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지스트 쉴드-29화 (29/285)

29화

‘치. 운동 좀 했나보네.’

코웃음 치며 다음으로 시선에 들어온 것은 료코의 오른손에 쥐어진 일본도였다. 하지만 곧바로 시선을 떼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가구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또 구석 한켠에는 고이 잘 접어놓은 기모노 위에 포장을 뜯지 않은 여성용 속옷과 버선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좁은 방에서 그녀의 옷장은 방바닥인 것 같았다.

료코는 방바닥에 무릎꿇고 정자세로 앉으며 그 옆에 일본도를 차분히 내려놓았다.

소라가 마주보고 무릎을 꿇었다. 창성 또한 그 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을 꿇고 손님을 맞이 하는 것은 일본인들의 전통적인 문화였다. 여기에 다과상을 내온다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지겠지만 지금 료코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인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주인님?)”

소라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 했다.

‘같이 살면서 이러고 놀았구나, 변태들.’

소라는 애써 비웃음을 참아가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은 우주 씨가 아니라 료코 씨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순간 료코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소라는 그 기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100여년 만에 깨어나셔서 많이 혼란스러우실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료코 씨를 좀 도와드릴까 하는데, 원하신다면 괜찮은 집과 일자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료코는 허리를 피고 꿋꿋이 정자세를 유지하면서 점잖게 못을 박았다.

“(저와 관련된 모든 일은 주인님과 상의해주십시오.)”

“(어째서죠?)”

“(예로부터 주군이 자리를 비웠을때, 누군가와 자신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가신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배반이나 반역의 모양새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소라가 엷은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우주 씨는 당신의 주군이 아닙니다. 게다가 여기는 궁궐이 아니예요.)”

“(그렇지만 현재 저를 보살펴 주시는 주인님 이십니다. 그러니 주인님과 먼저 상의를 하신 후 그 뒤에 저를 만나주십시오.)”

소라는 기가 막혀서 잠시 말이 안나왔다. 이 여자 너무 꽉 막힌 여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렇다. 신우주처럼 100년을 잠들었다 깨어난 사람일테니.

한편, 료코는 소라를 경계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보는 사람이 무작정 집으로 찾아와서 일자리를 소개시켜준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봤자 달콤한 말만 주구장창 해댈 것 같았다. 여자의 감이다. 자신보다 세상을 조금 더 잘 아는 우주의 의견이 필요했다. 그가 직접 이 사람을 만나본 뒤 그의 입을 통해서 듣는편이 이야기에 더욱 신뢰가 갈테니까.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주시지요.)”

“(한푼, 두푼 버는게 아니라 단기간에 태산처럼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소라의 말에 료코가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고 대답했다.

“(돈에 욕심은 없습니다.)”

“(예쁜 옷이나 가방, 화장품도 사야할텐데 필요없습니까?)”

“(제게 필요한 것은 주인님께서 그때마다 사주십니다.)”

“(이렇게 집에서 매일 놀기만 하실겁니까?)”

“(사람 몫은 하고 지냅니다.)”

“(독립하고 싶지 않나요?)”

“(이곳이 편합니다.)”

소라는 되도록 온화하게 말을 주고 받고 하였으나, 그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점점 속에 화가 끓는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눈치 챌 수 있었다.

마음을 꽉 닫아놓은 것이 이 여우같은 계집애가 일부러 이런다고.

소라의 분위기를 눈치 챈 창성이 시계를 보는 연기를 하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본부장님. 약속 시간에 늦으실 것 같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았어.”

창성의 말에 무심코 대꾸하며 소라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시간을 들일걸 너무 무작정 들이댔나. 하지만.’

료코를 영입하는 것보다 우주가 동거하는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다는게 더욱 큰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사전에 다음은 없다. 일단 시작했으면 얻어가는 것이라도 있어야 했다. 바쁜 시간 쪼개면서까지 와서 괜한 헛수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결심한 그녀는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료코 씨, 우주 씨와 헤어져 주십시오.)”

짐짓 부드럽게 제안하는 소라. 그녀의 눈빛에서 조금씩 독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필요없으면 바로 내치는 것이 그녀의 본성. 소라의 웃음이 점점 그늘을 띠어가며 눈빛에 싸늘함을 더했다.

“(우주 씨가 여성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면 그에게 해가 될 것입니다. 부디 이 집에서 나가 주십시오.)”

료코가 지긋이 눈을 감는다. 대화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 얼굴에 지금껏 없던 동요를 보였다. 저도 모르게 끓어오른 분노와 굴욕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나름 애쓰는 듯 했으나 입술을 한번 꾹 다물고 나서.

료코가 순간 칼집을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례하다!)”

동시에 창성도 가슴팍에서 재빨리 권총을 꺼내고 그녀를 겨누며 일어났다.

“움직이지마!”

료코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야무지게 소라를 노려보면서 꾸짖었다.

“(헤어지라니 어디서 감히 그딴 말을 내뱉는 것이냐! 내 비록 의지와 상관없이 신진루이에게 능욕 당한 적은 있어도 마음 만큼은 절대 내준적이 없다! 난 결코 그 녀석의 애인이 아니야! 사정을 똑바로 알고 지껄이거라!)”

소라가 작게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그랬나요? 집에서 주인님, 주인님 하며 알콩달콩 잘들 놀고계시는 것 같던데.)”

그녀는 살기를 내뿜는 료코와 당당히 마주 섰다. 그 등 뒤, 소라의 어깨 너머에는 창성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료코의 얼굴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그것은 살기 위한 일시적 수단일뿐, 녀석을 죽이겠다는 마음 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없다!)”

“(아, 그런 꿍꿍이가 있으셨어요?)”

소라가 비꼬는 듯이 대답하자 료코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점점 기세를 더했다.

“(네년이 내뱉는 말은 더 듣기 싫으니 당장 이 집에서 나가거라! 계속 버티고 막말을 퍼붓겠다면 날 모욕한 네년을 이 자리에서 처죽여줄테다!)”

료코가 무섭게 칼을 빼들려고 하자 창성이 긴박하게 소리쳤다.

“(가만있어!)”

료코가 권총을 보며 잠시 멈칫했다. 그때 소라가 손바닥을 들어올리며 창성에게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침착하게 료코를 보며 말했다.

“(사귀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 둘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얼른 이 집에서 나가주도록 해. 당신 같이 무능한 여자가 신우주에게 빌붙고 있으니까 우리 회사가 그를 이용해 돈 벌기 힘들겠단 소리야. 알겠어? 이렇게 말해주니까 이해돼?)”

소라는 그 말만 남기고 주저없이 돌아섰다. 참고 있던 말을 퍼부어줬더니 가슴이 통쾌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집을 나섰다.

이어 창성도 계속 총을 겨눈 채 한발씩 천천히 뒷걸음질치다가 이윽고 현관문을 닫고 사라졌다.

두 사람이 돌아간 후 집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료코는 힘없이 칼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무릎을 감쌌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신진루이를 죽이기는 커녕 그의 애인으로 오해 받다니...!”

게다가 우주의 집에서 하녀 노릇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참 한심하고 처량하다고 생각했다.

실로 비참한 현실이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치욕을 당할 수 없다...”

그녀는 결국 큰 결심을 한 듯, 자세를 바꾸어 곧게 허리를 피고 무릎을 끓었다.

바닥에 떨어뜨린 칼을 주워 칼끝이 배를 향하도록 거꾸로 쥐었다.

“여긴 어쩐 일이오?”

“마침 할말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원룸을 나오던 소라는 입구에서 우연히 우주와 마주쳤다.

“아니 본부장님 아니십니까!”

그때 주차를 하고 온 철수가 그녀를 보자 꾸벅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이렇게 누추한 곳엔 어쩐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소라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잠시 우주 씨와 얘기 좀 할테니 피해주시겠어요?”

“아 예, 예, 그러겠습니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철수는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냅다 원룸으로 뛰어들어갔다.

“혹시 내 집에 들렸소?”

씁쓸한 의구심이 들어 우주가 먼저 물었다. 그녀가 정말 자신의 집에서 나온 것이라면 료코의 존재를 알았을 터. 그녀가 알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 몰래 다녀왔다는 사실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우주가 재차 물었다.

“내 집에 다녀온게 맞소?”

“예.”

“왜 내게 말도 없이?”

“여긴 보는 눈이 있으니 제 차로 가서 이야기 하죠.”

우주는 소라를 뒤따라서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에쿠스에 탑승했다.

창성은 차밖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먼 곳의 풍경을 바라봤다.

뒷좌석의 가운데를 비워두고 각각 창쪽으로 앉은 우주와 소라는 대화를 시작했다.

“료코를 만난게요?”

“네, 봤습니다. 예쁘던데요.”

소라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스타킹 신은 다리를 요염하게 꼬았다.

우주는 자연스레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멀리 떨어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서 무슨 말을 했소. 나처럼 회사에 들어오라고 했소이까?”

“했는데, 료코 씨가 완강히 거절하더군요.”

우주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줄 알았다는 얼굴이다.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고 저한테 왜 말 안했어요?”

“굳이 해야되오?”

“당연하죠. 제가 우주 씨를 관리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생활 정도는 알고 있어야죠.”

사전에 통보 없이 남의 집을 방문한 까닭에 우주의 표정은 내내 굳어있었다.

“필요성을 못느꼈소.”

“못느껴도, 앞으로는 여자가 생기면 꼭 제게 말해주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외다.”

“그럼 집에서 내보내세요.”

차창밖으로 향했던 우주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무슨 말이오?”

“여자친구가 아니라면 굳이 데리고 살 필요가 있나요?”

“그녀와 내 인연은 특별하다면 특별하오. 그리고 내 과거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소. 되도록이면 자립할 수 있을때까지 도와줄 생각이외다.”

소라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여유있게 말했다.

“집을 하나 얻어주시면 되겠네요. 돈도 많이 벌기 시작했으니까.”

“그건 무리요.”

“왜요?”

“그녀가 행여 나쁜 길에라도 빠져서 예전처럼 내 적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 또한 감당하기 어렵소. 곁에 두고 지켜보는 편이 제일 속편하오.”

“혹시 길들이는 중?”

소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주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인하진 않겠소. 그녀가 같은 일본인을 만나는 것도 사실 염려되오. 일부 일본인들의 속된 야망은 지금도 계속되고 전혀 반성할 줄 모르고 있소이다. 만약 료코처럼 수준 높은 실력을 가진 자가 일본의 우익 단체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것도 큰일이오.”

“그런 것도 알아요?”

우주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크음. 그간 일본에 대해서 나름 인터넷으로 조사해보았소. 매일 독도 관련 뉴스도 챙겨보고 있고.”

소라는 목소리를 한층 부드럽게, 달래듯이 친근하게 입술을 열었다.

“료코 씨 문제에 관해서 우주 씨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할일이 많아요. 이를테면 당신의 매력으로 회사가 더 많은 수익을 내야하는데, 전 료코 씨의 존재가 마음에 좀 걸리네요. 요즘 사람들은 짝이 있는 연예인이나 수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요.”

차안에서의 대화는 조금 오래갔다.

어느덧 노을이 지고 달이 비추고 있었다.

이윽고 우주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밖에서 내내 대기하고 있던 창성이 하품을 하며 다가왔다.

“이야기는 잘되었어요?”

“난 원하는대로 해줄 수 없소.”

우주가 시큰둥한 대답을 내던지고는 그대로 쑥 지나쳐 원룸으로 들어가버렸다.

“허어, 또 뭔일 일까...”

창성이 무심코 원룸 입구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자신의 업무도 아니고 상사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깊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쨌든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야기가 파투난 것 같았다.

창성이 조금 씁쓸하게 웃음을 짓고 운전자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룸미러로 뒷좌석을 들여다 보니 소라 역시 표정이 심상치 않다. 창밖으로 눈을 날카롭게 치켜 뜨고 팔짱을 낀 채로 간신히 화를 삭히는 모습이었다.

“어쩔까요? 신우주 없을때 제가 처리할까요?”

소라가 씩씩 거리며 즉시 대꾸했다.

“됐습니다. 괜히 또 그러다 회사 그만두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신우주가 야단칠꺼 뻔합니다. 에휴, 진짜! 고집도 저런 똥고집이 어딨어! 쪼잔한 자식!”

평소 그녀 답지않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조금은 신선했다.

창성이 소리 없이 웃으며 차에 시동을 걸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신우주란 남자는 대단하네요. 무서운 여자들 사이에서 기를 피고 사는걸 보니.”

곧 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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