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소라가 시선을 들었다.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는 그녀를 보며 조소하듯 옅게 웃었다.
“(어떻게 그리 쉽게 맹세를 할 수 있지? 사람의 앞날은 어찌될지 몰라. 아무리 부부 사이라 해도 자신의 인생을 그처럼 간단하게 단정짓지 않는게 좋을거야. 너무 성급하게 굴다가 한순간 배신당하고 버림받으면 어쩌려고 그래? 요즘 이혼하는 부부가 얼마나 많은줄 아니? 믿음이 평생갈거라고 생각해?)”
료코가 노려보며 재빨리 그녀의 말을 받았다.
“(서방님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야. 네가 그분의 성품에 관해 잘모르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소라는 콧방귀를 꼈다.
“(나도 여자이니 여자의 마음을 아주 잘 알지. 평생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이 필요할거야. 하지만 충고하건데, 네가 상하관계가 아닌 진정 연인으로서 사랑받고 싶다면 앞으로 일생을 바친다느니 하는 말은 절대 입밖으로 꺼내지마. 특히 우주 씨처럼 옛날 남자 앞에서는 더더욱 하지마. 그게 당연한 줄 알거든. 남자에게는 약간 거리를 두고 서둘지 말아야 해. 그의 성품이고 뭐고 그저 좋다고 모든걸 섣불리 다 줬다가는 금세 지루해하고 쉽게 널 떠날꺼야. 다시 만나봐야 별볼일 없다고 여기겠지.)”
“(그건 네 주장일 뿐, 오히려 난 너처럼 셈을 세는 여자를 만난 서방님이 불쌍할 따름이다.)”
“(아, 그러셔. 그럼 나도 너처럼 일생을 바친다는 각오로 우주 씨를 만나야 만족하겠어? 세상 모든 여자가 그러길 바래?)”
“(난 내 주장을 타인에게 강요한 적이 없다. 그저 이 몸은 어차피 서방님의 것. 그 분께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시든 그 분의 생각에 순종하며 따를 것이다. 그것이 비록 내게 해가 된다고 해도.)”
“하...”
소라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이 꽉막혀서 답답하다는 눈빛으로 료코를 쳐다봤다.
“(순종하며 따라? 하하. 누가 들으면 아주 포복절도하겠다. 세상에 멍청한 년이 따로 없다고 흉볼거라구.)”
“......”
료코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다 돌연 쏘아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못된 계집이 맞군.)”
“(난 현실을 바라볼 뿐이야. 못된 계집이란 말은 하지말지 그래?)”
“(서방님을 계산적으로 대할 생각이라면 여기서 그만 두거라. 넌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게 아니다. 서방님이 여태 속고 계셨단걸 확실히 깨달았어. 이 요망한 계집 같으니.)”
료코는 분한듯이 말을 뱉고는 주방을 나와 성큼성큼 방으로 향했다.
그 등에 대고 소라가 소리쳤다.
“(기다려! 난 계산적으로 대한게 아니야! 난 그저.)”
소라는 침을 한번 삼킨 뒤, 모기소리보다 작게 덧붙였다.
“(내가 먼저 상처받기 싫을뿐이야.)”
료코가 천천히 돌아보며 고개 숙인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왜 꼭 헤어질거란 생각만 하는 것이냐?)”
“(영원한 사랑은 없어. 드라마나 영화 전부 거짓이야.)”
“(그럼 잘됐구나.)”
“(뭐가?)”
“(앞으로 서방님을 만나지 말거라. 그럼 배신 당할 일도 없지 않겠느냐? 그렇게 사랑을 믿지 못하겠다면 죽을때까지 혼자 살거라.)”
“(그건 싫어.)”
“(어째서?)”
“(외로운건 싫으니까.)”
료코는 코웃음을 치며 짓궂게 말했다.
“(흥. 약해 빠진 주제에 욕심만 가득찬 계집이군.)”
“(뭐라해도 좋아.)”
소라는 힘빠진 얼굴로 침묵을 지키다 겨우 입술을 뗐다.
“(우주 씨가 너도 사랑한다고 말하든...?)”
료코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
“(나쁜 새끼네...)”
“(서방님을 험담하지 말거라. 옛부터 힘있는 사내대장부일수록 많은 첩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라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와 내가 살을 섞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야?)”
료코는 주먹을 불끈 쥐며 힘차게 말했다.
“(일단은 서방님의 생각이 그러하고, 네게 주는 사랑만큼 날 따뜻하게 대해준다면 아무 불만이 없다. 하지만 부인간에도 서로 서열은 있어야겠지. 그것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내가 무조건 첫째부인이다!)”
그런 료코의 모습에 소라는 어이없어서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머릿속에서 우주를 떠올렸다.
‘신우주 나쁜 자식. 설마 나랑 료코를 마누라로 둘 생각이었나? 어떻게 마누라를 두 명씩이나 둘 생각을 했지?’
물론 그렇다고 하여 우주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100여년 전 사람이다보니 일부다처제를 당연하듯 여기는 료코와 같은 생각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무엇보다 우주는 놓치기 아쉬운 남자였다. 그는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앞으로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남자였다.
소라는 료코를 보며 히죽거렸다.
“(일부다처제? 웃기지 마. 요즘 세상에 그런짓 하다가는 아마 구속될걸?)”
“(바보같군.)”
료코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체념한 듯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을 생각에 방문을 닫기 전 말했다.
“(상식을 따진다면 사랑은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너처럼 생각한다면 단연코 영원한 사랑은 없을테지. 모두 현실의 벽에 부딪힐게 아니겠느냐? 그리고 네 말을 잘 생각해보면, 현실을 핑계로 사랑조차 제대로 못하는 겁쟁이로도 보이는 구나. 드라마나 영화의 판타지를 비웃기 전에, 그런 사랑을 시도조차 못하는 널 한심하게 여기거라. 꿈도 낭만도 없이 현실에 찌든 여자 같으니.)”
철컥.
방문이 닫혔다.
“......”
료코가 사라지고나서 소라는 거실에 멍하니 서서 희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이 왠지 한방먹은 기분이 들었다. 료코의 말이 강제로 귀에 쑤셔 넣어진 것만 같았고, 그 때문인지 머리와 가슴에서 반발이 심했다. 뭐라고 대꾸하고 싶어도 변명처럼만 생각되어져서 분하고 또 분했다.
“그런 소린 나도 할 수 있어. 씨발년...”
소라는 당장 집을 박차고 나갔다. 엘리베이터도 타지않고 마구 뛰어 내려갔다. 밑으로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는 시간조차 기다리기가 싫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다가는 료코가 뒤쫓아올 것 같았다. 정신없이 뛰다가 한번 계단을 구르기도 했지만, 이렇다할 아픔은 없었다. 참고로 그녀는 수라다.
“꼴도 보기 싫어!”
자신을 가르치는건 아버지면 충분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난 자신을 그 누가 가르친단 말이냐? 오히려 자신이 가르치면 모를까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혼자 오십니까?”
씩씩거린 채, 혼자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그녀를 보고 창성이 물었다.
“료코는 안온답니, ...!?”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크게 놀랐다.
그녀의 찢어진 스타킹에 흙 묻은 정장, 그리고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
딱 봐도 료코와 다툰 것 같았다.
‘아마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싸우지 않았을까? 어쨌든 조심해야겠군.’
상사의 화풀이 창구는 언제나 부하직원이기 마련.
그 화가 자신에게 옮길까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회, 회사로 가시겠습니까?”
“됐어요. 집으로 갑시다.”
소라는 무심하게 그런 말만 뱉고 차에 올라탔다.
창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 때문에 싸운거람. 거 좋게좋게 지내지. 어차피 한가족이 될거면서.”
부우웅.
소라가 탄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아파트 정문을 통과했고, 그 앞 도로로 쭈욱 미끌어져 나아갔다.
얼마 안지나 새 기모노로 갈아입은 료코가 황급히 주차장으로 뛰어내려왔다.
한 손에 세키가하라를 쥔 채 주변을 급하게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
소라와 그녀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료코는 혀를찼다. 그리고 분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으로, 여왕의 옥좌에 앉아 거만하게 웃고있는 소라를 떠올렸다.
“(속좁은 계집 같으니라구!)”
***
수라라는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당시 그들은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TV, 인터넷, 신문 등 각종 매체에 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며 새로운 인류가 탄생했다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했다.
수라들은 하나같이 인류보다 우세했고, 인류는 열세했다.
“그 옛날 백인이 흑인 노예를 부리던 것처럼, 우린 수라의 노예가 될지도 몰라! 저놈들이 귀족행세를 하며 우리를 지배하려 들거야! 절대 저놈들을 단합하게 만들어서는 안돼!”
이러한 심리적 불안감은 사회적 편견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초창기 몇몇 수라는 정서적 불안에 의해서 사회 문제를 야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수라 새끼들을 조심해! 하나 같이 옷속에 칼을 숨기고 다니고 있어! 놈들과 시비라도 붙었다간 칼빵 맞는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노골적으로 수라를 적대시 하는 무장집단까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인류의 방패(Shield for Mankind).
줄여서 SFM이라고 부른다.
SFM의 지도자 아즈바디르 슐라만은 중동의 석유 재벌이었으며, 그는 지능이 뛰어난 수라에 의해서 개발된 대장균에서 휘발유가 만들어지는 신기술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자칫하다가는 중동의 오일머니가 끊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국의 NASA는 EM드라이브라는 획기적인 기술까지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전자기파를 이용하여 동력을 발생시키는 이 기술은, 기존의 엔진들과 달리 화석연료나 원자력 따위가 필요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석유 국가의 수장들과 연합하여 SFM을 만들었다.
대내외적으로는 반인륜적 행위를 일삼는 수라를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세상에 알렸고, 이는 즉시 실행되어졌다.
SFM에 소속된 구성원들은 전세계 곳곳에서 암암리에 활동하며 수라를 극도로 차별했고, 날이 갈수록 왠만한 테러집단보다 더할정도로 악질적인 무장집단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에 반해 수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인류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전세계 각 국가는 그들의 필요성을 점점 깨닫게 되었고, 국민들 또한 그들을 점진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수라는 기술의 혁신을 가져왔으며, 군인 50명이 할 몫을 단 한 명이 해낼 정도로 신체적 능력도 뛰어났다.
그들 덕분에 일반 군인 수가 줄어들자 자식을 가진 부모로서는 당연히 환영했다. 특히나 징병제 국가에서는 더더욱 쾌재를 불렀다.
게다가 그것말고도 각종 건설현장에서도 300kg이나 되는 건설 자재를 쑥쑥 들어올리는 수라야말로 건축 예산과 노동 시간을 대폭 줄여주는 효자나 다름없었다. 그들과 같이 일하는 노동자들은 수라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적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SFM은 수라를 극도로 혐오하며 각 나라마다 비밀리에 지부가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소수 인원이 중동의 SFM수장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며 Shield for Mankind Korea 지부가 생겨났고, 한국 사람들은 이를 범죄집단 SFMK라 불렀다.
SFMK의 수장은 추만택이라는 자였다. 그는 한때 사이비 종교를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SFMK을 세운뒤 그때부터는 전국을 뛰어다니며 애먼 수라들에게 무차별적인 테러를 가했다.
그러나 추만택이 이끌던 SFMK는 5년 전 한국 정부가 대대적으로 주도하는 테러집단 소탕 작전에 의해 완전히 토벌되었으며 수장인 추만택은 교도소로 이송돼 수감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
마침내 추만택이 풀려났다.
정신을 못차린 그는 기존 동료들을 끌어모아 재차 SFMK를 결성했다. 포기하기에는 이런 일밖에 모르는데다, 중동 SFM본사에서 쥐어주는 돈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추만택은 제일 먼저 수라를 고용해 돈을 버는 국내 기업들을 타겟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한국 10대 기업부터 목표로 정하고 1순위 기업부터 서서히 공략해 나가던 중이었다.
“헐헐. 이년 참 못된 년이구만? 어떻게 개만도 못한 수라한테 이렇게 많이 주는거징? 신우주란 시키가 900억? 지랄 자빠지고 있네. 수라한테 줄 돈 있으면 이 나라 실직자나 챙기라지 개씨불놈들. 이 나라는 어쩌다 이 꼬라지가 된건감? 감옥에 있는 동안 세상 참 많이 변했네. 헐헐.”
정수리와 앞머리는 다 벗겨지고 옆머리만 남은 대머리 추만택.
50대인 그는 도로에 정차되어 있는 차 뒷좌석에 타고 있었다.
열이 솟은 나머지 들고있던 한소라의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곧 그의 부하들을 향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곧 한소라가 탄 차가 이 부근을 통과할거당. 실망시키지 마랑. 알았제?”
-예!
-알겄습니다요!
조수석에 탄 부하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 도심 한가운데서 시끄럽게 굴면 경찰이 곧바로 출동하지 않겄습니까?
“야이 씨불놈아 걱정말라고 몇번이나 말했냥. 다 믿는 구석이 있응게 납치하면 찍어준 골목으로 얼렁 데려가서 냅다 넘겨부리라공. 알았제? 그리고 넘기기는 하되 결코 집어던지지는 마라잉. 중동님께서 그뇬한테 서비스 한번 받고프다 하셨응겡 몸 상하면 절대 안된당. 잘만 해주면 어마어마한 대금이 들어올거시니 명심하공.”
추만택은 말을 마치고 난뒤, 꽤나 흡족한 얼굴로 옆자리에 놓인 '지하드'를 어루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