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이에 정권의 존폐에 위협을 느낀 나베 정권은 사태를 부랴부랴 수습할 생각에 미국에게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미국 정부는 이미 새로운 총리로 물망에 오른 민주당의 고이치로와 접촉을 하며 나베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다.
나베 정권과 접촉을 해봤자 더 이상 이득을 볼 것이 없다는 것이 미 국무부의 판단이었다.
지지기반이 산산이 조각나버린 나베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내각의 수장으로서 최근 안팎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스므니다. 국민 여러분께 마음 깊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므니다.)”
국민들의 퇴진 압력에도 불구하고 총리직을 고수하려던 나베 신쥬 총리는 타이탄급 사탄으로 인한 외국인자본의 급속한 이탈과 더불어 국내증시가 곤두박질치고 경제와 국방이 엉망이 되자 더 이상 기댈 곳도 없었고, 여기에 다코오 가문과의 연루설이 불거지며 마침내 그의 정치인생에 마침표를 찍게됐다.
그는 결국 내각 총 사퇴를 선언함괴 동시에 자신도 퇴진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우익이던 자유연합당 정권이 지고 민주당 정권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전시 상황으로 인한 임시내각 총리에 고이치로를 선출하게 되었다.
“(환영합니다 고이치로!)”
일본 국민들은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커지며 즉각 시위를 중단하는 대신 정부가 발벗고 나서서 한국, 중국, 러시아를 설득해 더 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하기 전에 그들의 MSC가 일본으로 올 수 있도록 해달라며 고이치로에게 호소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요시자와 그룹의 든든한 후원 아래 정치적 입지를 단단히 다져온 고이치로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단기간에 내각 구성을 완료하며 그 다음 행보로 한국과 중국, 미국,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공식석상에서 '한국 국민들에게 3년 전 서울에서 일본이 자행한 테러 사건을 순순히 인정하고 사죄를 드린다'며 그 유가족들과 한국 정부에게 타이탄급 사탄의 처리가 끝난 뒤 완벽한 보상을 약속했고, 3년 전 한국 정부가 제네틱스에게 그랬듯, 고이치로는 칼을 들어 다코오 가문의 자금줄을 찾아내 차단하고 그와 관련된 기업들은 철저하게 공중분해 시켰으며 관계자들은 위아래 가릴것 없이 전원 재판을 받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본이 숨가쁘게 새로 태어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 이세종 대통령은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모습에 흡족해하며 일본의 특사를 만나주기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 특사로 파견된 일본측 특사단장은 바로 요시자와 그룹의 요시자와 리에 회장이었다.
전용기로 서울공항에 도착한 그녀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감회가 새롭다는 듯 다소 달 뜬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땅을 밟아보는 것도 무려 100여년 만인가.”
“(네?)”
그녀가 무심코 한국말을 하자 옆에 있던 비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에는 바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무것도. 어서 가자꾸나.)”
화사한 붉은색 계통의 기모노 차림에 어딘가의 여주인처럼 머리를 틀어올린 그녀.
110년만에 돌아온 고국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리에는 첫날 청와대를 방문해 이세종 대통령과 만났고, 고이치로의 뜻을 정중하게 전하였다.
이어 둘째날에는 신라그룹을 방문해 이선주 회장과 만나 일본에 MSC를 보내줄것을 요청했고 이선주가 이를 받아들이자 두 사람은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신라MSC를 일본에 파견하겠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날.
셋째날에 만나는 인사야말로 임시 총리 고이치로가 그녀를 한국에 보낸 이유이며 리에에게 있어서도 가장 벅찬 순간이될지도 모를일이었다.
이 무렵 우주의 천하MSC는 매머드급 사탄을 상대로 다른 기업과의 협동레이드도 없이 25명의 인원으로만 잡아내는 등 연일 승승장구하며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아울러 소라를 사장으로한 천하건설이 세워지며 레지스트 쉴드 안으로 중장비와 인력이 투입되는 시기였고, 우주는 천하물산 사장직을 소민에게 넘겨준 뒤 천하물산과 천하건설을 기반으로 하는 천하그룹의 회장직 자리에 올랐고, 여의도에 천하그룹이 들어설 신사옥을 짓는 등 매우 바쁜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회장님. 방한중인 일본 요시자와 리에 회장이 회장님께 비공식적인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천하물산 본사에 임시로 마련된 회장실.
여비서가 조심스레 들어와 책상위에 공문을 올려놓고 나갔다.
우주는 한동안 책상위에 올려진 공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진 풍파에도 잘 견디고 있었구나...”
연일 뉴스에 보도되는 리에에 관한 소식을 우주도 모를리가 없었다. 게다가 3년 전 마츠다이라와 결투를 벌일 당시 그에게서 허소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적도 있었다.
그동안 그녀와 언젠가 마주칠거란 예상을 하며 부인들 모르게 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어제 오후에는 료코가 신문지를 들고 우주의 방으로 찾아왔었다.
그녀는 신문을 가리키며 우주에게 넌지시 말했다.
“미소가 읽던 신문을 가져왔는데, 여기 이 사진의 리에라는 여성이 왠지 눈에 익습니다.”
“너도 본적이 있겠지만, 이 처자는 허소윤이다.”
“허소윤? 허 씨 성이라면 설마...”
“그래. 오래전 켄신인가 뭔가한테 일본으로 팔려갔던 낭자지.”
“그녀가 어떻게 여태껏 살아있는 것이옵니까?”
료코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그녀는 110년 전 마츠다이라가 행한 모든 일들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었고, 심하게 말하면 자신이 허소윤을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었다.
“데바가 된것 같아. 능력으로는 영원히 늙지도 않는 생명력을 가진것 같고.”
“그 당시에는 데바가 없지 않았습니까?”
“뻔하지 않겠어? 나 때문이지.”
“......”
그 말을 끝으로 료코는 입을 닫았다.
상황을 대충 파악한 것 같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뒤 살살살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방을 나섰다.
다시 현재.
“소윤이 아닌 이제 리에라... 오랜기간동안 그녀도 변했겠지. 내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지 어언 4년 째. 서로가 비록 바다 건너 먼 곳에 있다지만 이 4년의 기간동안 방송이나 신문으로라도 숱하게 내 소식을 접했을텐데 그동안 연락 한 번 없었던 것을 보면, 분명 지난 과거를 잊고 나에 대한 미련 역시 잊은 채 새로운 삶을 쫓고 싶은 것일테다.”
우주는 이어 중얼거렸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마찬가지지. 이제와 그녀를 잡아 뭘 어쩌겠는가. 각자의 삶이 있는데.”
창밖을 바라보던 우주는 뒤로 돌아서서 책상 위에 놓인 요시자와 그룹측의 공문을 쳐다봤다.
“우린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다. 내가 만약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순전히 당신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모국의 힘든 상황을 가슴 아파하는 료코 때문이지.”
우주는 그 길로 바로 천하MSC 1군팀을 본사 건물에 있는 포럼실로 소집했다.
실내에는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채워 앉아 있었고, 앞으로 걸어나온 우주는 요시자와 그룹측이 보낸 공문을 모두를 향해 들어보였다.
“일본이 현재 타이탄급 사탄 바쿠로 인해 골머리를 썩는 중이라는 걸 잘들 알고 계실것이오. 그래서 오늘 오전 우리에게도 협조를 바란다는 공문을 하나 보내왔는데, 타이탄급 사탄의 공략에 성공할 시 그 사체를 우리와 함께 협동레이드를 벌이게 되는 신라MSC와 차등분배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왔소. 그리고 이 밖에도 팀원 개개인이 추후 여행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할때마다 무상으로 호텔, 차량, 식사, 여행경비 등을 제공해주고 방송출연을 원하면...”
“신라그룹?”
수희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냈다.
이런 반응이 올줄 우주는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신라그룹이오.”
“안돼. 왜 걔들이랑 협동레이드를 해?”
그녀는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 얼결에 우주에게 반말을 해서 그런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 뒤 바로 말투를 고쳤다.
“신라그룹은 안돼요. 그쪽과 레이드를 같이 했다간 무슨 험한꼴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는거요.”
“그래서라니요?”
“설마, 바쿠를 잡으러 일본에 가시려구요?”
수희의 목소리와 겹치며 다른쪽에서 목소리가 났다.
우주가 그 방향을 돌아봤다. 연구소에서 일하다 바로 온것인지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연화였다.
“난 갈 생각이외다. 하지만 단독으로 결정할 생각은 없고, 찬반 투표를 진행할 생각에 오늘 이렇게 팀을 소집한거외다.”
그때 또 다른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약서 상에는 아무리 힘든곳이라도 회장님이 결정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무작정 따라가야하는게 정상인데 뭐들 그렇게 말이 많아. 난 무조건 찬성.”
연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배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어서 산뜻한 원피스를 입고 온 영애도 제목소리를 냈다.
“내래 회장님의 뜻이 그렇다면 찬성입네다. 간만에 해외여행 좀 가봐야 하지 않갔습네까?”
그 옆에 있던 현아도 말했다.
“나도 찬성. 어차피 쓰레기 인생인데, 걍 스릴 넘치게 살다 죽을래.”
또 그 옆자리에 앉아있던 진혁이 일어서더니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마, 만약 회장님이 안계셨다면 전 이미 한번 죽은 목숨인지라, 앞으로 제 목숨은 회장님께 귀속된거나 마찬가지예요. 뭐든간에 회장님께서 결정하시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게다가 회장님의 실력은 세계최고시니까 팀원으로써 믿음이 생겨요.”
“저놈 안짤릴라고 아부하는거 봐. 좋아, 인생 제대로 살고 있어. 원래 길게 살려면 상사 엉덩이를 수시로 긁어줘야되는거야.”
연진이 그렇게 말하자 실내는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어서 창가에 앉아있던 미라도 짧게 말했다.
“찬성. 일본으로 가죠.”
또 료코가 말했다.
“저도 찬성이옵니다.”
앞자리에 앉은 소민도 말했다.
“신라그룹이 참가한다면 확실히 승산이 있어서 그럴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이선주 회장은 절대로 손해보는 장사는 안할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 천하그룹이 숟가락이라도 얹어보죠. 저도 찬성입니다.”
소민의 이성적인 판단까지 더해서 대다수의 분위기가 찬성쪽으로 흘러가자 망설이던 다른 팀원들의 마음도 찬성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수희만 여전히 답을 내놓지 않았으니.
어쨌든 과반수는 넘었고, 요시자와 그룹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회의를 끝마치고 나서 팀원들이 하나씩 포럼실을 나가는 가운데 수희가 다가왔다.
“신라그룹과 굳이 협동레이드를 하려는 이유가 뭐야?”
“소생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런데 일본을 도와주려면 어쩔 수가 없소.”
“일본을 도와줘서 뭐해? 그냥 안하면 되잖아.”
수희의 말에 우주는 순간 료코의 슬픈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요시자와 리에가 엊그제 이세종 대통령을 만나서인지 오늘 오전에 대통령에게 연락을 받았소. 한국을 대표해 신라그룹측과 잘 협의해서 일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말씀하시더구려.”
“대통령의 부탁까지 있었단 말이야?”
우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이었다.
일본 총리의 사죄를 받아들이며 도와주겠다고 마음을 굳힌 이세종 대통령이 우선 순위로 찾은건 신우주였다.
그리고 우주는 그 대가로 일본에서 가져올 타이탄급 사탄의 사체에 관해 국가가 관여하지 않기로 서로 합의를 보았다.
“대통령이 시킨 일이라면 어쩔 수 없네...”
수희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우주가 물었다.
“오수연 때문에 그런거요?”
“맞아. 그 여자가 불안해서 그래.”
우주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만약 레이드 도중에도 이상한 짓을 한다면 내 단호히 그녀를 저지하겠소. 그러니 너무 염려치 마시오.”
“응...”
우주는 근심이 많아 보이는 수희를 가볍게 끌어안아준 뒤 함께 포럼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기분도 풀어줄겸 함께 드라이브를 하고 저녁도 같이 먹었다.
그날 밤 그는 수희의 집에서 잤다.
우주는 다음날 오전 서울의 한 특1급 호텔방에서 요시자와 리에와 만났다.
거실에는 그녀의 보좌관과 비서들이 탁자 위에 노트북 여러대를 켜놓고 자국내 여러 문제에 관해 상의를 하고 있었다.
사장쯤으로 보이는 어떤 중년남성은 일본 정치인과 화상통화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