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우주는 바로 인상을 구겼다. 그들이 풍기는 위압감이 대단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발동했다.
“무슨 소리냐...?”
“너무 뜬금없이 말했나보군.”
중앙에 서 있던 샥스핀.
피식 웃는가 싶더니 이내 샥스핀의 헬멧을 벗었다.
“세번째 하는 말 같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을 위해서 마음을 달래줄 무언가는 찾아냈나?”
어디선가 들어본 매우 익숙한 목소리.
“차, 차대장?”
일전에 방문했던 조직재생공학연구소.
그곳의 연구원인 박준의 소개로 원통형 시험관에 갇힌 20대 차영웅을 본적이 있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자의 얼굴이 그때의 그 모습과 똑같았다.
“차대장!”
우주는 크게 당황했다.
“어째서 신라그룹의 파워드 슈트를 입고 있는거요? 당신은 제네틱스인이었잖소?”
“그건 옛날의 차영웅이나 그랬지 지금의 난 아니야. 구 차영웅이 죽는 순간 제네틱스와의 계약은 폐기되었다네.”
“그래도 하필 왜 신라그룹으로 간거요? 당췌 이해할 수 없소.”
“우리가 누구인가. 스포츠에서 프로 선수와 같아. 회사를 생각하기 전에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면 그 뿐인거야. 자본주의 사회의 이치대로 움직였을 뿐이지. 내가 제네틱스를 떠난 건, 신라그룹 이선주 회장이 내민 조건이 더 좋았을 뿐이네.”
그의 말이 맞다.
복제된 차영웅이라지만 본인이 그런 선택을 했다면 타인인 자신이 나서서 뭐라할 이유는 없다. 그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것도 아니니까.
“하시도루는 당신이 제압한거요?”
차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우주는 잠시 입을 닫았다. 샥스핀은 본래 맹수에 견줄바가 못되는 파워드 슈트였다. 얼마나 형편없으면 신라그룹을 넘어 국가대표 선수였던 우연진이 사망했고 최강 사막여우팀이 해체됐다. 그런데 어째서? 어떻게 이긴것이지?
“신라(The Silla) 라고 부르지.”
차영웅은 등에 매고 있던 거대한 칼을 스르릉 뽑으며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길고 거대한 칼. 외형은 단조롭지만 칼날이 넓적하고 거친 위압감이 있었다. 만약 저 칼을 두 손으로 쥐고 내려친다면 그 파괴력은 가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사탄을 잡을 수 있는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칼이네.”
“그럴 리가. 그 칼로 사탄을 벨 수 있단 말이오?”
“아직 테스트는 못해봤지만, 맹수를 베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우주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저 신라라 불리우는 칼로 맹수의 장갑을 찢고 박살내버렸다는 것인가. 믿고 싶지 않아도 눈앞에 처참히 파괴된 맹수를 보면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자네 등에 달려 있는 스톰쉴드 제네틱스 또한 깨부쉈지. 아주 간단하게.”
차영웅이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그의 우측에 서 있던 샥스핀이 끼어들었다.
“형님. 쓰잘데기 없는 잡담은 집어치우고 난 대체 언제 소개시켜줄거요. 목빠지겠네 정말.”
그는 그렇게 말을 꺼내고 곧장 헬멧을 벗었다.
스포츠 머리인 그가 하얀이를 드러내며 우주를 향해 밝게 웃어보인다.
“오랜만이네. 총 쏘는 방법도 몰랐던게 엊그제인것 같은데 말이야.”
“태, 태평 형님!?”
우주는 또다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미처 생각치도 못했던 인물의 등장.
“형님도 차대장처럼 복제된 것이오?”
“복제란 말은 싫어하지만 한번 봐주지. 뭐, 그렇게 되었다.”
“형님도 신라그룹으로?”
“오케이. 신라그룹 조건이 너무 빠방해서 말이야.”
“옛 고릴라팀에서 둘만 간거요?”
“아니 한명 더 있어.”
태평이 왼쪽을 돌아보며 히죽 웃어보였다.
우주의 시선은 천천히 차영웅의 왼편으로 옮겨갔다.
“그, 그렇다면 혹시......!”
단숨에 누군지 직감했다.
차영웅의 왼쪽에 서 있던 샥스핀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헬멧을 천천히 벗었다.
어깨아래로 곱게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수연 누님!”
“잘지냈어?”
헬멧을 옆구리에 낀 수연이 왠지 쓸쓸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우주를 향한 미안함이 묻어나있는 표정이다. 그도그럴것이 우주가 병문안을 갈때마다 얼마나 거절을 해왔는가.
“누님은 어째서 신라그룹으로 간게요!”
차영웅과 이태평은 한 번 사망했다가 복제되어서 그렇다치고 제네틱스와의 계약이 남아있던 수연의 행동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과 함께 유일한 생존자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단 한마디 의논도 없이 이리 무심히도 떠나버린 것일까?
서운했다.
수연은 생명의 은인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고릴라 팀이 전멸하던 당시 두 다리를 잃는 고통까지 참아가며 자신을 끝까지 지켜내주려 노력했던 그녀였다. 그 고마운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지 환장하겠다.
게다가 차영웅과 이태평은 고릴라 팀이 전멸하던 상황을 경험하지 못한 채 복제된 복제인간이지만 수연은 달랐다. 그녀는 여전히 생존해 있고, 그때의 충격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자신과 그녀만이 가진 유대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그런데 왜 자신을 거부했을까?
배신감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했소!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소. 내게 무슨 서운한 감정이라도 느꼈던거요?”
수연은 그저 시선을 회피할뿐 태평이 말했다.
“그야 뻔하지 않겠어? 수연이는 우리와 단짝이니까. 우주 너와 알고지낸 시간이 너무 짧았던거야.”
“하지만!”
우주는 수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성토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봐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태평의 말이 맞는것 같다. 자신이 수연과 알고지낸 시간은 고작 일주일 뿐.
“떡정이 무섭긴 하지. 둘이 떡을 한번 쳐서 그런가 진득한 감정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옆에서 보기가 애잔하긴 하네.”
“너 이 새끼 말 조심 안해?”
수연은 즉시 태평을 날카롭게 흘겨봤다.
태평은 양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아무잘못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틀린 말했나 모.”
“가만 안놔두겠어!”
단단히 화가 난 수연이 허리춤에 있던 체인 커터를 뽑으려 했다.
차영웅이 재빨리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 두게.”
“저 자식 말하는 것 좀 보세요!”
“지금 이럴때가 아닌걸 잘알잖나. 우주군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줄텐가?”
그 말에 수연이 우주를 돌아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애써 화를 죽이며 분위기가 다시 잠잠해졌다.
차영웅은 차분한 눈길로 우주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거야. 야스쿠니특공대인지 뭔지 참으로 고맙더군. 다급해진 국회는 조금이라도 더 병력을 보탤 생각에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의 개정안을 황급히 통과 시켰지. 덕분에 우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어.”
차영웅은 손가락을 들어 가까운 곳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나? 방송국에서 나온 취재진들이.”
우주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많은 종군기자들이 몰려와 끌려가는 하시도루를 촬영하고 있었다.
“저들이 우리의 활약상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네. 곧 우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될거야. 국가에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가 되도록 말이지.”
차영웅은 우주를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자신만만한 표정.
“기대하게나. 우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을 말일세. 사탄은 이제 자네만 잡을 수 있는게 아니야. 마침내 경쟁자가 생긴 것이지.”
그는 발걸음을 떼며 뒤로 돌았다.
“경쟁에서 지는 자는 결국 도태되어 버리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거야. 그렇게 되지 않도록 건투를 비네.”
말을 끝마치고 그대로 걸어서 떠났다.
이어 태평이 손을 흔들었다.
“아디오스! 우리가 강적처럼 보일테지만 너무 쫄지마! 힘내라구!”
그마저 떠나자 홀로 남은 수연.
그녀는 망설이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우주에게 다가왔다.
“이번 일이 끝나면 날 찾아와. 기다릴게.”
테러 진압이 끝나면 찾아오라고?
우주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거요. 이미 무정하게 떠나버렸으면서.”
“왜 일까. 나도 모르겠어. 니가 자꾸 눈에 밟히는걸 어쩌니.”
우주의 눈매는 날카로웠다. 그녀에게 차갑게 대꾸했다.
“소생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준 누님이 고마워 그동안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그걸 전부 거부한건 누님이외다. 한 번 떠나버렸으면 그 뿐이오. 다시는 날 찾지 마시오. 게다가 지금 차대장의 말을 들었소?”
“뭘...?”
“마치 내게 시비를 거는것처럼 느껴졌소. 그런데 누님은 현재 그 차대장과 한편이오. 부디 본인의 신분을 망각하지 말길 바라오.”
“가차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