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하나는 벼랑끝에 선 마음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이에 우주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걱정 마시오. 내 바람처럼 달려가리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꼭 불어주시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몇 번인가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던 그녀는 곧 떠났다.
같은 조에 속한 정철과 구인을 뒤따르는 하나는 마치 억지로 끌려가는 강아지처럼 울상을 짓고 저 멀리 사라졌다.
뒤이어 우주는 남은 팀원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숲길을 한 10여분 걷더니 준필이 걸음을 멈추었다.
“우주 씨는 저어쪽. 쩌어~기. 고개 넘어가서 매복해주심 되겠습니다.”
그가 꽤 먼 거리를 가리켰다.
그럼에도 우주는 담담하게 물었다.
“나 혼자서 가오?”
“예.”
준필이 방긋 웃는다. 그러면서 되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다른 사람들은 세 명씩인데 왜 나는 혼자요?”
“아, 그건 말이죠. 지금 우리가 세 명씩 짝을 짓다보니 현재 두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러다보니 우주 씨 한테는 정말로 미안해요. 혼자서 매복해주실 수 밖에 없겠습니다. 아셨죠?”
어차피 그놈이 그놈. 기대도 안했다. 김정철 무리들과 짜고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겠지.
“뭐, 알았소.”
더 이야기 해봐야 혈압만 오를테니 우주는 군말없이 매복장소로 향했다.
홀로 매복 장소에 도착한 우주는 FM처럼 움직였다. 등에 짊어진 배낭에서 접이식 야전삽을 꺼냈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한 1미터는 파내려갈즈음 이마에 구슬 땀이 맺혔다.
“후우~ 힘들군.”
땅을 다 파고 난 뒤에는 주변을 둘러보며 떨어진 나뭇가지를 좀 주워왔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위에 덮었다. 평평한 땅인 것처럼 완벽하게 위장을 한 뒤 총구만 밖으로 쏙 내밀고 사주경계를 취했다.
“뱀이나 벌레가 안기어다님 좋겠군.”
깜깜한 구덩이 안에 있으려니 제일 먼저 그 생각부터 났다. 매복할때는 뱀을 특히 조심해야한다. 100여년 전 자신의 동료도 지나가던 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
숲속은 고요했다.
근처에서 가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날때면 우주는 재빨리 시선을 옮기며 귀를 기울였다.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이 돌아다니는 소리였고, 그런 소리에 차츰 적응이되면서부터는 잡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탄을 죽이던 때를 떠올렸다. 바로 곁에 있는듯 생생했던 막내의 목소리.
환청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실감이 났고, 여동생의 목소리를 들은 직후부터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한 힘이 몸속에 흘러 넘쳤다는게 그 증거였다.
“이 레지스트 쉴드 안에 막내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어...”
그러고보니 그렇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막내 또한 신비한 힘을 가진 소녀였다. 더욱이 막내는 자신과 힘의 성질이 전혀 달라서, 거의 초능력에 가까웠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녀는 사람의 거짓말을 판별할 줄 알았으며, 손을 대지 않고 물체를 움직이거나 마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자유자재로 조절도 가능했었다.
“갑자기 화가나! 으아. 으아악! 꺄아아악!”
한때 남매를 못살게굴던 김상중 영감의 부인을 막내가 괴롭혔던 적이 있었다.
우주가 나서서 하지말라고 엄하게 혼을 냈지만, 그가 일본의 만행에 저항하기 위해 집을 자주 비우기 시작하자, 어느새 영감 부인은 안방에 끙끙 드러누우며 나날이 미쳐가고 있었다.
후에 집으로 돌아온 우주는 이것이 막내가 벌인 짓임을 깨닫고 김상중 영감을 찾아가 스스로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막내와 함께 김상중 영감댁을 떠나게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머릿속에서 유하나가 떠올랐다. 아주 절박하고 절실했던 그녀의 눈동자.
아무일도 없는 것일까?
저멀리 그녀가 매복해 있는 숲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를 쫑긋 세웠다.
아직 이렇다할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불량한 인간들과 한 조가 된 것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만약 호루라기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라면? 아니, 벌써 당하지나 않았을까?
불안한 생각이 잔뜩 엄습해온다.
“잠시 갔다와 볼까...”
아니다. 여간해서는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자신이 지키고 있는 이곳은 최전선이었다.
돌연변이 생물의 습격을 진즉에 알아차리고 동료들에게 무전으로 알리는 것이 자신의 임무다.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곳이 뚫린다면? 그 경거망동한 대가는 돌이킬 수 없이 커져서, 조직과 전술은 일순 대혼란을 겪게되고 자신을 믿고 후방에서 작업을 하는 동료들이 추풍낙엽처럼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막상 가보았더니 그녀의 신변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봐라. 자신의 실책은 쓰디쓴 아픔이 되어 평생 고통으로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주는 막중한 책임감과 윤리성 사이에서 갈등을 빚었다.
과연 유하나는 안전할까? 김정철과 유구인이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까?
수차례 자문해봐도 답은 뻔했다. 당연히 그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움직이자니 책임감이 그를 막아세웠고, 또 가만히 있자니 그의 양심이 결코 그것을 허락치 않았다.
그래서 무전을 해봤다.
“여기는 멧돼지 99. 13, 13, 13 들리는가?”
멧돼지 13은 유하나의 무전 호출명이었다.
치지직.
무전기에서 잠시 잡음이 들리더니 이내 응답이왔다.
[입감 양호하다. 무슨일인가?]
그녀의 목소리였다. 별다른 특이점을 찾아볼 수 없는 음색이었다.
우주는 내심 안심하며 말했다.
“그곳에서 뭔가 보이는게 있나? 여기는 이상없다.”
[여기도 별달리 눈에 띄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
“알겠다. 그럼 계속 수고 바란다. 이상.”
◆
하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은 쿵쾅거리며 요동을 쳤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녀는 바닥에 바로 누운 채로 정철에게 깔려 있었다.
정철이 그녀의 배위에 앉아서 하나와 우주의 교신을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다.
“99도 수고 부탁한다. 이상.”
협박에 의해 아무렇지도 않은척 하나가 무전을 끝마치자, 정철은 곧바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으며 날카로운 컴뱃나이프를 코앞에 들이댔다.
“흐흐, 잘했어.”
먹이를 눈앞에 둔 짐승이 침을 질질 흘리는 것처럼 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징그럽고 불쾌했다.
“살, 살려 주세요...”
“당연히 살려주지. 근데 말야 하나 쒸. 내가 화를 내긴 싫은데 말야.”
“꺄악!”
정철이 머리채를 꽉 움켜잡으며 윽박질렀다.
“내가 이거 모를줄 알았어? 앙?”
정철은 그녀에게서 빼앗은 호루라기를 잠깐 보여주더니 보란듯이 저멀리 휙 던져버렸다.
하나가 사시나무 떨듯 공포에 몸을 떨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철이 이내 미소짓는다.
“아, 미안 하나 쒸. 혹시 무서웠어?”
“흑흑...”
그녀가 흐느껴 운다. 눈물이 주르룩 흘러 내렸다.
“아 좀 울지말고 아무 말이라도 해봐. 울면 나 더 꼴린단 말이야.”
정철이 키득 거렸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그에게 있어 요염한 모습으로 다가왔고, 타이트한 슈트로 가려진 그녀의 몸매 또한 놰쇄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쥔 컴뱃나이프의 칼끝이 그녀의 목선을 따라 슈트를 찢으며 내려왔다.
내려오던 칼끝은 그녀의 가슴 윗부분에서 멈추었다.
검은색 슈트에 가려진 젖가슴이 두려움에 떠는 숨결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마치 자태를 뽐내는 듯이 출렁 거렸고, 동시에 정철의 바지속 물건도 함께 호흡을 하듯이 점점 성을 내며 발기되고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잖아? 하나 쒸는 남자 경험 없어?”
칼끝으로 젖가슴을 살포시 눌렀다.
놀란 하나가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막 끄덕였다.
“없, 없어요. 없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없어? 히히 아다였네 우리 하나 쒸는.”
불쑥,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엎드려 경계를 서던 구인이 말했다.
“안에단 싸지 마라. 기분 찝찝하니까.”
그의 입가에는 과자 가루가 잔뜩 묻어있었다. 또 하나의 비스킷이 그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우적우적, 쩝쩝쩝. 잘도 처먹어댔다.
그러고는 나무 아래에 누운 하나와 그 위에 올라탄 정철을 번갈아보더니 괜스레 웃어보인다.
“그냥 나 먼저 하면 안될까?”
“닥쳐 쉐꺄. 나보고 6차선 고속도로에 대고 또 하라고? 어림없으야. 남자 경험이 전무후무한 하나 쒸는 내가 먼저여. 이 부드러운 남자 김정철이가 상냥하고도 상큼하게 뚜러뻥을 해주어야 괴물 좆인 니 좆을 상대할때 별로 안아플거 아니겠냐. 그쵸? 하나 쒸?”
킥킥 웃어대던 정철은 이내 컴뱃나이프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하나의 목 아래에 멈춰 서 있던 칼끝이 점점 내려가며 가슴 골짜기를 지나 배꼽까지 슈트를 일직선으로 갈랐다.
겁에 질린 하나의 시선은 칼을 쥔 그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정철이 곧 마른 땅바닥에 컴뱃나이프를 콱 쑤셔박자 크게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손 풀어 이년아. 빨리 안 풀어?”
그녀가 두 손을 X자로 하고 상체를 가리자 정철이 눈을 크게 뜨고 부라렸다. 그는 다가올 쾌락을 앞두고 매우 흥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하나는 그 중압감에 못이겨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차렷자세를 했다.
“우리 하나 쒸는 말 잘들어서 좋다니까.”
정철이 실실 웃으며 그녀의 갈라진 슈트를 좌우로 활짝 젓혔다.
꿀꺽.
속옷에 가려진 그녀의 젖가슴을 보자마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침을 삼켰다.
살구색 실크 브래지어가 둥글둥글 알맞게 솟아오른 젖가슴을 잘 감싸주고 있었다.
정철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뻗었다. 브레지어를 만지더니 무언가 이상한듯 미간을 좁혔다.
“뭐야 이거? 뽕브라였네? 뽕브라해서 평소에 가슴이 커보였던 거야? 하나 쒸 이거 완전 사기꾼이네. 죄질이 아주 못됐어.”
“야, 그럼 나 먼저 할게.”
“시끄러 개새꺄. 망이나 잘봐.”
정철이 곧바로 일어나더니 허둥지둥 슈트를 벗기 시작했다.
바닥에 누워있던 하나는 절망에 빠지며 눈을 감았다.
끔찍했다. 아무것도 듣기 싫었고 아무것도 보기 싫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무념무상뿐이었다.
그런 반면에 정철의 사각 팬티 안에는 굵고 단단하게 커진 물건이 커다랗게 텐트를 치고 있었다.
사각팬티를 붙잡고 허겁지겁 발목 밖으로 빼내니 그의 흉측스러운 물건이 하늘 위로 우뚝 솟았다.
정철은 큰 전투를 앞두고 사기를 충전하듯, 하나가 입은 브레지어를 내려다보며 잠시 자위를 했다.
거므스름한 색깔의 퀴퀴한 물건은 혈관이 터지도록 힘껏 팽창했다.
“아아아, 미치겠다. 하나 쒸 이것 좀 빨아주쇼. 더 단단해지게.”
무아지경에 빠진 정철이 그의 물건을 하나의 입가에 가져다대려는 순간이었다.
“으악!”
갑자기 근처에서 망보던 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또?”
정철이 귀찮다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뭐지? 조금 전까지 망을 보던 구인이 사라졌다. 당황한 얼굴로 급히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한적하기만 할뿐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구인이 너 장난치면 뒈진다 진짜!”
그는 땅바닥에 꽂아둔 컴뱃나이프를 냉큼 집어들었다. 허겁지겁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
정적이 깃든 숲은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차 있었다.
그런 가운데, 독기 풍기는 목소리는 불쑥 들려왔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부끄러워 할줄 안다는 점이오. 사람은 배설을 할때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하지만 짐승은 시도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똥을 싸 재낀다오.”
“뭐, 뭐냐! 어떤 새끼야! 당장 나와!”
점차 어둠이 물러가고 달빛이 그림자를 적셨다. 뚜렷이 보이는 그 실루엣을 보고 정철은 아연실색했다.
“또, 또 너냐 이 개새끼야!”
“닥쳐라! 이 천인공노할놈아!”
우주는 의식이 얼어붙었다. 완전히 이성을 날려버렸다.
어찌 이런일이 있을 수 있는가!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었다.
“왜놈들이나 하던 짓이 왜 이 땅에 존재하는가!”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그를 휘감았다.
그것은 결코 타협할 수 없었다.
“고작 이딴 미래를 보기위해서 100여년전 이 나라를 위해 혼신의 투지를 불살랐단 말인가! 하물며 이 땅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은 또 뭐가되는가! 우린 결코 너처럼 버러지 같은 후손을 보기 위해 목숨을 바친게 아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확실한 것은 김정철의 얼굴이 피로 떡칠이 된지 오래다.
심지어 그가 의식을 잃은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럼에도 우주는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그의 멱살을 붙잡고 한대, 두대, 세대, 네대, 다섯대, 여섯대... 매우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실컷 두들겨 패고 있었다.
한편, 조금 전 우주에게 매맞고 먼저 정신을 잃었던 구인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수풀 속에 숨어서 우주가 정철을 패는 광경을 잔뜩 겁에 질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빨, 빨리 형님한테 말해야긋어!”
구인이 헐레벌떡 뛰어가며 금세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