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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저기요?”
관리자가 왔을 때 진혁은 잠깐 잠이 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평온함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거였다.
“아.. 관리자님?”
“예. 처음 뵙네요.”
상큼한 미소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진혁은 벌떡 일어서서는 인사를 했다.
“하아.. 사실 180님 때문에 무척 골치가 아팠어요.. 아. 진혁님을 이쪽에서는 180이라고 하거든요.”
“코드네임 같은 건가 보군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듯했다. 뭐 이쪽 세상에 180번째로 온 사람이라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의미일 수도 있고.
뭐든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여기 다시 올 일도 없는데.
“갑자기 시스템에 오류가 나는 바람에.. 후우..”
그걸 고치느라 죽는 줄 알았단다. 진혁은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제는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할 일이 없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아름다운 아가씨의 수다를 잠시 들어줄 정도의 여유는 있다. 관리자는 그렇게 푸념을 하더니 진혁에게 질문을 했다.
“그런데 180님은 좀 이상하시네요?”
“뭐가요?”“다른 분들은 질문을 많이 하시던데 180님은 아무런 말도 안 하셔서요.”
진혁은 피식 웃었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지금이야 별 상관없으니까요. 지금은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네요. 그냥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잠만 푹 잤으면 좋겠어요.”
뜻밖의 대답이어서 그랬는지 관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끔뻑거렸다.
“그것보다 물어볼 게 있긴 하네요. 가지고 가는 거 말인데..”
“아.. 그거요. 그런데 문제가 좀 있는데..”
관리자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더니 같지도 않은 말을 했다.
“180님한테 간 혜택이 너무 많아서요. 라이프도 아홉 개나 드렸고, 몸을 두 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다가..”
관리자는 줄줄 말을 하더니 이런 게 원래는 한 가지만 부여한다고 했다.
“라이프만 아홉이거나, 다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거나. 이런 거 한 자기만 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180님한테는 그게 왕창 들어간 거에요.”
그래서 원래는 보상으로 한 가지를 가지고 갈 수 있지만, 조금 어렵겠다고 했다. 진혁은 고개를 휙휙 돌리다가 관리자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니. 이 아가씨가 어디서 약을 팔아?”
“예? 약이라니요?”
“능력이 주어진 거야 그쪽에서 그런 거지. 내가 언제 달라고 했나?”
진혁은 사정없이 관리자를 몰아쳤다.
“들어보니까 안 되는 것도 아니구만. 조금 어렵다는 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런데 그렇게 되면 뭔가 곤란한 게 있나 보지?”
“아니. 그게 무슨..”
진혁은 관리자의 표정을 살피고는 혀를 찼다.
“역시나 그렇군. 가능은 한데 뭔가 있는 거야. 그렇지?”
“아니에요. 그냥 양해를 구하느라고 이야기를 한 건데..”
관리자는 호의를 베푼 건데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느냐면서 울상이 되었다. 미녀가 곤란한 표정을 한 채 큰 눈으로 쳐다보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이런 수작에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다.
“그냥 빨리 일 처리하고 갑시다. 서로 피곤하게 굴지 말고.”
진혁이 귀찮다는 듯 말하자 관리자의 표정이 변했다.
“쳇.. 대충 넘어갈 수 있었는데..”
관리자는 이곳에 너무 오래 있어서 눈치가 빤해졌다고 투덜거렸다. 원래는 일이 년 정도밖에 안 주는데 실수로 너무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고도 했다.
“그럼 뭘 가져갈 가에요? 이거까지 처리하려면 또 고생 좀 해야겠네.”
진혁은 조금 전에 결정한 걸 이야기했다.
“정말이요? 그걸 가져가신다는 거에요?”
“물론. 안 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렇긴 하죠. 그렇긴 한데.. 지금까지 그걸 가져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관리자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빨리 처리하고 보내줘. 이제는 정말 편하게 살고 싶으니까.”
이제는 비 냄새와 음모와 배신 같은 게 없는 곳에서 그냥 편안하게 살고 싶었다. 진혁의 말에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관리자가 손짓을 하자 눈앞에 갑자기 둥그런 판 같은 게 생겨났다. 거기에 팔찌 두 개를 올려놓고 무언가를 이리저리 만졌다.
“정말 괜찮은 거죠? 그걸 가지고 가는 거.”
“물론이지. 이쪽은 오케이야. 바로 보내달라고.”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판의 한 곳을 힘차게 눌렀다. 그러자 팔찌에서 연기 같은 게 흘러나와 판에 들어갔다.
그러자 판이 빙글빙글 돌더니 진혁의 몸이 엄청난 빛에 휩싸였다.
‘드디어 가게 되는구나. 드디어.. 그런데 정말 이걸 가지고 가는 게 잘하는 걸까?’
생각한 대로 되면 대박이지만 아니면 그냥 보석을 가져가느니만 못했다. 하지만 남자라면 지르는 거지.
‘그래. 인생 뭐 있어?’
진혁은 갑자기 어디론가 쭈욱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 점점 힘이 빠지고 정신도 흐려졌다.
무언가 번쩍이는 것들이 보였는데, 점점 시야가 희미해졌다. 그렇게 진혁은 정신을 잃었다.
***
“이곳에서는 누구나 말이나 마차에서 내려야 합니다.”
무인들이 비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소이다. 자 다들 내리거라.”
인솔자의 말에 여러 명의 남녀 모두가 말에서 내렸다. 다들 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그들은 커다란 비석 앞으로 가서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가 그 유명한 의협곡이군요.”
“천하제일의 협객이신 하진혁 대협이 마지막으로 향하신 곳이지.”
“무림맹에서 매년 그날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데, 그때가 되면 무림 명숙들이 모두 모이곤 한다. 그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지.”
인솔자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이야기했다.
“사부님도 매년 참가하시잖아요.”
“사부야 하 대협과는 잘 아는 사이라서 그런 것이고.”
“에이. 천하 십강에 사부님 이름이 항상 있어서 그런 건 아니구요?”
중년 남자는 허허 웃었다. 그는 물끄러미 비석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주고 떠난 진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웃으면서 자상하게 알려주던 그 모습이. 왕칠의 눈가에는 물기가 촉촉해졌다.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자신이 왕칠이라는 걸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제사가 아니더라도 매년 이곳을 찾았다. 남로무사단 사람들과 현천문 사람들. 목세강과 한천위. 그리고 손경백. 매년 그를 추모하는 사람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맹주는 잘 있으려나.”
그가 바뀐 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 친해진 건 문승강이었다. 조심하느라 원래 친했던 사람을 처음에 일부러 멀리했다.
그런 와중에 문승강과 나이도 비슷하고 진혁을 생각하는 것도 남달라서 금방 가까워졌다. 문승강은 진혁의 유지를 잇겠다면서 정말 노력했다.
무공 수련에도 매진했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은 무림 맹주 자리에 있었다.
“정말 많이 좋아졌지. 예전과 비교하면 정말 달라졌어. 저 녀석들이야 모르겠지만.”
왕칠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웠고, 힘없는 사람들은 항상 착취당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아주 오래전도 아니다. 불과 이십 여년 전. 그 사이에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게 다 진혁의 희생이 가져온 변화였다.
진혁의 유지를 받든 사람들은 기득권 세력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장장 10여 년간 이어진 전쟁 끝에 결국 그들을 무너뜨렸다.
전쟁이 끝난 지도 10년 정도가 흐른 지금. 여러모로 예전보다는 훨씬 살기 좋아졌다.
“그나저나 서쪽 제국에서 왜 나를 초청한 거지?”
서쪽 제국은 사천과 감숙, 청해 지방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아랍 지방까지 세력을 넓힌 대 제국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성대한 행사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거기에 자신의 이름도 있었다. 왕칠은 왜 자신을 초대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
“사업만 해도 바쁘실 텐데, 이렇게 소설까지 쓰실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그냥 취미로 쓴 건데 운이 좋았습니다.”
진혁은 인터뷰를 앞두고 가볍게 리포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십 대에 창업해서 인공지능 분야에 독보적인 회사로 인정받는 기업을 일군 남자. 액션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고, 이번에는 소설까지 대 히트를 했다.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둘이었지만, 재산이 조 단위. 한 인터넷 조사에서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위. 어떤 여자가 하진혁이라는 최고의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인지가 세간의 관심사였다.
진혁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히야. 정말 부럽다. 도대체 가지지 못한 게 뭐야? 몸 좋아. 머리도 좋아. 재산도 많아.”
“그런데 왜 무협소설 같은 걸 썼을까요?”
리포터의 말에 PD가 피식 웃었다. 아직도 판타지나 무협 소설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 년에 수십억 원씩 버는 작가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인터뷰를 할 거면 이쪽 사정에 관해서 좀 알아보기라도 하라고. 한 해에 수십억 버는 작가도 있어.”
“수십억이요?”
리포터는 놀랐다는 듯 말했다.
“그래. 하 사장 이번 작품도 일 년에 그 정도는 벌걸? 뭐. 하 사장한테는 별거 아닌 돈이겠지만.”
진혁의 무협 소설은 정통 무협은 아니고 퓨전이었다. 제목은 ‘좋은 놈, 나쁜 놈, 그놈이 그놈’이었는데, 처음부터 무척 호평을 받은 작품이었다.
가상의 무협 세상에서 두 몸을 가지고 활약하는 인물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생동감이 넘치고 묘사가 훌륭하다는 평이 많았다.
캐릭터도 입체적이고 유머가 넘치지만, 때로는 날카롭게 감정을 후벼 파는 구석도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게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처음에는 놀라운 신인 작가가 탄생했다고 했다. 기성 작가가 필명만 바꾸어서 연재하는 거라는 말도 있었고.
그만큼 필력이 탄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하진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사업가에다가 배우로서도 군침을 흘리는 사람인데 소설까지 썼다고 하니까 믿어지겠어?”
PD는 사람이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했다. 혼자 그렇게 다 가질 수가 있느냐는 거였다.
“그래도 사업은 개발자들이 하는 거잖아요. 인공지능 관련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도 있던데요?”
“사장은 사람 잘 뽑고 월급만 잘 주변 되지. 사장이 개발까지 해야 하나?”
PD는 다른 기업인에게 들었는데, 진혁의 안목이 무척 뛰어나다고 말했다.
“운도 있었겠지만, 굉장한 사람인 건 맞아.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는 참가한다는 데, 그때마다 개발진의 박사들도 놀란다는 거야.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고 말이야.”
“그래요?”
인공지능에 관한 상당한 조예가 없으면 낼 수 없는 아이디어라고 했다. 그러니 잘 모른다는 소문은 다 뻥이라고 했다.
“나 같아도 보기 싫겠다. 모든 남자의 적이야.”
둘의 잡담은 진혁이 돌아와서 멈추었다. 진혁은 인터뷰를 시작했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흠.. 소설은 왜 쓰게 되었느냐. 저는 항상 생각합니다. 늦은 때는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 하지 않으면 계속 그때 왜 그랬느냐는 생각이 떠오를 거다.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도전한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얻는 게 있더군요. 그걸 통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어 나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진혁은 적당히 포장된 말을 하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오늘도 바쁘게 움직였더니 무척이나 피곤했다.
집으로 돌아온 진혁은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되어있는 방으로.
거기에는 정말 소중한 물건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혁은 금고를 열고 거기에서 팔찌를 꺼냈다.
“자. 그쪽으로 가서 놀아 볼까.”
진혁이 선택한 건 팔찌였다. 황궁에서 얻은 것과 왕표에게서 얻은 것. 두 개를 관리자에게 건네고 원래 차고 있던 팔찌는 그대로 찬 채로 온 거다.
그리고 이 세상에 와서도 팔찌는 기능을 했다. 철각패도의 몸으로 오갈 수가 있었던 거다. 더 놀라운 건 아공간도 쓸 수 있었다.
철각패도가 거기 남아서 그런 거였다. 그리고 능력도 조금은 사용할 수 있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모을 수 있었던 건 다 사람의 정보를 볼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았고, 사업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하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원래 사라졌던 그때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양쪽을 오가니 두 세계 모두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무협 세상이 더 빨리 흘렀다. 무협세계 3년이 이쪽 1년 정도였다. 하지만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철각패도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황제 자리도 다른 이에게 물려주고 철각패도는 태황제에 이름만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종종 나타나서 대 제국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신과 같은 존재인 철각패도. 진혁으로 두 세계에서 꿈 같은 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자 그럼 가 볼까?”
진혁은 팔찌를 차고 정신을 집중했다. 양의심공을 이용해서 두 몸을 동시에 나타나도록 했다.
철각패도의 눈에 거대하고 화려한 황궁의 모습이 보였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모습. 진혁의 눈에는 자신의 방이 보였다. 역시나 어마어마하게 넓었지만,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의 방.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이냐고 만약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거다.
“둘 다! 둘 다 가질 수 있는데 하나만 고를 이유는 없으니까.”
진혁은 웃으면서 무협 세계로 넘어갔다. 진혁의 방에 있는 팔찌가 사라진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지만 방 주인은 곧 돌아올 것이다. 이곳에서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