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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향해서.
공포가 들불처럼 번졌다. 리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였다. 사람은 그런 존재에게 너무나도 무력할 수밖에 없다.
“지옥에서 온 염왕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염왕이든 뭐든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불길은 정말..”
사람들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파이어 월의 위력은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진혁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
‘붙어서 싸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죽일 수가 없잖아. 라이프 배슬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게다가 마법도 무척 까다롭고.’
리치는 완전히 없애려면 라이프 배슬을 깨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있는지 모르니 리치를 완전히 없애는 건 요원한 일.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방법이 없을까?’
어차피 진법만 완성하면 이곳에 소환된 것들은 전부 역소환될 거다. 그러면 리치도 자연스럽게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갈 거고.
‘분명히 놈의 마법이 나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어. 그러니 상대를 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 데..’
놈을 베고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리면 시간을 좀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안됩니다. 당주님 혼자 가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굳이 가겠다면 나랑 같이 가지.”
“저도 가겠습니다.”
목세강과 한천위가 나섰다. 왕칠도 손을 들었고, 현천문의 사람들도 전부 자신도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저 혼자 가서 살펴보고 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사람들은 강경했다. 진혁이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더 큰 재앙이라면서.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아직 라이프가 여러 개 남아 있으니 문제 없다. 충분히 정보를 알아올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했다.
“나는 만약의 경우 술법을 사용해도 됩니다. 그러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그럴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는다. 그러니 믿고 기다려 달라. 진혁은 사람들은 설득했다. 처음에는 절대로 안 된다면서 펄펄 뛰던 사람들도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데 동의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진혁이 술법으로 죽는 건 피할 수 있다고 한 게 컸다. 진혁은 준비를 하고는 혼자서 리치를 만나기 위해서 움직였다.
“자네는 따라오지 마라니까 그러네.”
목세강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했는데, 왕칠은 고개를 저으며 넉살을 떨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제가 이래 보여도 쓸만합니다.”
“실력이 나아진 거야 잘 알지만, 그래도 조심하라고.”
목세강과 한천위, 왕칠, 호승렴. 이렇게 네 명은 몰래 진혁을 도우러 움직였다. 호승렴이 선두에서 괴물의 기척을 파악해서 길을 열고, 나머지는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이동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 당주에게 일이 생기면 안 돼. 그러면 괴물을 막을 수가 없다고.”
“그러게나 말이에요. 혼자서 하는 것보다야 여럿이 있으면 훨씬 나은데..”
그들은 전에 리치를 만났던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저쪽 부근이었지?”
“예.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거기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호승렴은 그 방향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넷은 더욱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하지만 주변에 괴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리치의 권역이라 몬스터들이 없는 거였는데, 넷도 대충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 칼 소리가..”
희미하게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곳은 전에 리치를 만났던 곳 부근. 일행은 바로 속도를 높였다.
“이거. 혼자서 여기에 올 줄은 몰랐는데?”
왕표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주변에는 호위 무사 몇 명이 있었는데, 다들 절정 고수에 이른 자들이었다.
- 그자는 나에게 맡겨라.
리치가 이야기하자 왕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호위 무사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해서 약간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재미없게 되었네. 잘못하면 몸을 피해야 할 지도..’
리치가 있는 곳으로 왔더니 왕표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혁이 접근하는 것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대마법사이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문제는 왕표와 호위 무사들까지 있으면 리치를 상대하는 게 더 어렵다는 점이었다.
왕표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거기다가 리치까지. 당장은 리치와 싸우는 걸 보고만 있겠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손을 쓸 거다.
- 이곳으로 접근하는 자들이 또 있군. 제법 강한 자들이다. 숫자는 넷.
“그래? 어느 쪽이지? 애들을 보내서 처리하도록 하지.”
리치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왕표는 수하들에게 이곳으로 오는 자들을 처리하라고 명했다.
‘누구지? 아무도 오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여기를..’
왕표의 명을 받은 열 명의 고수들이 움직였다. 덕분에 이곳에 남아있는 호위 무사는 세 명밖에 없었다.
진혁은 검을 뽑았다. 이 정도면 기회를 봐서 한꺼번에 처치할 수도 있을 듯했다.
“일이 꼬이긴 했지만, 어차피 싸워서 가루로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진혁은 검에 기운을 불어 넣었다.
싸움은 진혁이 유리했다. 리치가 마법을 날리기는 했지만, 진혁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다.
‘마법 저항력이 높은 캐릭터로 게임하는 느낌인데?’
리치는 몹시 짜증이 난 듯했다. 자신의 마법이 잘 먹히지 않으니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였다.
‘거기다가 놈의 공격이 확실히 약해졌어. 마나가 떨어진 건가?’
같은 공격이라도 강도가 전만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리치를 처리하지 못한 건 왕표를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놈은 중간중간 섬뜩한 공격을 해왔다. 그럴 때마다 리치가 화를 내기는 했지만, 놈은 계속 공격을 했다.
‘둘 다 지치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적당히 밸런스를 맞추어서 둘이 계속 싸우도록 만들 속셈으로 보였다. 지금까지는 왕표의 의도대로 리지와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 역시나 이곳에서는 내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군.
리치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왕표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수하 둘을 빌리지.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어쩔 수가 없군.
“얼마든지.”
왕표가 손을 올리며 말하자 옆에 있던 호위 무사 두 명이 허공을 날아 리치 쪽으로 날아갔다. 리치는 두 무사의 머리를 앙상한 뼈만 남은 손으로 잡았다.
고통에 일그러진 무사들의 얼굴. 표정만 보면 엄청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음소거가 된 것 같은 광경. 무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면 일그러질수록 리치의 붉은 눈이 점점 선명해졌다.
- 탁하고 맛이 없는 영혼이군.
눈이 까뒤집혀 흰자만 남은 두 무사를 내던지며 리치가 말했다. 무사 둘은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영혼 흡수를 당한 모양이었다.
- 조금 부족한 것 같으니 한 놈 더 가져가지.
리치는 대답을 듣지고 않고 손을 뻗었다. 덜덜 떨고 있던 무사가 허공에 둥둥 떠서 날아갔다. 버둥거려 보았지만, 리치의 손을 벗어날 수 없었고, 동료와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 다시 해보지. 아까와는 조금 다를 테니.
리치는 무사 한 명을 버리며 말했다. 진혁은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검이 기운을 불어넣었다.
“후우우~ 후우우~”
진혁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영혼을 흡수한 놈은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승패가 바뀐 건 아니었다.
목이 잘리고 몸이 수십 조각 난 채로 누워있는 건 리치였다.
- 이곳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너는 나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내 던전이었다면 너는..
“원래 진 놈들 중에서 자존심 센 놈들이 그러더라고. 우연이니 컨디션이 좋지 않았느니.”
진혁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달그락거리는 해골을 콰직 밟아버렸다.
“너랑은 볼일 끝났어.”
진혁은 빼를 밟아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왕표는 그런 진혁을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기습만 했던 그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군.”
왕표가 검을 치켜세웠다. 그는 진혁을 보면서 말했다.
“너는 나를 못 이겨. 게다가 니가 저번처럼 도망가면 내가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죽일 거거든? 넌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아직 나를 잘 모르는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왜 이런 거야?”
진혁은 조금이라도 쉬기 위해서 질문을 던졌다. 왕표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도 포인트를 모아야 하니까 그렇지. 나는 사람들이 불만, 공포 같은 걸 느껴야 포인트를 얻을 수 있거든.”
처음에는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워낙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어서 불만이나 공포를 느끼는 정도가 약했다.
“사는 게 지옥이니까 그런 것에 무뎌진 모양이야. 그래서 어쩌겠어. 공포 같은 건 전쟁이 딱이잖아.”
그래서 무림맹에 들어갔고 살겁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괴물을 불러내는 거였다.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진혁과 철각패도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희망을 갖기 시작했던 거다.
“희망을 가지면 포인트가 깎이거든. 거의 다 모았었는데,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진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 말고도 잘만 생각하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을 건데 너무나도 큰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냥 나 같으면 공포 경극 같은 거 만들어서 공연을 하겠다. 그거 말고도 방법이야 많을 테고.”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쉽고 편하고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왕표는 히죽대더니 진혁에게 다가왔다.
“시간 끌 생각은 말라고. 뭐. 어차피 이번에는 끝날 테지만.”
놈은 검을 들고 진혁을 겨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타나 왕표를 향해 공격을 했다.
“차핫!”
왕칠이었다. 왕칠이 갑자기 왕표를 공격한 거였다.
“위험해!”
왕칠의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는 해도 왕표의 상대는 아니었다. 진혁이 급히 움직이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다.
- 푸욱
“커헉...”
왕표의 검이 왕칠의 배를 꿰뚫었다.
“어디서 버러지 같은 게.. 이런..”
- 콰앙!
진혁의 장력이 왕표가 있던 땅을 때렸다. 진혁은 왕칠의 상세를 살폈다.
무척 위중했다. 곧바로 치료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상태. 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왕표가 두지 않을 거다.
“왜 왔어요? 왜?”
“하 당주가 나 세 번이나 살려줬잖아.. 나도 한 번 정도는 뭔가 해야지..”
왕칠이 힘없이 웃었다. 진혁은 왕칠의 어깨를 꽉 쥐었다.
“쓸데없이 마음만 착해 빠져서.. 그렇게 살면 손해만 본다고 내가 그랬잖아요.”
“흐흐.. 그런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어서 고쳐지질 않네?”
왕칠의 몸에서 생기가 급격히 빠져나갔다. 진혁은 당장 왕칠을 업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왕표가 갑자기 공격을 해왔다.
“아주 감동적인데? 너도 곧 보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지옥이든 어디든 만나서 회포 풀라고.”
왕표는 분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진혁에게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야. 여긴 우리 사는 세상이 아니야. 이건 게임 같은 거라고. 넌 게임 캐릭터 죽어도 울고 그럴 거야?”
진혁은 대답대신 검을 곧게 뻗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을 꿰뚫을 듯했지만, 재빨리 몸을 피해 소매만 벨 수 있었다.
“우후.. 이거 화가 단단히 났나 본데? 게임하다가 죽어서 화내는 애새끼처럼.”
진혁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웃기지 마. 이게 게임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그럼 이도걸은?”
이도걸이라는 말에 왕표가 흠칫했다.
“넌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죽이고 분탕질 치고. 그래 놓고서는 변명거리로 생각한 게 지금 얘기하는 거지.”
진혁은 검을 들어 왕표를 겨누었다.
“넌 그냥 쓰레기 같은 새끼야. 세상에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진혁은 정신을 집중하면서 외쳤다.
“너.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주지. 똑똑히 봐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