아 뒤적이던 천하MSC 한동식에게 불쑥 수연이 찾아왔다.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채로 곳간 밑을 살펴보던 한동식은 살짝 고개만 돌려 위를 보더니 그녀를 보자마자 행동을 멈추고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하이테크 슈트를 착용한 그가 바이저를 열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나야 늘 병신처럼 잘지낸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날카롭고 부리부리한 눈매, 매섭고 강인한 인상, 근육질의 덩치를 가진 마초 같은 이미지의 한동식.

그를 향해 밝게 웃고 있는 오수연.

두 사람은 13년 전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제네틱스 입사동기들끼리 어울려지내다 친해지게 되었으며, 멋모르던 시절에 한때는 사귀는 사이까지 갈뻔 했지만 그가 고백을 주저하는 사이 어느날 직장 선배가 덥썩 수연을 낚아채는 바람에 인연이 잘 풀리질 않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만 하고 곧바로 헤어지는 사이처럼 서로 데면데면한 친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일이냐. 너네 조도 일로 왔어? 뭐 얻어먹을게 있다구.”

“아니, 나 혼자만.”

“혼자?”

“응.”

“여기 천하 밖에 없다. 다치기 싫으면 얼른 가라. 어제 저녁에 너네가 우리팀 호박씨 깐거 울 팀원 애가 다 들었다. 그래서 지금 무척 분위기 안좋으니까 혼자 다니지 않는게 좋아. 괜히 쿠사리 듣기 싫으면.”

“그래? 그럼 혼자다니면 큰일이겠네. 동식아. 니가 우리팀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줄래?”

“......?”

한동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수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눈동자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녀가 나노슈트를 해제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동식은 평소 자신이 알고 있던 수연의 탄력적인 몸매가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본능적으로 그만 붉은슈트를 입은 그녀의 적나라한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고 말았다.

그녀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행여나 변태라고 오인받는 것은 사양이다.

조금 당황한 그가 말을 더듬었다.

“뭐, 뭐냐. 지금 레이드 도중인데 왜 파워드 슈트를 벗은거냐?”

“갑갑해서.”

“아무리 갑갑해도 그렇지. 너네 팀장이 보면 분명 한소리 듣는다.”

“지금 그런건 신경쓰고 싶지 않아. 내가 지금 가장 신경쓰고 싶은건 한동식. 바로 너야.”

“나라구...?”

“그래, 너.”

한동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너 지금 나 꼬시냐?”

“덩치가 커서 둔할줄 알았더니 눈치는 빨라서 좋네. 예전에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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