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지명, 배경, 역사 등은 모두 현실과 아무련 관련이 없습니다. 허구입니다.
*전자책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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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조선 강원도에서 신우주가 태어났다.
그는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자랐다. 위로 두 명의 형과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여동생의 이름은 없었고, 가족들은 그저 막내라고만 불렀다.
우주가 8살이던 해, 5살 막내와 함께 반딧불이 그득한 밤길 논두렁을 걷고 있었다. 무색 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막내는 엿을 입에 물고 불쑥 말했다.
“오라버니는 괜찮아?”
“응?”
“가끔 세상이 하얗게 보여. 왜 이래?”
“지금도?”
“응, 지금도. 오라버니만 빼고 전부 하애.”
하지만 우주는 정작 막내의 말에는 관심이 없고 주변에 울리는 풀벌레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는 발목까지 자란 잡초를 헤치며 벌레를 찾는데 바빴다.
그러면서 재밌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막내 너 병 걸렸다 보다.”
병 걸렸단 소리에 막내가 인상을 찡그린다.
“아니야, 나 병 같은거 안걸렸어!”
“얼레리꼴레리~ 병 걸렸데요. 병 걸렸데요!”
막내가 금세 눈물이라도 떨굴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자신을 놀리는 오빠가 미워 엿이 묻어 끈적끈적한 손으로 그의 등을 세게 꼬집었다.
“아앗!”
“오라버니는 바보!”
“넌 더 바보야!”
우주가 10살이 되던 해, 둘째 형이 콜레라에 걸렸다. 아버지는 이를 관가에 신고했다. 어느 날 관병이 집으로 들이 닥치더니, 둘째 형을 전염병 환자가 모인 마을로 강제로 끌고 갔다.
이후 소문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의 인심은 흉흉했다. 행여나 전염병에 옮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우주의 가족을 마을에서 배척했다. 관가에서조차 그들을 돌봐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면서 집안일을 돕던 늙은 노비 부부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오라버니. 호랑이 나올것 같아.”
앞서 걷는 부모님을 뒤따르며, 제 덩치만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있던 막내가 말했다. 그러고는 하얗고 보드라운 손을 내밀어 나란히 걷던 우주의 옷깃을 꼬옥 붙잡았다. 초롱초롱한 큰 눈망울에는 잔뜩 겁을 집어 먹은 기색이 역력하다.
“나 안아줘. 안아줘 오라버니.”
“싫어. 난 너보다 더 무거운거 들었어.”
그때 우주와 6살 터울인, 지게에 한가득 짐을 지고 제일 뒤에서 따라오던 첫째 형이 말했다.
“이리와, 내가 안아줄게.”
막내가 헤죽 웃으며 쪼르르 뛰어가서 안겼다. 첫째 형이 번쩍 들어올리자 막내가 우주를 향해 메롱거렸다.
“셋째 오라버니보다 첫째 오라버니가 더 좋아.”
“나도 너보다 형님이 더 좋아, 어엇!”
우주는 뒤를 돌아보며 같이 혀를 내밀며 대꾸했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막내가 곧 까르르 맑은 시냇물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1895년, 가을 무렵. 우주가 12살이 되던 해였다. 집으로 조선자주독립단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대로 잠자코만 있다가는 머지않아 외세에 의해 주권을 침탈당하게 될것이오. 조국을 위해서, 이럴때야말로 우리같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나설때요. 부디 도와주시오, 신대감.”
지금은 비록 외딴 산속에 거주하고 있으나 우주의 가문은 나름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가진 지배층이었다. 참고로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설이 있다.
그리고 조선자주독립단체는 최근 친러 성격이 강한 대한제국 수구파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한때는 등한시했던, 몰락한 가문의 양반을 찾아와 무릎을 꿇을 정도로 사람이 궁했다.
이에 아버지는 즉시 거절했다. 여생, 가족과 함께 조용히 살고 싶었으며 더는 세상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해 18살이던 첫째 형은 생각이 달랐다. 조선자주독립단체 사람들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간뒤, 내내 엿듣고 있던 그가 곧바로 안방으로 뛰쳐들어와 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테오! 둘째는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우린 사람들한테 전염병자 취급 당하며 무시당하며 살고 있기나 하고! 아버지는 자존심도 없소? 왜 기회를 버리는 것이오! 자식들이 평생 산속에만 갖혀지내길 바라는 거요? 난 못하오. 절대 못하오. 아버지는 이제 늙어 속세에 미련이 없겠지만서도 우린 다르오. 이곳은 숨이 턱턱 막힌다오! 내 당장 그 사람들 쫓아가서 잃어버린 둘째도 찾아보고 우리 집안 무시한 새끼들 다 조져버리겠소. 두고 보시오. 내 꼭 다시 집안을 일으킬테니까!”
첫째 형은 결국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나서 조선자주독립단체 사람들을 뒤쫓아 산을 내려갔다. 젊은 나이에 산속에만 갇혀 지내는 것보다 세상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이듬해 1896년. 어떻게 알았는지 전에 부리던 늙은 노비 부부에게서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그간 전염병자 마을에서 홀로 지내던 둘째 형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는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쓰러지셨다. 아버지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아주시며 지극 정성으로 돌봐주었다.
1899년. 4년 전 집을 나갔던 첫째 형이 불쑥 찾아왔다. 남색 바탕의 제복을 입어 예전과 달리 훨씬 더 늠름해진 모습과 허리에는 칼까지 차고 있었다.
그는 작은방에서 짐을 풀며 수년만에 보는 돼지고기며 달걀, 동생들을 위한 미투리까지 사왔다.
그날밤 아이들이 자는 작은방에는 밤이 깊어지도록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형님아, 나가서 하는 일이 뭐야?”
“조국을 위해 매국노와 왜놈들을 쓸어버리는 일이지. 내 앞에서 감히 우리 조선을 모욕했다간 콱 다 혼내주는거야.”
“셋째 오라버니는 힘도 없고 겁도 많아서 하지도 못하겠다.”
“내가 왜 못해? 지금은 키가 작아서 그렇지 나도 형님처럼 크면 잘할 수 있어.”
“셋째 오라버니도 나가려고?”
“그럼. 나도 몇 년 이따 집 나가서 형님처럼 살거다.”
“그건 싫어. 오라버니들 다 나가면 심심하단 말이야. 첫째 오라버니는 이미 나가서 어쩔 수 없지만 셋째 오라버니만큼은 절대 못나가. 내일 아부지한테 이를테야.”
“니가 겁쟁이라고 놀렸잖아.”
“안나간다고 약속하면 앞으로 겁쟁이라고 안할게.”
이튿날. 첫째 형이 떠나기 전 우주에게 말했다.
“내가 이런 말할 처지는 아니다만, 우주 너는 집에 계속 남아줬으면 좋겠다. 니가 부모님과 막내를 지켜줬으면해. 이 집의 기둥은 앞으로 너 하나 뿐이니까.”
“형님은?”
“나? 난 글쎄다. 그냥 집을 나가보니 그다지 좋을 것도 없더라. 난 가끔 너희들과 뛰놀던 시절이 참 그립다. 천진난만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럼 가지말고 우리랑 살자. 응?”
“그러기에는 늦은것 같아.”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며 한 팔을 들어올렸다.
“또 올게.”
첫째 형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첫째형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동료들과 함께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단을 습격하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첫째 형의 관을 보며 아버지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크게 슬퍼하며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첫째 형을 화장하고 난뒤 며칠이 지나서였다. 아버지는 문득 어머니가 누워계신 안방으로 우주를 불러들였다. 그동안 아버지의 엄명이 있어 안방에는 들어와본적이 없었기에 방안으로 들어온 우주는 조심스레 어머니를 살펴봤다. 수년 전 얻은 병이 더욱 심해져서는 점점 말을 하지 못하고 손발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어 지금은 그저 죽지 못해 살뿐이니, 살가죽이 다 말라붙고 머리카락도 거의 빠져서는 옛날의 그 곱디고왔던 어머니는 온데간데 없었다.
우주는 내심 큰 충격을 받았고 세상이 무서워졌다. 밝고 순진하던 그의 눈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세상의 이면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 형에 이어 어머니에게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음을 직감했다.
아버지는 고이 접은 봉투를 품안에서 꺼내셨다.
“이것을 갖고 막내와 함께 개성의 김상중 영감을 찾아가거라.”
“개성의 김상중 영감이요? 우릴 아는 분인가요?”
“찾아가서 이 봉투를 건네주면 그쪽에서 다 알아서 해줄것이다. 여기 여비도 두둑히 챙겨놨으니 가다가 맛난것도 사먹거라. 다 써도 좋다.”
아버지는 두툼한 백동화 자루를 우주 앞에 내보였다.
우주는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마주봤다.
“막내랑 저만 가요?”
“이 아비는 네 어미를 돌봐야한다. 그러니 대신 다녀오거라.”
“전 길도 모르고 어떻게 찾아가야하는지...”
“너도 올해로 열다섯이다. 언제까지 집에만 처박혀 있을 생각이냐. 이번 기회에 막내와 둘이서 세상 구경도 해보고 그러거라.”
아버지의 말투는 전처럼 냉정했다. 음색에서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꼿꼿했다.
다음날 새벽, 우주는 무작정 막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그와는 달리 단잠에서 깬 막내가 작은 입으로 연신 하품을 해댔다.
“오라버니. 아부지 혼자서 괜찮을까? 우리 없으면 식사는 어떻게 하신대?”
“어른인데 알아서 잘해드시겠지. 그보다 난 우리가 걱정이야.”
우주는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막내가 말했다.
“근데 아까 집나오는데, 아부지 얼굴이 지난번 첫째 오라버니처럼 파래 보였어.”
“바부야 또 그 소리냐.”
우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막내가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입단속을 시켰다. 둘째 형이 그랬던 것처럼 막내가 병걸린 사실을 누군가 알게 되면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그것은 가족에게도 숨겼다. 몇 년을 간직한 둘만의 비밀이었다.
“너 하산하거든, 다른사람 있는 곳에서 절대 그런 말하면 안돼. 알았지?”
“응, 알았어 오라버니.”
이후 두 사람은 다정스레 손을 꼭 붙잡고 조심조심 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버지는 횃불을 들고 밖으로 나와 외로이 서 있었다.
낮에 자식들이 떠난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집구석은 그만 잊거라. 부디 싸우지 말고 험난 길을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
허름한 오두막 지붕에 불을 붙이며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아내와 나란히 누우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당신이 있어 내 삶이 행복했소.”
◆
세월이 흘러 1905년 11월 17일.
우주가 22살이 되는 해였다.
덕수궁 중명전.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가 무척 소란스럽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군 간부 하나가 회담을 준비중인 다코오 마츠다이라에게 서둘러 달려왔다.
“(마츠다이라님! 마츠다이라님! 신진루이가 제 패거리를 이끌고 이곳을 습격했습니다!)”
“(수선떨지마라. 예상했던대로다. 즉시 쿠로가네 소좌와 사마치의 승려들을 데려와라.)”
“(하!)”
마츠다이라가 음흉한 눈을 빛냈다. 그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이끌고 건물 1층으로 내려갔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울려오며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마츠다이라 네 이놈! 대한제국의 백성을 대표해 목을 치러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마츠다이라를 보고 1층 로비 중앙에서 발끈하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우주였다.
“(이야아아!)”
그는 칼을 쥔 채 마츠다이라를 향해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번개처럼 그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 짧은 치마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불쑥 나타나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채앵-!
우주가 칼로 막아내며 그 여성을 보고 이를 뿌득 갈았다.
“(네 이년 또다시 날...!)”
“(내 기필코 네놈만은 저승에 데려갈것이다. 각오해라 신진루이.)”
“(웃기지 마라 이년아!)”
몇차례 불꽃튀는 칼질을 주고받는 두 사람. 서로 실력이 엇비슷하여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열댓 명의 일본 승려가 마츠다이라의 곁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마츠다이라는 조용히 우두머리 승려에게 속삭였다.
“(이때를 틈타 봉인의식을 시작해주시오.)”
우두머리 승려가 합장을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지켜봐주십시오.)”
그가 살며시 손짓을 하자 승려들은 신속히 뛰어가서 우주와 여성을 둥글게 둘러쌌다. 그러고는 일제히 염주를 굴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쿠라이마바라 수쿠라리야 마마하. 쿠라이마바라 수쿠라리야 마마하. 쿠라이마바라 수쿠라리야 마마하...)”
“크윽!”
우주는 인상을 찡그리며 심각한 두통을 느꼈다. 그러면서 도저히 벗어날수 없는 매우 강력한 힘이 그를 바닥으로 잡아끌었다.
그것은 봉인진이었다. 마츠다이라는 진즉에 우주가 을사늑약 체결을 방해할 것이란 예상을 했고, 한달 전 일본 본토에서 데려온 사마치 승려들을 시켜 중면전 건물 전체에 특수한 결계를 쳐놓았던 것이다.
“크아아아악! 네 이노오오옴!”
우주가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머리를 감쌌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분개하는 표정은 아주 가관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슬금슬금, 우주의 눈치를 보면서 한 사내가 마츠다이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녀석이 제대로 걸려들지...)”
“(제아무리 인간을 벗어난 녀석이라해도 세이쇼오를 결코 뚫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세이쇼오라 함은...?)”
“(우리 대일본제국에서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술법입니다. 신도 가둘 수 있는 봉인진이지요.)”
그때였다.
“이완구우우우우!”
“으허억!”
우주에게 이완구라 불린 남자는 놀라 뒤로 자빠질뻔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어찌나 겁을 잔뜩 집어먹었는지 얍실하게 기른 콧수염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진정 하늘이 무섭지 않더냐! 감히 나라를 팔아먹다니이이! 이 매국노오옴!”
“(어, 얼른 서두르지 않고 모하고 있는게요!)”
이완구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승려들의 염불이 더욱 빨라지며 우주는 건물을 뒤흔들정도의 마지막 포효를 내질렀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거라아아!”
허공을 빙빙돌던 수백장의 부적이 날아와 그의 온몸을 뒤덮었다. 일말의 틈도 주지않은 채 구석구석 부적으로 꽁꽁 묶인 우주는 마치 가슴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미이라처럼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흥, 꼴좋다. 육씨랄 새끼.”
두 다리를 바들바들 떨던 이완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닥에 누운 우주에게 다가가 허리에 차고있던 칼을 뽑았다.
허공에 날을 세웠다.
허수아비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우주를 향해 그대로 내려칠 기세였다.
그 순간 우두머리 승려가 그를 막아섰다.
“(안됩니다. 그를 건들지 마십시오!)”
“(건들지 말라니? 어허 썩 비키거라! 어디 감히 중 따위가 이 몸을 방해하느냐!)”
이완구가 같잖다는 듯이 소리치자 우두머리 승려는 눈에 힘을 주며 대꾸했다.
“(부적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간다면 순식간에 봉인이 풀리고 말것입니다!)”
“(어차피 죽이면 그만인데 그게 뭔 상관이냐? 녀석이 아무것도 못하는 이때 죽이면 되잖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이쇼오 봉인의 목적은 세상과의 단절에 있습니다. 안과 밖이 전혀 다른 세계이며 신성한 힘이 깃든 부적이 그 경계선입니다. 만약 이완구 상이 칼로 찌른다면 부적에 깃든 힘만 사라질뿐 이 자는 상처 하나 없이 다시 깨어나고 말것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마츠다이라가 부적에 갖힌 우주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물었다.
“(그땐 도로 가두면 되지 않나?)”
“(우린 이제 이 자를 가둘수 없습니다. 저희 승려들을 한번 봐주십시오.)”
그 말에 마츠다이라와 이완구가 둥근 대형을 이루고 있던 승려들의 얼굴을 주의깊게 둘러 보았다.
“헉헉...”
“하아, 하아...”
“휴우...”
승려복의 목주변이 하염없이 흐르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지친듯 숨을 몰아내쉬며 서 있는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젠장할!”
이완구가 분한 표정을 짓고 들고있던 칼을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츠다이라가 짐짓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스스로 봉인이 풀릴 위험은?)”
우두머리 승려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부적이 훼손되지 않는 한 절대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절로 풀린다면 그 이유가 딱 하나 있습니다.)”
“(우주의 잔당을 전부 소탕하였습니다!)”
무장한 간부 하나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츠다이라가 침착하게 명령을 내리며 그를 돌려보낸 뒤 우두머리 승려에게 물었다.
“(그 이유란 무엇인가?)”
“(봉인의 기한입니다. 길어야 100년이라 추측됩니다.)”
“(음...)”
마츠다이라는 가만히 선 채로 팔짱을 끼더니 손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그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신우주. 마츠다이라에게 있어 신우주란 존재는 어떻게 각인이 되어 있을까?
그간 일본 본토에서 뛰어난 실력자들을 숱하게 데리고 와봤지만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하나 없었다. 한낱 조센징에 불과한 들개 새끼 주제에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주가 부리는 능력은 결코 인간의 힘이라고 볼 수 없었다. 순수하게 인간의 힘만을 가진 사내였다면 진작에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마츠다이라는 우주를 기존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인간으로 보았다.
인류보다 더 나은 인류.
신인류다.
그는 우주를 일컬어 ‘사이쇼오 신진루이(첫번째 신인류)’ 라 불렀다.
그리고 그 두번째 신인류의 출현. 마츠다이라가 알기로는 운좋게도 일본에서 태어났다.
마츠다이라는 뒤쪽에서 잠자코 대기하던 기모노 여성을 돌아봤다.
“(쿠로가네 소좌.)”
그녀가 차렷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좀전에 우주를 막아섰던 여성이다.
“(하! 소좌 쿠로가네 료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일자로 자른 앞머리와 허리를 닿는 긴 머리가 힘차게 출렁거렸다. 한손에는 세키가하라라는 명검을 쥐고 군인임에도 짧은 치마로 개량한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쿠로가네 소좌, 자네는 그동안 사이쇼오 신진루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다. 그 노고에 관해서는 나를 비롯해 대일본제국의 신민, 나아가 천황폐하께서도 고마워하고 계시지.)”
료코가 한 팔을 번쩍들었다.
“(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