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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 물리고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여유를?’
왕표는 뭘 믿는지 여유만만해 보였다. 뭔가 대책이 없다면 저렇게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일. 진혁은 왕표의 뒤를 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일을 진혁이 하지는 않을 거다.
‘철각패도를 통해서 사혈련이 움직이게 해야지. 내 움직임은 신경을 쓰고 있을 테니까.’
원래는 무공대사와 현허진인이 가장 요주의 인물이었지만, 거기에 왕표도 추가하면 된다. 진혁은 회의가 끝나자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융중산을 조사할 준비와 왕표의 움직임을 감시할 준비를.
“왕표를? 다른 말은 없었나?”
흑수 갈맹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수하에게 물었다. 철각패도는 전금당주인 왕표를 예의주시하고 모든 상황을 즉시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전서를 보내왔다. 매우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면서.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다른 인물에 우선해서 감시하라는 말만 적혀있었습니다.”
“그래? 그럼 사람을 붙이긴 해야겠군..”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철각패도가 하는 일이니 다 이유가 있을 거다. 지금까지 그가 하는 일이 다 이랬다.
처음에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중에 보면 정교하게 짜 맞추어져 큰 이익을 가져왔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러면 가장 솜씨가 좋은 녀석들로 붙여야겠군..”
철각패도가 특별히 강조한 내용이다. 흑수 갈맹은 아예 감시조를 하나 더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감시조가 통째로 전멸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 경호 말고 은밀하게 붙어 있는 자들이 있다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감시조를 이중으로 운영하지 않았다면 감쪽같이 모를 뻔했습니다.”
감시조가 당하면 짐작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다른 일로 습격을 받은 것일 수도 있고, 무림맹에서 손을 쓴 걸 수도 있으니까.
흑수 갈맹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지나치게 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정상단의 상단주에다가 무림맹 전금당의 당주이니 당연히 경호가 붙어 있겠지.’
하지만 사혈련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자들로 구성된 감시조가 전멸했다. 그것도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다른 감시조가 아니었다면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를 뻔했다.
“그자들의 정체는?”
“그건 조심스럽게 알아보고 있지만, 왕표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자들 같습니다.”
실력은 모두 절정 고수 이상. 게다가 그들의 뒤를 캐다가 석연치 않은 부분을 발견했다.
“황궁의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예. 워낙 고수라 멀리서 누굴 만나는지만 확인했는데, 황궁의 내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관을 족쳤다.
“태후가 담자사에 가는 행렬 관련해서 정보를 캔다?”
짐작이 갔다. 태후를 노리고 있는 거닥. 그래서 왕표 주변을 감시하라는 거였구나 싶었다. 흑수 갈맹은 철각패도가 앉아서도 천 리 밖을 보는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아신 거지? 허어.. 그건 그렇고 그 내관은?”
“잘 처리했습니다. 본인도 죽기는 싫을 테니 입 다물고 있을 겁니다.”
흑수 갈맹은 일단 이 사실을 철각패도에게 알렸다. 그리고 감시에 인원을 더 투입했다. 이건 잘하면 무림맹을 지워버릴 수도 있을 큰 사건이었다.
“태후를 노려? 이거 미친 놈들이구만. 그런데 근처 마을은 왜 정찰하고 다니는 거지?”
진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정도면 역모를 꾸미는 거나 마찬가지다. 왕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것보다는 이걸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 최선의 결과를 얻느냐. 이건데..’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태후가 담자사로 갈 때 동행하는 것이 먼저 떠올랐다.
친분도 어느 정도 생겼고, 채 공공과의 인연도 있다. 당일에 슬쩍 행렬에 끼는 정도는 가능할 거다. 그렇게 되면 놈들의 습격을 막을 수 있을 거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림맹은 역적이 되어 큰 고역을 치를 거다. 윗선도 크게 다칠 테지만 일반 무인들이 더 많이 죽거나 다칠 게 뻔한 일.
‘아니지. 태후에게 신임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포인트 적으로 볼 때는 좋지 않아.’
태후는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진혁이 원하는 것은 포인트. 그걸 빨리 모아서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는 거다.
언제 등 뒤에서 누군가가 칼로 쑤실지 모르는 동네. 목숨이 여러 개니까 그나마 버티는 거지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 미쳐버렸을 거다.
“왕표 혼자서 움직이지는 않을 거고, 동조 세력이 있을 테니까 거길 뒤져봐야겠어..”
진혁은 처음에는 현허진인을 주시했다. 하지만 무당 쪽에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서 왕표 혼자서 하려는 건 줄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무공대사 쪽을 살폈다. 그랬더니 역시나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
소림의 고수들이 별다른 일 없이 한곳으로 모이면 그게 수상한 움직임 아닌가. 진혁은 왕표가 소림과 무당을 모두 손에 쥐고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주도 좋네. 재주도 좋아.’
무당은 돈줄을 움켜쥐고 움직였을 테고, 소림은 약점 같은 걸 쥐었을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림이 왕표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무림맹의 당주가 되었다. 진혁은 도대체 왕표는 어떤 걸 해야 포인트가 모이는 걸까 궁금했다.
“아니지. 그거야 그놈 사정이고. 나는 내 것만 챙기면 되지.”
진혁은 사혈련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역모라니요!!”
현허진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여느 때와는 달리 크게 흥분한 상태였다.
“말을 해보세요.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문 아닙니까.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무공대사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며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고 발뺌했다. 하지만 현허진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그냥 아니라고 한다고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닙니다.”
동창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 동창이 어떤 곳인가. 마음만 먹으면 없는 죄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현허진인이 이렇게 펄펄 뛰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무공대사는 무조건 아니라고 했다. 이건 무조건 아니어야 했다.
이게 걸리면 끝장이다. 정말 반역을 하거나 아니면 모두 죽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동창은 어떻게든 무마를 해보리다. 어렵긴 하겠지만, 구체적인 증좌도 없는 데 설마하니 무슨 일이라도 있겠소이까.”
증거도 없는 데 마구 다룰 만큼 소림이 힘없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현허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소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그는 황실에서 무림맹을 조사하는 게 조금 되었다고 했다. 금군 토벌대 사건 때문에 조사를 시작했는데, 태후의 습격 사건까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거였다.
“아마도 작정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든 제거를 할 생각인가 봅니다.”
“설마하니 소림과 무당을 상대로 그럴 수야 있겠소이까. 두궐륭 대장군이나 태후 쪽에 선을 넣어서 어떻게든 무마를 해봅시다.”
중신과 황실에 있는 사람 중에서 소림과 무당과 연관이 없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래저래 돈 받고 도움을 받은 자들이다.
소림과 무당이 역모에 몰리면 그들까지 줄줄이 엮일 수 있다. 그러니 그런 점을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하면 위기는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손해가 막심할 거다. 하지만 역모에 몰리는 것보다는 낫다.
“그것도 그거지만 도검당주가 날뛰는 것도 막아야 합니다. 진상을 밝히라면서 떠들고 다니니 골치가 아파 죽겠어요.”
“그건 그래야지요. 아니 무림맹의 일을 이렇게 떠벌리다니. 생각이 있는 건지.”
무림맹의 치부는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그건 파벌은 달라도 무림맹 수뇌부가 공통적으로 지키고 있는 암묵적인 룰이다.
그런데 진혁은 오히려 진상을 밝히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문제는 도검당주가 나서니 일반 무인들도 합세한다는 점이었다.
그 수가 워낙 많아서 어떻게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람들을 시켜서 누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잘못하면 자신들도 역모에 몰려서 죽을지도 모르니 기세가 몹시 사나웠다.
“그건 이렇게 합시다. 도검당주가 분란을 조장하는 것으로 해서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립시다. 말이 많긴 하겠지만, 그 방법이 가장 좋겠소.”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공명심에 들떠서 음모를 퍼트린 게 그자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무공대사의 말에 현허진인이 무릎을 탁 쳤다.
“그게 좋겠소이다. 아예 그쪽으로 가닥을 잡아봅시다. 도검당주가 없는 말을 만들어서 퍼트렸고, 증거도 조작한 것으로.”
“그 정도면 도검당주에서 끌어내리는 데 문제가 없겠군요. 게다가 동창이나 황실에 변명거리로도 나쁘지 않고 말입니다.”
현허진인과 무공대사는 각각 황실과 군부에 선을 넣어서 움직이기로 했다.
“나를 그런 죄로 끌어내리겠다?”
“그렇습니다.”
문승강은 이야기를 하면서 힐끗 진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진혁은 당황하거나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왜? 이상한가?”
“그게.. 이런 일을 들으면 놀라는 게 보통이라서..”
진혁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그런 사람들인데 놀랄 게 뭐가 있겠나.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지 않았어도 가만히 있었으리라 생각하나?”
진혁은 어차피 자신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온갖 짓거리를 했을 거라고 했다. 문승강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복잡했다. 진혁을 악당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누가 선이고 악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동창에서 나올 거야. 그러면 모든 게 밝혀지겠지.”
“쉽지 않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하기 그렇지만, 소림과 무당은 거대한 곳입니다. 당주님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어떤 짓을 할지 다 안다는 듯이.
“두 곳에서 손을 쓰면 동창에서도 쉽게 건드리지는 못할 겁니다.”
“나도 알아.”
있던 곳으로 치면 제계 서열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대기업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무력까지 어느 정도 갖춘 대기업. 그러니 건드리기 어렵지.
하지만 진혁은 걱정하는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문승강이 오히려 걱정되었다. 진혁이 하는 일이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되어서 더 그랬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해하지 않아도 돼. 곧 알게 될 거니까.”
진혁은 곧 모든 것이 밝혀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동창이 무림맹을 찾아왔을 때, 무림맹은 진혁을 이번 사건을 일으킨 사람으로 몰아갔다.
“하 당주가 이번 일의 주범이라 이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여기 증인과 증거들이 있습니다.”
무공대사는 조작된 증거들을 제시했다. 제독 동창은 넘겨준 자료를 쓱 보더니 옆 사람에게 건넸다.
그는 무공대사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지막으로 진혁 앞으로 왔다.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 아닙니까?”
“뭐가요?”
무공대사의 질문에 현허진인이 답했다.
“동창에서 조사를 하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끼리 얘기하는 분위기 같지 않소이까.”
아닌 게 아니라 그랬다. 살벌하거나 날카로운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동창이 이렇게 유하게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 당주. 당신이 모든 일을 꾸몄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아닙니다.”
“아니라는 증거는 있소?”
“있습니다.”
진혁의 말에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수많은 증거가 그를 범인이라고 가리키고 있는데,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지 궁금했던 거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사람들은 어떤 수작을 부릴지 긴장을 했고. 그런데 진혁의 말은 뜻밖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토벌단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누군가가 폭약을 써서 토벌단을 공격했었지요.”
진혁은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조사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격을 한 자들은 황궁에도 손을 뻗치고 있었던 겁니다.”
정보를 빼내고 돈을 뿌려 매수를 하고.
“게다가 황궁의 보물창고에서 물건까지 빼돌렸더군요.”
진혁은 왕표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자의 팔을 보시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