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그 후 철수는 법원 경매로 나온 전직 대통령의 집을 소개받아 알게 되었고, 나중에 우주도 그 집의 조망과 넓은 부지를 보며 매우 만족해했다.
성북동에 자리한 고급주택은, 우주가 입찰한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동네 주민들이 박수를 치고 열렬히 환영을 했다.
성북동에는 각종 정·재계 인사들이 많이 모여 살기로 유명하다. 하찮은 인물이 왔다면 그리 달갑지 않았겠지만, 신우주는 달랐다. 세계적인 월드스타가 같은 동네에 살면 자연스레 땅값이 오르고, 덩달아 자신들의 품위까지 살아날테니까 말이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우주의 법원 경매를 도왔다. 물론 이 사실을 우주는 전혀 몰랐다. 그의 주변 관계자도 몰랐다.
우주는 법원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대지면적 600평 단독주택을 68억원에 단독 입찰했으며, 결국에는 무난히 낙찰 받았다. 이는 어느 한 세력이 주도해 그를 도왔다기 보다는 정·재계 인사들의 안주인들이 '신우주가 이 동네에 살았으면 좋겠다' 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씨가 되어, 그 주변인들에게 전파되고 전해지고 전해져 아무도 입찰할 생각을 꿈꾸지 못했을 뿐이다.
우주는 집을 사자마자 바로 재건축 허가를 받고 헐었다. 70년대에 만들어진 구시대 집은 싫었다. 자신이 구시대 사람이라 그런지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21세기 신 감각으로 새로 짓기로 했다.
본채는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그리고 마당에 2층짜리 별채 1개를 지었다.
새 집의 방만 해도 총 17개나 되었다.
본채 1층 내부는 거실, 주방 및 식당, 방 5개, 드레스룸, 욕실 4개, 투명한 유리로 둘러 쌓여 마당을 훤히 볼 수 있는 파티룸, 현관 등으로 구성돼 있고 2층은 거실, 방 4개, 욕실 3개, 드레스룸 등으로 3층과 별채 역시 구조가 비슷했다.
또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작은 수영장이 있었으며, 지하 1층에는 차량 일곱대는 넉넉하게 비치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주차장과 창고를 지어 놨다. 그가 현재 소유한 차량은 마이바흐 62s와 페라리 458 스페치알레, 그리고 오늘 받은 아우디 RS6까지 총 세 대였다.
***
새 집앞에 도착하자 기무팀이 엄중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중이었다. 자사 최고 수라인 우주를 위한 회사측의 배려로 오늘만 특별히 파견나와 있었다.
차고 셔터가 자동으로 올라간 뒤 그대로 지하에 차를 끌고 내려간 우주는 불빛이 환한 주차장에 RS6를 세워 놓고 본채 1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파티룸을 찾았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파티룸에는 아늑한 조명속에 재즈 선율이 감미롭게 흘러나왔다. 출장 요리사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고, 한켠에 마련된 바(bar)에서는 바텐더 혼자서 조용히 컵을 닦고 있었다. 저마다 우주를 발견하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우주는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오.”
1층에 있을 료코와 소라가 보이지 않았다. 소라는 이번 집들이를 도와주기 위해 오전 일찍 일을 마치고 우주의 집을 찾기로 되어 있었다.
사실 우주는 거실에다가 기다란 상을 하나 펴놓고 여러 사람이 빙둘러 앉아 구수한 된장찌개나 대접할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핀잔어린 조언을 듣고 출장 요리사에 바텐더, 밴드까지 부른 것이었다.
두 사람이 2층에 있는가 싶어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2층에는 우주의 방이 있었고, 료코에게도 2층 방을 내주었다. 그리고 당장 이곳에 살지는 않아도 들릴때마다 이용하겠다는 소라의 방은 3층. 또 3층에 남은 세 개의 방 중 하나는 앞으로 미라에게 줄 생각이었고, 참고로 소민의 방도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별채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멋진 나선형으로된 목조계단을 뚜벅뚜벅 밟고 올라 2층에 도착했다. 손님을 맞이 하기 전 옷을 갈아 입을 생각에 입고 있던 정장 코트도 벗고 넥타이도 풀었다.
2층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불렀다.
“료코? 소라 낭자?”
거실은 휑했다. 주황색의 소파들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모여져 있고 벽에는 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제까지 종이박스가 널려 있던 거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싸늘한 바람에 한기가 느껴졌다. 환기를 시키려 했는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조용히 창문을 닫아 놓고 료코의 방으로 가보았다. 그녀의 방은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했다.
전등이 켜진 환한 복도를 걸어가며 두 사람의 이름을 재차 불렀다. 이렇다할 대답이 없자 불안하기 보다는 장을 보러 나갔는가 싶었다.
방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때 찰컥 하고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소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료코의 방에서 나오더니 곧바로 문을 닫았다.
“기다려요. 아직 들어오면 안돼.”
그녀는 상당히 들뜬 표정을 짓고 몸으로 문을 막았다. 대체 무엇을 숨기려는 건지는 몰라도 실실 웃는 표정이 마치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소녀 같았다.
평소 그녀 답지 않은 모습을 보니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라도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내심 기대하면서 소라를 마주보고 웃었다.
“왜 그러시오?”
“옷 갈아 입고 있어요.”
“옷 갈아입는게 어때서 그러오? 료코와 난 이미 볼것 다 봤는데?”
그러자 소라가 급정색을 하더니 미간을 좁히며 날선 목소리를 냈다.
“지금 그 말,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에요?”
우주는 속으로 아차, 실수했구나 하며 살포시 웃어보였다. 앞에 계속 서 있다가는 괜스레 타박만 당할 것 같아 자리를 떠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소생은 옷 좀 갈아입고 오겠소.”
그가 그렇게 말하자 소라가 황급히 말했다.
“안돼요. 이거 보고 가요.”
“뭔데 그러오?”
똑똑.
때마침 방 안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인 것 같았다.
“놀라지 말아요.”
소라가 잇몸을 드러내며 씩 웃더니 즉시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슬로우모션처럼 문이 천천히 열렸고 곱디고운 분홍빛깔이 제일 먼저 우주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
곧 문이 활짝 열리자, 우주는 돌연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운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오!”
료코가 분홍빛깔 한복을 입고 수줍은 얼굴로 서 있는게 아닌가!
그 자태가 얼마나 곱고 예쁜지, 료코가 진정 꽃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될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료, 료코!”
“(서방님...)”
료코가 뺨을 붉게 물들이며 수줍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우주는 마냥 설레고 설레여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기모노를 입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그녀. 은은하게 적셔오는 달디단 향기가 우주의 뇌를 마비시켰고, 분홍빛깔 한복을 입은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는 마치 조선시대 양반가 규수를 보는 것 같아 우주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단아하고 청초, 수려한 여인의 표상이라고 불러도 정말 손색이 없는 꽃중의 꽃. 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료코의 모습에 우주는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입 좀 다무세요.”
소라가 우주의 헤벌쭉한 표정을 보고 살짝 질투가 났는지 바로 핀잔을 주었다.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우주는 무안함을 수습하고자 능청스럽게 웃음을 지어보인다.
“소생이 언제 칠칠치 못하게 입을 벌렸다고. 허허허.”
“침도 닦고.”
“스읍!”
그가 입가에 묻은 침을 황급히 소매로 닦는다.
소라가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를 슥 보더니 입술을 쌜쭉 내밀고 말했다.
“예전에 내가 입었을땐 별로 였나봐? 오늘 더 좋아하는 것 같네.”
우주는 빤히 쳐다보고 있는 소라의 시선에서 도망치듯이 딴곳을 바라보았다.
“그, 그럴리가 있겠소. 서로 막상막하요. 그리고 오늘 료코만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둘 다 한복을 입고 있었으면 여기서 당장 쓰러졌을 거요. 둘 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내 심장이 터져버렸을테니까.”
“거짓말이 심하군요.”
“그럼 이건 어떻소.”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중국 삼국 시대에 강남이교란 말이 있었소. 당시 강남 지방에 살던 대교와 소교라는 미인 자매가 미색이 워낙 출중하여 당대 최고란 소리를 들었다는데, 내 보기에 지금 두 사람이 딱 그렇소이다. 한복을 차려 입은 소라 씨와 료코,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두 사람과 함께 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멋진 생활이 따로 없을것이오. 좌에는 소라가 있고, 우에는 료코가 있는데, 더 이상 부귀영화를 쫓아서 무얼 하겠소? 물 한 모금만 마시고 살아도 그저 배부르고 행복하게 살것 같소이다.
”
“정말요?”
“당연하오.”
무언가 있어 보이게끔 고사를 좀 섞어 말했더니 소라가 곧장 생긋 웃어보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물어왔다.
“그래도 말해보세요. 둘 중에 한복은 누가 더 잘어울리죠? 저? 아니면 료코 씨?”
우주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그게 또 그렇게 되오?”
“궁금하니까 그렇죠.”
우주는 잠시 침묵. 짖궂은 질문을 하는 소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속으로 진땀을 뺐다.
‘또다시 짬뽕이 좋냐 짜장이 좋냐 같은 선택을 하란 말인가!’
두 여자를 양쪽에 끼고 살면서 이런 질문 만큼은 항상 곤혹스러웠다. 한쪽을 선택하면 한쪽이 토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자신과의 관계는 둘째치고 료코와 소라, 이 둘 사이에 금이 가게 하는 것만은 절대로 피해야 했다.
여자들끼리 한 번 앙금이 생기면 그것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려놓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하지만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가 해결할 수 있었던건 아니고, 소라가 갑자기 방긋 웃으며 자신감에 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나일테니 들으나마나 일까? 들어봤자 료코가 삐질테고.”
우주의 귀가 솔깃했다.
“오늘은 특별히 료코를 위해 듣지 않겠어요. 료코는 우주 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오직 이 날만을 기다려왔을테니까요.”
이어 방안에 있는 료코를 가리켰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소라가 그녀에게 다가가 치마 저고리를 살며시 매만지며 우주를 보고 말했다.
“어때요? 내가 골라준건데.”
“너무 예쁘오. 료코와 무척 잘 어울려서 눈 둘곳을 모르겠소이다.”
“눈이 부신단 말이예요?”
“그렇다오.”
“(서방님...)”
자신을 훑어보는 우주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료코는 부끄러움으로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소라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와서 만지고 싶죠?”
“음, 뭐...”
그때까지 우주는 방안에 들어올 생각도 못하고 복도에만 서 있었다. 아니. 방안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평소의 료코와 전혀 분위기가 달라 감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조금은 긴장이 되고 떨렸다.
소라가 장난스럽게 그를 보며 말했다.
“저 가고 나서 둘이 이상한 짓 하면 혼날줄 알아요.”
그 다음 료코를 보며 강조했다.
“(혹시나 달려들거든 완강하게 거절해. 알았어? 나중에 와서 확인할거야.)”
“(내, 내가 어찌 감히 서방님을 거부하겠느냐.)”
료코는 이렇게 말하고는 속마음을 내비친 자신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이에 소라가 눈썹을 찌푸리며 확실히 다짐을 받아내야겠다는 찰나, 우주가 짐짓 모르는 체하고 선비처럼 굴며 뒷짐을 졌다.
“이상한 짓이라니. 소생이 무슨 이상한 짓을 한다고 그러는게요? 곧 손님들 올시간이라 바빠죽겠구만. 어험!”
소라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고 말죠.”
그러고는 복도로 걸어나온다. 우주를 마주보고 서더니 눈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빙긋빙긋 웃었다.
“말해줘요. 날 사랑한다고. 료코 씨 앞에서.”
우주는 평소 그런 말을 입에 담기가 낯간지럽고 쑥스러웠지만, 이번 만큼은 달랐다. 그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오.”
“당연하오가 아니고요.”
“사랑하오.”
“한 번 더.”
“사랑하오.”
소라가 밝게 미소짓는다. 고양이처럼 눈꼬리가 올라간 눈은 스모키 화장을 해 더욱 섹시해보였다. 우주가 문득 든 생각이, 그녀와 배우 한예슬이 언뜻 닮은 것 같았다. 물론 예쁜걸로 치자면 소라가 더 예쁘지만.
“전 손님들이 오기 전에 이만 나가봐야겠어요. 여기 먼저 와 있는 걸 알면 다들 이상하게 여길테니까요. 좀 늦게 올테니 그렇게 알고들 계세요.”
“늦어도 7시까진 와주길 바라오. 같이 식사를 해야 하니까.”
“그럼 7시까지 올 수 있게 인사해줘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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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