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허소윤이라면 친모와 살던 그 허씨 집안 딸내미를 말하는 것인가? 아아, 기억이 나는군. 그녀라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 징했어. 아주.)
“......?”
무언가 이상한 뉘앙스에 우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마츠다이라는 곧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이봐 신진루이. 옛날보다 형편없어졌군. 조국을 향한 네 장대한 뜻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이지?)뚝.
그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음?”
우주가 무심코 다시 전화를 걸어봤으나 전원이 꺼져있었다. 재차 걸어봐도 전원이 꺼져있다는 소리만 거듭 들려왔다.
아무래도 마츠다이라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의 배터리가 전부 소진된것 같았다.
“하아...”
우주는 팔을 늘어뜨린 채 멍한 얼굴로 몇 분이나 서 있었다.
나라냐, 료코냐.
마츠다이라에게는 쉽게 말을 뱉긴 했지만, 조국이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시선을 옮겨 손에 쥔 휴대폰을 쳐다봤다. 아직 전화를 걸 사람이 더 있었다. 한소라. 소라는 어찌되었을까?
서둘러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이어서 소민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찌 되었을까.”
캐비넷에 몸을 기댄 채 근심이 계속 쌓여만 갔지만, 여기서 죽치고 있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 당장 해야할 일은 전방주둔지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을 물리치는 것.
우주는 발걸음을 옮겨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얼른 얼른 준비해주십시오! 군인들과 함께 연합 작전을 개시할 예정입니다! 거기요! 열 맞춰 줄 좀 서주십시오!”
전방주둔지 내 광장 하늘에 굵직한 여성의 목소리가 바삐 울려퍼지는 중이었다. 모기업 슈트를 입은 한 여성 간부가 병사들을 재촉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각 기업의 팀장급은 군과 비교해 장교와 같았다.
사실 병사라고 해봤자 이틀전까진 민간인이었던 각 기업의 수라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보니 하나 문제가 있었다. 갑작스레 하나의 집단으로 통일되다 보니 기업 마다 다른 형형색색의 슈트를 통일할만한 군복이 없었다. 저마다 다른 색의 슈트를 입고 한 부대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총 한자루 없던 우주에게 군에서 총과 탄약을 지급해주었다. 거기에 제네틱스를 혐오하는 남들의 눈을 의식해 일부러 군복을 입혔으며 민간 부대가 아닌 군부대로까지 편입시켰다.
‘이것만 있으면 돼. 이것만 있으면...!’
방탄조끼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사병력과 비교해서 비록 간단한 무장이었지만 우주에게는 적장의 목이라도 따올 수 있을만큼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우주는 다시금 군에서 지급해준 K2-a 소총을 어루만지며 철모를 깊게 눌러썼다. 위장크림까지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다. 행여나 남들이 자신을 목소리로나마 알아챌까봐 누군가 물어오는 질문에도 일절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입을 닫고 있었다.
‘정문을 뚫기만 하면 료코에게로 간다. 료코에게로...!’
마법 주문처럼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 청와대가 떠올랐다.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나 말고도 뛰어난 자가 많을거야. 지난번에 마주친 그 자라든지.’
우주는 909 특임대의 송은혁 대위를 떠올렸다. 지난날 강미라에게 납치되었을때, 자신의 앞길을 막아섰던 자로 인상이 깊게 남아있었다.
상관의 명령을 기다리며 다른 군인들과 함께 열을 맞춰 서 있던 우주의 귀에 문득 다른 병사들의 잡담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전화 안되지?”
“응. 개놈들이 계속 방해전파를 날려보내는 바람에 통신장비가 죄다 먹통이라니까.”
“에구, 우리 마누라한테 전화해봐야 되는데 큰일일세. 나없이 잘있을련지 걱정이야 걱정.”
“난 우리 열살 딸내미를 혼자 집에 두고 왔다구. 이 어린것이 아빠도 없이 잘버티고나 있을지 속이 타 미칠지경이야.”
잠자코 듣고만 있던 우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희한하군. 난 아까 분명 전화를 썼는데 어찌된 일이지? 왜 안된다고 하는 것일까?’
우주는 확실히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로 전화가 안되는지. 안된다면 제네틱스 지사로 가면 된다고 알려주고도 싶었다. 어쩌면 그곳만 전파가 통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전체 차렷!”
각 기업의 수라로 구성된 사병력과는 달리 군 병력은 군기가 가득했다. 불쑥 등장한 영관급 간부를 향해 병사들은 전원 경례를 붙였다.
간략한 출정식을 마치고 각 중대마다 배정되어 있던 대위들이 소리쳤다.
“다들 움직여! 장비 싣는데 90초! 출발 완료까지 5분 주겠다! 만약 제 시간 안에 완료를 못한다면 저기 끝에 보이는 건물 찍고 오는데 선착순 열 명이다!”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은 비장함과 함께 다가올 전투에 대한 긴장감을 더한다. 병사들은 하나 같이 굳은 표정으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우주 역시 눈앞의 일에만 전념하기로 다짐했다. 머릿속의 고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냉철함만이 남아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서울로 향하기 위해서라도 기필코 쳐부숴주겠다! 각오하거라 마츠다이라 일당들이여!”
***
“이히히히! 재밌다 재밌어!”
완구특공대가 거점으로 삼은 경기도 구리시청.
강원도에서 넘어오는 군병력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은 이완구.
그는 현재 갓 잡은 포로들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주변의 병사들 또한 재밌는지 너나할것 없이 실실 웃으며 구경을 했다.
“대일본제국 만세 해봐라.”
이완구는 양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 꿇은 포로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대일본제국 만세 해보라고.”
“......”
“안해? 대일본제국 만세 해봐. 해보라고.”
온몸에 흙이 묻고 얼굴이 새까맣게 탄 포로는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말도 없었다.
이완구는 즉시 포로의 뺨을 때렸다.
찰싹!
“할거야 안할거야?”
포로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안한다......!”
“이래도?”
찰싹!
찰싹!
찰싹!
“이래도 안해? 안해? 안해? 안해!”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양손을 다 사용해서 뺨을 때렸다.
“크윽!”
포로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다.
“헥, 헥! 아이고 때리는 것도 힘이드는 구만!”
프로이센식 제복에 옛날식 둥그런 안경을 착용한 이완구는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러다 그는 곧 짜증이 났는지 성을 내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이 녀석들을 전부 묶어라! 곤장을 후려쳐야 말을 듣게 생겼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여러개의 곤장 형틀을 가져와 그 위에 포로들을 납작 엎드리게 한 뒤 두 팔과 두 다리를 곤장 형틀에 묶었다.
이완구는 곤장을 집더니 외쳤다.
“천황 폐하 만세라고 말하는 놈들은 때리지 않고 봐주겠다! 죽기 싫으면 얼른들 해봐!”
주변에서 태평하게 구경이나 있던 완구특공대 병사들이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의 말도 말이지만 뚱뚱한 이완구를 보니 마치 저팔계가 삼지창을 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없어? 아무도 안할거야?”
“......”
잠시 침묵이 흐르다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들고 눈을 뜰 기력조차 없어보이는 포로 한 사람이 마지못해 신음을 토해내듯 말했다.
“처, 천황 폐하 마, 만세...... 처어언황 폐하 만세......”
“아하, 아하하하하! 이 배신자 새끼봐라!”
이완구는 다른 포로들을 향해 입을 연 포로를 가리키고 말했다.
“이 새끼 밉지? 때리고 싶지? 내 그 마음 안다. 내가 대신 때려줄테니까 실컷 보고 만족하거라!”
이완구는 즉시 조금 전 입을 연 포로에게 다가가서 곤장을 크게 휘둘렀다.
찰싹!
“크악!”
“하~안대요!"
찰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