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다음날 오후 리에는 성공적인 결과물들을 가지고 함께온 특사단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일본 원정 준비로 바빴던 우주는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윽...!”
가슴이 불쑥 심하게 아파져왔다. 호흡이 곤란해지고 이마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순간 병에 걸렸나 하는 두려움이 솟구쳤지만, 잘 생각해보니 예전에 겪었던 것과 비슷한 증상이다.
오히려 미소가 지어지며 드디어 올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 회장님!”
본사 앞에서 짐을 나르던 직원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거 아니시죠?”
“회, 회장실까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우주는 통증을 참아가며 손바닥을 작게 흔들면서 점잖게 사양했다.
“별일 아니니 걱정들마시오. 그보다 김 부장 좀 불러주시오.”
김토성은 레이드 장비를 싣느라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근처에 있었다. 직원들은 얼른 뛰어가서 그를 데려왔다.
“아이구, 회장님! 이게 어찌된일이십니까! 직원들한테 들었습니다!”
우주는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놀란 얼굴로 뛰어온 그에게 태연하게 미소지었다.
“통증은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염려 마시오. 일단 나하고 레지스트 쉴드에 같이 갑시다.”
“레지스트 쉴드요?”
“그렇소. 그리고 료 팀장 하고, 강 부팀장, 또 키 큰 한 사장하고, 키 작은 한 사장하고 같이 갈테니 세 사람한테 연락 해보시오.”
키 큰 한 사장은 소라였고, 키 작은 한 사장은 소민이었다.
어쨌거나 우주를 포함해 여섯 사람은 차량 두 대로 급히 전방주둔지로 향했다.
레지스트 쉴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노슈트를 착용한 미라가 주변 숲속으로 뛰어가서 토끼급 돌연변이 생물 한마리를 금세 달고 나왔다.
우주는 곧 나노슈트를 착용한 뒤 거대 멧돼지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400만 입니다!”
나노슈트로 인해 기존 200만 아트만에너지에서 200% 증폭된 400만.
“400만? 이상하군.”
우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슴의 통증은 전방주둔지로 차를 타고오는 동안 점차 옅어져갔고, 지금은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즉 통증이 없다는 것은 능력이 개방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텐데, 어쩐지 변한게 없어보인다.
“다시 측정해보죠.”
하이테크 슈트를 빌려입은 소라가 바이저를 연 채로 그렇게 말하자 곁에 나란히 서 있던 소민도 말했다.
“아트만 에너지의 수치가 올라간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능력이 생긴게 아닐까요?”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눈을 감고 아무리 명상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도 없고, 전과 변한게 없는 것 같소.”
우주는 입술을 깨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크게 기대했던게 잘못이다.
그 모습을 보고 료코가 안타까운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
“본래 사람이란 한결 같아야 좋은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이 생기지 않았다고 해서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그러자 대뜸 소라가 받아치며 지나가는 소리처럼 말했다.
“사람은 변해야 좋은거야.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려는 사람만큼 우둔한 것도 없지.”
료코가 바로 발끈했다. 눈에 힘을 주고 소라를 쳐다봤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끼어드는구나.”
소라가 팔짱을 끼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흥. 몰라 나도. 그냥 너한텐 지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니가 말하면 뭐든 반대로 까고 싶어.”
“네 이년. 참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하는구나.”
“자자, 두 사람 그만하고요. 다른거나 신경쓰자구요.”
소민이 나서서 두 사람을 말리고, 조금 걱정하는 안색으로 우주에게 다가와 말했다.
“일단 계속 잡아보도록 해요. 잡다보면 무언가 변한게 느껴질지도 몰라요.”
“그럽시다.”
우주는 쭈그리고 앉아서 거대 멧돼지의 사체를 단검으로 해부하고 있던 미라를 쳐다봤다.
“미라 낭자. 다시 한 번 갑시다.”
“네.”
미라는 거대 멧돼지의 송곳니와 갈비뼈를 뽑아 가져온 커다란 천 주머니에 집어 넣은 뒤 한쪽에 던져놓고는 바로 숲속으로 달려갔다.
“저건 뭐야? 왜 저런데?”
소라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피 묻은 천주머니를 보고 징그럽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에 소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차 타고올때 말하는거 보니까 유라한테 뼈 목걸이랑 송곳니 단검을 만들어줄 생각인것 같던데.”
“참 나 기가막혀. 애들한테 별걸 다 만들어주네.”
“어린이집에 가져가면 애들이 좋아한다더라구. 친구도 많이 생기나봐.”
“아니 그러니까, 목걸이는 그렇다쳐도 단검을 왜 어린이 집에 가져가냐구. 네살짜리 꼬마가 누구 죽일일 있어?”
소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그러네?”
“너도 그렇고 다들 이해할 수 없다니깐.”
그 사이 료코는 거대 멧돼지의 사체로 가서 맛있는 부위만 골라 세키가하라로 쑤컹쑤컹 썰어서 봉지에 담았다.
소라는 그 모습을 보고 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료코에게 말했다.
“야! 넌 그걸 왜 챙겨?”
“왜긴. 저녁에 집에 가서 삼겹살을 해먹을 생각이다. 마트에 가면 거대 멧돼지 삼겹살이 한근에 5만원이야. 요즘 레지스트 쉴드에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이럴때 구해놔야지 언제 구하겠느냐.”
소라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찬다.
“5만원이 거 얼마나 한다고. 참나 우리 집엔 정말 이해 못할 부류들이 많네.”
그런 와중에 근처에 홀로 서 있던 우주는 저녁에 해먹을 거대 멧돼지 삼겹살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회, 회장님! 저기 옵니다! 준비하십시오!”
회장님에 사장님 두 명과 같이 있던 탓에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토성이 멀리서 뛰어오는 미라를 보고 황급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주는 금세 표정을 고치고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기필코 변한것을 찾아내리라 마음먹었다.
“이번에야 말로 두 번째 능력이 뭔지 찾으리다!”
료코가 재빨리 거대 멧돼지의 사체로부터 떨어지며 소리쳤다.
“서방님! 부담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리하지만 마십시오!”
소민이 두 주먹을 힘껏 쥐며 응원했다.
“힘내요!”
소라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두 번째 능력이 좋을수록 우린 돈을 왕창 벌게 될거예요. 어디 누구처럼 하찮은 능력만 아니었음 좋겠네요.”
부인들의 기운을 받아가며 이후 미라가 계속 두 마리, 네 마리, 여섯 마리, 열 마리씩 주구장창 몰아왔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다.
날이 저물고 우주는 아무런 해답도 찾지 못한채 결국 전방주둔지를 떠나야만했다.
그는 차를 타고 떠나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희한하다.
전에는 통증이 길었던 반면에 이번에는 반나절만에 사라졌고, 능력이 개방된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감도 못잡겠다.
“후... 피곤한데 됐다. 언젠가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
이틀 후.
천하MSC와 신라MSC의 팀원들이 만나 연합MSC의 필승다짐을 위한 일본 원정 출정식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가졌다.
이 행사에는 이세종 대통령과 MPO 코리아 대표 고준표, 신라그룹 이선주 회장 등 국내외 저명인사와 팀원 가족 등이 자리에 참석했다.
실질적으로 각 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우주와 차영웅은 수많은 취재진들 앞에서 "일본을 습격한 타이탄급 사탄 바쿠를 잡아 한국MSC의 위력을 만방에 떨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일본 국민들을 구해내겠다" 고 각자 비슷한 포부를 밝혔다.
또 909 특임대 내에서 정보과장을 맡고 있는 박대춘 소령이 직접 연합MSC의 단장직을 수행하며, 당일 이세종 대통령과 이선주 회장, 신우주로부터 연합MSC 구성 권한, 운영권, 판결 및 처벌권 등을 모두 위임받았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는 천하그룹과 신라그룹, 정부에서 나온 실무관계자들이 협상이 완료되기 전날까지 문제가 무척 많았는데, 애당초 신라그룹 측에서는 차영웅을 단장으로 내세우려 했으나 정부와 천하그룹이 나서서 '복제인간은 불완전 하고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가질 수 없다'는 식으로 강렬히 반대를 하였고, 이어 천하그룹이 신우주를 내세우자 이번에는 신라그룹이 나서서 '신우주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 라는 주장과, 이번 일본 원정에서 정부도 한 숟가락 얹고 싶었던 까닭에 정부관계자는 '양측에서 단장을 뽑기란 어렵다' 라는 주장으로 무조건 반대했다.
그리하여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정부쪽 인사가 단장직을 맡되, 양측MSC에 특별히 간섭을 안한다는 조건으로 힘 있는 고위급 인사가 아니라 단장이라는 허울만 번듯한 허수아비 인사를 연합MSC 단장직에 앉히는 것으로 세 집단이 최종 합의를 보았다.
더불어 정부측에서 909특임대 소속의 데바와 수라 요원들을 포함해 일반 군인들과 119 구조대원 및 구조견도 덩달아 파병해 현지에서 천하MSC와 신라MSC가 머무는 숙소를 경계하는 임무와 대민지원, 구호활동을 맡기로 하였다.
한편, 출정식이 끝난 뒤에는 모두가 가족같은 분위기로 함께 식사 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주는 이 자리에서 이세종 대통령과 이선주 회장, 차영웅, 여당과 야당의 대표, MPO 코리아 고준표 등과 함께 동석해 가벼운 술과 식사를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술잔을 들고 슬그머니 다가온 미라가 살짝 귀띔을 했다.
“자기. 저쪽에서 자꾸 자기를 쳐다보네요?”
“음?”
양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있던 우주는 미라가 가리킨 방향을 무심코 돌아보며 입안에 들은 음식들을 잘근잘근 씹었다.
우주는 신라MSC 팀원들끼리 둘러 앉은 테이블을 바라보자마자 씹고 있던 음식들을 단숨에 꿀꺽 삼켰다.
“저 사람은...”
“이제 잊었는가 싶더니 아직도 관심이 있나 보군요? 재미있어.”
미라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떠났다.
우주는 점잖은 드레스를 입고 먼 곳에 앉아있는 그녀와 막연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순간 옛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과 안타까운 감정이 동시에 솟구쳤다.
반면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해보였다. 눈을 똘망똘망 뜬 채로 전혀 부끄러움도 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휙.
먼저 시선을 회피한 것은 우주였다.
고개를 돌려 스테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속에 넣고 무작정 씹었다. 누군가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것도 민망했고, 그녀의 모습이 상당히 변한탓인지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갈정도로 남자로서 똑바로 마주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감정이 생겨났다거나 하는건 아니다. 그저 뻘쭘했을 뿐이다.
“자네.”
테이블에 동석한 사람들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무심코 입안에 든 고기를 잘근잘근 씹어가며 그의 머릿속에는 한 여성이 그려졌다.
‘하나 낭자...’
그녀가 신라그룹으로 간 것도 순전히 자신탓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 제네틱스 직원들이 지난 3년간 실직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반면에 그녀는 제때에 이직을 해서 다행인 것도 있었다. 이제와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그저 잘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이, 이보게.”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던 와중에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옆자리에 앉은 차영웅이다.
그는 한 손에 술병을 든 채 미소짓고 있었다.
“팔 떨어지겠어.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거야.”
“미, 미안하오.”
우주는 얼른 빈잔을 내밀었다. 술을 몇잔이나 마신 것인지 벌써 두 뺨이 붉어진 차영웅은 흐뭇한 표정으로 와인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요즘 잘나가더군.”
“차 대장 보다야 덜 나가지 않겠소.”
“이 사람 겸손은. 아무튼 우리 둘 다 힘을 합해 일본 가서 잘해보자고.”
“그럽시다. 서로 가능한 싸우지 말고 말이오.”
“하하. 싸우긴 누가 싸우나.”
두 사람은 이내 와인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차영웅은 한 모급 마신 뒤 술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바쿠의 사체는 우리쪽이 다 가져 갈걸세. 그쪽은 별로 소득이 없을테니 그렇다고 서운해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술김에 벌써부터 경쟁심이 발동했나.
우주는 여유있게 피식 웃어보였다.
“그건 가서 재봐야되지 않겠소? 신라MSC가 제 아무리 팀원 개개인의 장비가 좋다지만, 예부터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그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