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2 / 0150 ----------------------------------------------
선빵이 최고!
“어이. 포정사. 혹시 소식 못 들었어?”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철각패도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남이 얘기를 하면 들어. 아니면 그냥 여기서 떨어뜨려 줄까?”
철각패도의 말에 포정사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하는 일에 협조하라고 황실에서 소식이 왔을 텐데 들었어? 못 들었어?”
“그게 무슨 소리냐.. 너 같은 자에게..”
철각패도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눈치는 빨라서 바로 입을 닫았다.
“보아하니 돈 들여서 이 자리까지 온 모양인데 그러면 적당히 챙기다가 돌아가. 공연히 나섰다가 피 보지 말고.”
철각패도의 말에 포정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화가 났는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지붕에서 거꾸로 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내가 여기하고 사천 쪽에 괴물 잡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방해만 하지 마.”
철각패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흘낏 쳐다보는 포정사에게 말했다.
“믿거나 말거나 상관은 없는데, 믿는 편이 오래 사는 데 유리할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철각패도는 밑으로 내려왔다. 포정사는 위에 남겨 놓은 채. 철각패도가 내려서자 공동파 무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철각패도는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장문인에게 다가갔다.
“오늘 전부 치우고 떠나라. 치우는 김에 저기 위에 있는 덩어리도 같이 치워.”
“이보시오. 어찌 이렇게 핍박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영천진인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무인에게 이리 모욕을 줄 수는 없는 것이오.”
“그럼 죽여줄까?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고.”
말이 없는 걸 보니 그걸 원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철각패도는 주변을 쓱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여기 사람들이 당신들이 이렇게 되도록 놔뒀을 것 같아? 그런데 지금 사람들 표정을 보라고.”
사람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는 얼굴이었다. 철각패도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 얼굴이 이유야. 당신들이 여기서 나가야 하는 이유.”
철각패도는 발을 쿵 굴렀다. 그리고 오늘 내로 떠나지 않으면 공동산으로 직접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공동파 장문인은 명을 내렸고, 무인들은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그걸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한없이 차가웠다.
“아니. 괴물들을 다 처리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철각패도의 말에 사혈련 무인들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철각패도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토번왕이 병력을 보내 돕기로 했고,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병장기가 도착할 거다.”
그것만으로도 무인들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토번왕의 명성이야 청해와 감숙 지방 사람 치고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괴물을 잡으며 승승장구했고, 신의 사자라는 말까지 듣는 사람이 토번왕이다. 그의 군대는 괴물을 물리치면서 계속 세력을 넓혔고.
그런 토번왕이 병사를 보내 돕는다면 큰 도움이 될 거다. 게다가 특별한 병장기를 제공한다니 한층 사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하더라도 병력이 턱없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시작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터이니 그 사이에 지원자들을 받아서 훈련 시키면 된다.”
하지만 지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이 늘면 그만큼 돈이 듭니다. 병력을 얼마나 모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은 단위가 아닐 텐데..”
병사들은 돈 많이 든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그게 다 돈이다. 그래도 괴물과 싸우려면 백 단위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만 단위는 되어야 한다. 토번왕이 병력을 얼마나 보낼지는 모르겠지만, 본거지도 지켜야 할 테니 그다지 많은 수는 아닐 거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훈련시켜야 하는데 정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철각패도는 문제없다고 했다.
“자금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시키는 대로 진행하면 된다.”
철각패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깜빡 잊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병사들에게 월급도 줄 거야. 많지는 않지만.”
“예? 그렇게 되면 돈이.. 게다가 관부에서도 문제를 삼을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황실하고 이미 얘기가 된 거니까.”
게다가 괴물 토벌만 끝나면 모두 돌려보낼 거라고 했다. 성과금까지 주어서.
사혈련 지부장은 철각패도가 미친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가 핫산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철각패도가 생각하는 건 작은 것이 아니라는 말.
‘아! 그렇구나. 정말로 이곳에서 왕을 할 생각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지.’
이 소식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 거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이다. 그런데 훈련을 받으면 돈을 준다? 칼이나 창을 잡을 수 있는 남자는 죄다 몰려들지 모른다.
가족은 남자 입 하나를 덜 수가 있고, 돈까지 받는다. 가족의 삶이 훨씬 윤택해질 거다. 자원한 남자나 가족이나 철각패도에게 감사를 올릴 게 뻔하고.
관리나 황제? 지금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준 사람이 그들보다 훨씬 낫다.
지금도 철각패도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이번 일로 아마 이 지역에서는 황제도 그를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실질적인 왕인 거다. 대장로님이 왕이 되는 거야.’
지부장은 부리나케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소식을 퍼트리기 위해서였다.
소식이 퍼지자 난리가 났다. 안 그래도 일할 거리가 없어서 노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먹여주고 돈 까지 준단다.
죽을 위험? 그냥 있어서도 굶어 죽게 생겼다. 사람들이 정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하지만 철각패도는 훈련을 받기 적합한 사람은 모두 받으라고 했다.
“돈이야 싸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가지고 있는 거 다 쓰고 가도 된다. 만약의 경우 아공간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금덩어리나 보석 좀 가지고 가면 된다.
그렇게 감숙성은 때아닌 괴물 사냥 열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
철각패도가 공동산으로 가버려서 자하검선과의 대결은 무산되었다. 있지도 않은 사람을 어쩌겠나.
하지만 낙양의 사혈련 지부를 공격해서 내몰고 다시 그 자리에 무림맹 지부가 들어섰다.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무림맹은 자평했다.
딱히 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무림맹이 공격해 오자 사혈련이 자리를 피했으니까. 진혁도 참가는 했지만, 별다르게 한 것 없이 구경만 하다 돌아왔다.
“아직 토벌에 나서려면 한 달 정도는 시간이 있으니까.”
진혁은 계속 조사를 하고 있었다. 누가 장경각 지하에 있는 서책을 숨겼고, 주요 부분을 찢어갔는지를.
“청류사태는 의전 관련해서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진혁은 청류사태의 이름에 줄을 그었다. 들어간 이유도 확실하고 딱히 의심스러운 부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접객당주를 하고 있는 청류사태는 과거 접객 관련된 자료를 알아보러 들어간 거였다. 더구나 그는 무림맹 밖을 나간 적도 거의 없고, 무공도 약했다.
그러니 음모나 이도걸의 죽음과는 큰 관련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다음은 왕표.”
무림맹의 돈줄인 전검당의 수장. 동정상단이라는 거대 상단의 주인이기도 한 그가 왜 장경각에 들어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이 없었다. 진혁은 직접 만나서 물어보기로 했다.
“일단 가서 좀 쉴까.”
계속 두 곳의 일을 보다 보니 무척 피곤했다. 진혁은 오늘은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누구냐?”
갑자기 진혁이 걸음을 멈추고는 소리쳤다.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람이 나타나더니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진혁은 잠깐 망설이다 괴한을 뒤쫓았다. 어쩐지 괴한이 자신을 유인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함정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생명이 아직 여러 개 남아 있으니 한 번 정도는 죽어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괴한은 한참을 날아가더니 개봉의 외곽에 인가라고는 보이지 않는 곳에 내려섰다.
“누구냐?”
“잘 알 텐데.. 자네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괴한은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나 하나도 지치지 않았어. 엄청난 고수다.’
목소리가 멀쩡했다. 숨을 헐떡이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진혁은 괴한을 잘 살폈다. 숨을 몰아쉬지도 않았고, 흐트러지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비교해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도걸을 죽이고 팔찌를 가져간 게 당신인가?”
“이도걸? 아아! 그 엄청한 군바리 새끼?”
괴한인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였지. 너무 멍청하더라고. 게다가 나는 시간이 필요했거든..”
갑자기 머리에 와서 박히는 게 있었다. 시간? 그게 무슨 소리지? 시간이 필요하다니? 시간이 필요한데 왜 이도걸을 죽여야 했지?
수많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모르는 티를 내기는 싫었다. 그래서 슬쩍 운을 떼보았다.
“꼭 죽여야 했나? 그래도 같은 처지인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괴한은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호오.. 이거 보게?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진혁은 자신의 질문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뭐를 잘못 물은 거지? 잠시 생각해 보니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놈이 시간을 얻으려면 팔찌가 필요했던 거야. 그리고 팔찌는 죽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물건이고.’
그래야 말이 된다. 하지만 시간을 얻는다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너 지금 모르는구나? 네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진혁이 당황해하자 괴한은 손을 걷어서 자신이 차고 있는 팔찌를 보여주었다. 그의 팔찌에는 불이 거의 다 들어와 있었다.
“팔찌 보이지? 거기에 많은 정보가 있다고. 팔찌를 응시하면서 정보 확인이라고 생각해 봐.”
진혁은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눈앞에 글자들이 주르륵 보였다. 대부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
“맨 밑에 있는 숫자 보이지? 그게 남은 시간이야.”
116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괴한은 피식 웃으면서 설명을 더 했다.
“이 세상. 뭐 나도 여기가 다중차원인지 이세계인지 소설 속의 세상인지 그런 건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지.”
세균이 들어오면 몸은 자연스럽게 방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백혈구가 세균을 죽이려고 한다. 그것처럼 이 세계에서도 이물질과 같은 존재를 제거하려고 한단다.
“그게 남은 시간이야. 그 시간 안에 돌아가지 못하면 영원히 소멸하게 되는 거지.”
생명이 몇 개 남아있는지와 상관없이 그냥 죽는 거란다.
“이방인끼리 어떻게 죽이냐고? 그걸 말해줄 수는 없지. 그러면 내가 위험해 질 지도 모르니까.”
괴한은 낄낄대더니 검을 뽑았다.
“내가 시간이 조금 모자라서 말이야. 이거 꽉 채우는 게 시간이 더럽게 오래 걸리더라고.”
“그건 공감하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오래 걸리더군.”
진혁도 기운을 끌어 올렸다. 모르는 정보 때문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꿀릴 건 없다. 무공으로도 밀릴 것 같지는 않았고, 만약의 경우 탈출 방법도 있다.
“어디 유명하신 도검당주의 솜씨를 한 번 볼까?”
괴한은 땅을 박차고 달려들면서 검을 날렸다.
- 캉! 카아앙!
검이 자주 부딪치지는 않았다. 서로 허점을 노리고 움직임은 많았지만, 직접적으로 칼이 맞닿는 경우는 드물었다.
서로 한 방에 숨통을 끊기 위해서 일격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진혁은 놈의 무공이 자신보다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괴한이 씨익 웃었다.
“뭐야?”
갑자기 놈의 공력이 확 늘었다. 아까와는 다른 자를 상대하는 느낌.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시간을 끌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진혁은 곧바로 몸을 뺐다.
“비기는 너만 있는 게 아니지.”
괴한은 급히 따라와서 검을 내질렀지만, 진혁의 몸이 갑자기 사라졌다. 괴한은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뭐야? 이 자식 어디로 사라진 거야?”
괴한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진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자. 어떤 놈인지 정체를 드러내라.’
진혁은 영혼과 비슷한 상태가 된 채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괴한은 그런 걸 꿈에도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