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게다가 러시아는 참으로 치밀하게도, 신우주 납치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파워드 슈트 불곰을 비롯해 이번 작전에 가담한 요원들의 슈트에도 알로샤 소냐라는 기업 로고를 새겨넣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한국 정부가 증거품으로 입수한 불곰의 잔해에도 알로샤 소냐라는 기업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러시아는 비록 납치에 실패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알로샤 소냐의 회장은 보리스에게 저항하는 인물이었고, 보리스는 이 사건을 빌미로 정적을 제거했다.
그 즈음해서 한국은 결국, 러시아 제재에 관한 안보리 회원국들의 만장일치 성명을 얻어내지 못하며 국제사회로 까지 알려졌던 신우주 납치미수사건이 소강상태를 보이며 순식간에 일단락 되는듯 해보였다.
이세종 대통령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지만, 한편으로는 그 정도면 됐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신우주 납치미수사건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서 러시아를 비롯해 다른 국가가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일을 꾸미지 못하도록 경각심만 확실히 일깨워 줄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만족했고, 또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적당한 선에서 그치며 미국과 일본을 경계해야하는 한국 입장으로서는 중국과 더불어 러시아도 필요했기에 그들에게 등을 돌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러시아는 적이면서도 우방국이었다. 이것은 실로 복잡한 국제관계였다. 북한이 사라진 이상 미국이 지원하는 일본이 한반도의 골칫거리로 대두되는 그런 시기였다.
심지어 일본의 나베 신쥬 총리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시, 일본이 한반도의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무조건 자위대를 파견하겠다는 그런 괴상한 논리를 지껄이기도 했었다.
따라서 국방력을 키워야만 했다. 일본 전투기가 미제라면 한국은 러시아제를 써야했다. 전략적인 면을 위해서라도 경쟁 국가와 똑같은 무기는 취급할 수가 없었다.
최근 일본 정부는 10조원 이상을 들여 최첨단 전투기 42대를 도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게다가 중국 또한 젠31을 자체 개발 중으로 양국 모두 스텔스 기능이 있는 전투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스텔스 기능이 탑재된 전투기가 단 한대도 없다. 상황이 그러하니 일본과 중국, 두 나라와 마찰이 있을 때 국익을 지켜줄 믿음직한 전투기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이세종 대통령은 러시아의 수호이 전투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애당초 러시아는 2000년 이전 이루어진 FX사업의 1, 2차 구매 전과정을 지켜보며 미국 보잉사 제품만 무조건 구입하는 한국에 실망하고, 그 후 3차 사업에서의 입찰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2004년 레지스트 쉴드라는 변수가 생기며, 북한이 사라지고 미국과 한국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면서 한국은 갑작스레 탈미국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미국과 더불어 군수 산업의 양대산맥인 러시아는 아주 좋은 파트너였다.
이세종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마찰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을 생각에 보리스 대통령에게 핫라인으로 연락했다.
“이번에 신형 전투기를 도입하려는데, F-15SE와 유로파이터 타이푼, F-35A, 3기종 전부 성능도 안좋고 가격도 좀 마음에 안들더군요. 러시아산 전투기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저 셋보다 가격이 싸겠지요?”
한국 정부의 FX 전투기 사업은 무려 17년에 걸친 대장정 프로젝트다. 1993년 차세대 전투기 120대 도입계획 발표 이후, 90년대 후반 IMF로 인해 2010년에야 비로소 60대(1대추락으로 재구매)를 도입완료했다.
1~2차 FX 사업으로 120대의 차기 전투기 중 60대를 도입한 한국은 나머지 60대를 또 사들이기 위해 3차 FX 사업을 진행했다.
그동안 미제 전투기를 구입해왔다면 남은 60대는 러시아제로 구매할 요량이었다.
-{물론이지요. 잘하면 더욱 싼 가격에 맞춰드릴 수 있을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기회에 미제를 싹 다 버리시고 우리 러시아제로 갈아치우십시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요.”
현재 개발이 완성되고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진 전투기는 모두 기존 광물자원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다. 전세계 어느나라든지, 한 국가에서 레지스트 쉴드에서 얻은 자원을 이용해 만든 무기로 기존에 쓰던 육, 해, 공군 무기를 전부 교체하려면 앞으로 수년에서 수십년은 걸릴일이었다.
막대한 정부 예산이 들기 때문이다. 1960년대 쓰던 전투기가 2010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한반도의 주력 전투기인것처럼 한 국가에서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겠다는 것은 재정면에서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기업이 제 스스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레지스트 쉴드 안으로 들어가서 성능테스트를 하는것과는 규모면에서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게다가 2004년에 레지스트 쉴드가 발생했고, 그로인해 신 광물자원이 넘쳐난다 하더라도 전투기 개발 능력을 갖추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가 단 7년만에 새로운 기종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것도 아니다. 전투기의 경우 기체 자체가 완성되어도 무장 장착/투하 시험에서 상당한 시간을 잡아 먹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은 베트남전 이전만 해도 이러한 과정들을 간략화 하거나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리하여 기체 오작동으로 실전에서 숨진 미군만 수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세종 대통령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알로샤 소냐 라는 기업은 참으로 괘씸합니다. 일개 기업 주제에 어찌 감히 우리 신우주 군을 납치할 생각을 다 했답니까? 게다가 하마터면 러시아 정부에서 그런줄 알고 오해할뻔 했잖습니까. 우리 양국의 우호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렇게나 굳건한데 말입니다.”
-{합당한 말씀이십니다. 추후 양국 동맹까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러시아는 전투기를 수출하게 되면서 큰 돈을 벌어가는데다, 아시아에서 한국을 이용해 미국을 견제할 수 있어 좋고, 한국은 일본을 견제해서 좋고, 두 나라 간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졌기에 신우주 납치미수사건을 뒤로 하고 이러한 거래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
미라가 우주를 납치한 다음날.
소라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회사 관계자들이 면회를 와서 병실 앞이 북쩍거렸고, 의사가 나서서 일시적 과로로 인한 기절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설명하고 나서야 사람들이 제각각 안심하며 돌아갔다.
소라는 정오가 되어서 눈을 떴다.
창가에 비치는 햇살은 너무나 밝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간호사로부터 전해들은 창성이 노크를 한 뒤 들어왔다.
그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소라는 이야기를 다 전해듣고 나서 분한듯 입술을 곱씹었다.
“강미라 그년이 그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줄이야. 실력에 비해 싸다고 사왔더니 역시나...!”
소라를 오랫동안 보좌해왔던 창성으로서는 병실에 더 있다가는 괜스레 피해를 볼까 무서웠다.
퇴원 수속을 핑계삼아 서둘러 병실을 나서기 전 그녀에게 말했다.
“료코 말입니다. 오늘 새벽부터 병실 복도에 머물며 본부장님이 깨어나시기만 줄곧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여보낼까요?”
“들여보내세요.”
창성이 병실을 나간뒤, 잠시 후 료코가 안으로 들어왔다.
밤새 잠도 못잤는지 그녀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입고 있는 기모노는 지난밤 강미라와의 격전을 말해주듯 지저분하고 너덜거렸다.
그 초라한 모습을 보고 평소 료코를 상당히 경계하던 창성이 별말없이 순순히 들여보내줄만했다. 그녀에게서 전 같은 살기나 기백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기력조차 없는 듯, 그녀의 눈동자는 풀려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에 힘이들어가며 소라에게 말했다.
“(너.)”
료코가 난데없이 반말을 하자, 소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
“(그래 너.)”
“(너라니, 예의가 없네요? 우리 예의 좀 지킵시다?)”
소라가 콧방귀를 뀌며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마치자, 료코가 갑자기 성을 내며 대꾸했다.
“(자존심을 굽혀가면서까지! 너한테 도움을 청했건만 오히려 너때문에 일을 그르쳤다! 네가 고른 그 계집 때문에 말이야! 도대체 일을 어찌 하는 것이냐!)”
“......”
료코는 씩씩거리며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소라는 그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도 말이 없었다. 아니, 할말이 없었다.
“(나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면서 그럼 여긴 왜 왔어요. 단순히 화만 내려고 온거에요?)”
“(찾아내.)”
“(우주 씨 말이에요?)”
“(그렇다. 끝까지 책임을 지란 말이다.)”
“(그거야 당연한거구요. 그럼 그 말하려고 온거였네요? 알았으니 이만 가보세요. 당신보다 더 열심히 찾을 생각이니까 안심하시구요.)”
“(멋대로 날 내쫓지 마라. 나도 여기 남아있을 것이다.)”
소라는 계속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일을 그르쳐서 절 못믿는거 아니었어요?)”
“(분하지만 네가 가진 장비를 이용해 찾는 것이 더욱 빠를 것이다. 어제 했던 것처럼 하늘을 나는 것을 다시 태워줘. 그걸로 서방님을 찾으러 다니겠다.)”
여담이지만 소라는, 료코가 서방님이란 뜻으로 단나사마를 사용하는지 전혀 몰랐다. 서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는 단나사마란 단어를 그저 주인님으로 알아 듣고 있었다.
료코의 말을 듣고나서 소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료코를 잠시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싶었다.
그리고 이내 옷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하긴 우주 씨를 빨리 찾으려면 하나라도 더 있는게 좋겠지. 다른 녀석들 써봐야 돈만 들고 당신은 공짜라는 메리트가 있긴 하네. 좋습니다. 같이 찾아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료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옷을 갈아입을 모양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소라의 오피스텔에 들렸다.
창성에게는 주차장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료코만 데리고 집으로 올라갔다.
집에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식사를 차려놓고 있었다.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이후로 계속 빈 속이었던 소라가 미리 연락해서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그 쪽도 빈 속일텐데, 같이 드시죠.)”
소라는 집주인으로서 당당하게 료코에게 식사를 권했다.
료코는 말없이 식탁에 앉았다.
그러나 수저 들기를 주저하며 소라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보다못한 소라가 한마디 했다.
“(독이라도 탔을까봐서요?)”
“(왜 내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지?)”
“(먹고 기운차리라는 것 밖에 별뜻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운이 나야 우주 씨를 찾지 않겠어요?)”
“......”
그 말이 통했는지 료코는 별말없이 수저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뒤 각자 샤워를 했다.
료코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소라가 자신의 옷을 건네며 거실 탁자에 올려진 기모노를 가리켰다.
“(저 옷은 지저분하니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부정타게시리 네 옷을 내가 왜 입는단 말이냐. 당장 저리 치우거라.)”
소라는 화나려던 것을 꾹 참고 웃으며 말했다.
“(기모노는 지저분한데 뭐 입게요? 설마, 다시 입으려고요?)”
“(다시 입을 것이다.)”
“(참 나.)”
소라는 기 막혀 하며 한참을 료코와 실랑이를 벌였다.
소라는 기모노 대신 자신이 준 여성복을 입으라 강요했고, 료코는 입기 싫다며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끝내 료코를 갈아입히는데 성공했다.
“(예전에 우주 씨가 이 옷을 입은 제 모습을 보고 반했었죠.)”
“(그게 정말이냐? 나도 입어 보겠다. 얼른 줘보거라.)”
료코는 빼앗듯이 받더니 하나씩 몸에 걸쳤다.
검은색 정장 바지와 자켓, 안에는 하얀 셔츠. 옷을 다 입은 모습은 영락없이 여성 수행원처럼 보였다.
소라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음흉하게 웃었다.
‘후후, 같이 다니면서 나보다 돋보여서야 되겠어? 수행원 쯤으로 보이면 충분하지.’
이 후 두 사람은 제네틱스 본사로 향했다.
그런데 본사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왠 승합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급정거를 하며 달리던 차를 막아세웠다.
창성이 나가 따지러 간 사이, 에쿠스 뒤에 멈춰 서있던 차에서 왠 사내들이 줄줄이 뛰어내렸다.
앞차에 가 있던 창성은 뒤늦게 눈치를 챘지만 뒤로 달려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앞차에서도 열댓명의 사내들이 화염병과 야구 방망이를 들고 뛰쳐나오며 창성을 공격했다.
“쪽바리 기업 제네틱스는 당장 이 땅에서 꺼져라!”
“뒈져버려 한소라!”
“이 썩을년! 왜놈들한테 존나 대줬지!”
일본 자본이 섞인 대기업을 극도로 혐오하는 강경주의자들이 소라가 탄 에쿠스를 앞뒤로 막고 습격하려던 찰나였다.
그때 료코가 차에서 잽싸게 뛰쳐나오며 소라가 차안에서 꺄악 거리는 동안 아홉 명이나 되는 그들을 단숨에 제압했다.
때마침 창성도 앞차의 적들을 싸그리 때려눕혔다.
료코는 묵묵히 칼집에 세키가하라를 꽂아 넣고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듬직한 눈빛으로 소라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다친데는 없느냐?)”
“(신경쓰지마세요. 제깟놈들이 뭘하겠다고, 병신같은 놈들이.)”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쌌다. 춥기라도 한듯 몸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료코는 그 모습을 힐끔보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큰둥하게 말했다.
“(서방님을 찾을때까지 죽지 말아라. 널 살린것도 그때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