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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당주가 할 수 있는 일들.
“자네 역할이 중요해졌네.”
무당의 인물이 황서군에게 속삭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대로 마무리가 되게 할 수는 없지요.”
황서군은 서서히 몸을 풀었다. 앞의 두 대결이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앞의 두 사람보다는 조금 위라고 평가받는 황서군이었다. 만약 이번에 이긴다면 자신과 무당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다. 절호의 기회.
상대는 잘 아는 자였다. 검각 소속의 무사였으니까. 실력은 제법이었다. 가끔 깜짝 놀라게 하는 감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재능이 특별한 건 아니었다. 흔해서 발에 챌 정도는 아니었지만, 큰 문파에서 그 정도 되는 자들이 꽤 있다.
문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디딜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거기서 올라오면 그때부터는 대우가 확 달라진다.
그 벽을 넘지 못하고 평생 그 자리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무인도 허다하다.
“오늘 단단히 가르침을 내려주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잘하면 우리 무당으로서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남궁 세가와 종남은 승부를 내지 못했다. 도검당주인 진혁이 개입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건 이 각을 싸우고도 승부를 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황서군이 승리를 거둔다면 무척이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다른 문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당이 우수하다는 걸 증명한 셈이니까.
그런 분위기는 진혁도 알아챘다. 하지만 진혁은 이번 비무를 가장 유리하다고 보고 있었다. 검각의 각주가 된 자는 무아지경을 경험했으니까.
‘원래 재능이 있는 자였어. 그동안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꽃을 피우지 못했던 거지.’
진혁은 이곳에서 사람들의 정보를 살피다가 조금 놀라운 걸 발견했다. 잠재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가 없어서 그런 거지 타고 난 재능은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가능성만 본다면 오히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인물들보다 뛰어난 자들도 있었다.
- 구중억 (남, 35세) 무림맹 일반 무사. 내공수위 23년
- 성장 가능 등급 : 초절정고수
얼마 전까지는 일류 무사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건 주변 환경이 좋지 못해서 그런 거였다.
정말 거대 문파에서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배웠다면 벌써 절정고수가 되었을 법한 인물.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자였다.
‘영약도 먹은 적이 없고, 좋은 스승으로부터 배우지도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일류 무사의 초입까지 오른 게 용했다. 만약 황서군이나 장세문, 남궁표 같이 좋은 환경이었다면 이미 그들을 뛰어넘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를 거다. 그는 이미 벽을 하나 넘었으니까.’
진혁은 둘의 대결이 어떻게 될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황서군은 자신만만한 표정이었고, 구중억은 묘한 표정이었다.
기대감, 흥분, 긴장감. 그런 것들이 시시각각 내비치는 얼굴. 하지만 가장 잘 드러나는 건 적개심이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한판 붙어보자는 마음만 있었다. 그런데 점점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황서군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괄시받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처럼 대하면서 깔보고 무시했던 순간들이.
그는 흥분에 온몸을 맡기고 뜨거운 적개심이 피를 타고 돌아다님을 느꼈다.
“내.. 내가?”
황서군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결과. 찰나의 차이였지만 패배는 패배였다.
자신이 언제 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수많은 비무를 했지만, 아주 어렸을 적을 제외하고는 패배라는 걸 모르고 살아왔다.
아니. 아주 어렸을 적에도 거의 지지 않았다. 열 살이 넘어서부터는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선배들도 이겼으니까.
승리는 항상 자신의 몫이었고, 패배는 다른 자가 짊어져야 할 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허어..”
다른 사람들도 충격에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상대가 어떤 꼼수를 쓴 것도 아니었다. 진짜 정면 대결을 했고,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그러다 일 각 정도가 지났을 때 승부가 갈렸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긴 사람이 예의상 하는 말이다. 상대방이 배려를 해주어서 내가 이길 수 있었다는 말. 그런 식으로 상대 체면을 세워주는 거다.
항상 자신이 했었던 말.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니 체면이 세워지기는커녕 속에서 열불이 났다.
자신을 비웃는 것 같고 비아냥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들었던 사람들도 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게 무슨..”
구파일방, 특히 무당 사람들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눈으로 직접 보았지만 믿기지 않았으니까.
반면 일반 무인들은 하나같이 솟아오르는 희열을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함께 뒹굴고 일하던 사람이 황서군을 이긴 것이다.
무당의 황서군이 누구인가? 그리고 종남의 장세문은? 낭궁표는 또 어떻고. 강호에서 사룡이라고 부르는 신진 고수들이다.
그런데 그런 고수들과 비기거나 이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긴 것처럼 좋아했다.
“이것으로 검증은 어느 정도 된 것 같군요. 이의 있는 사람 있습니까?”
있을 리가 있나. 전임 각주들이 나섰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 이 결과를 부정하는 건 사룡 중 세 명의 실력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실력에 따라 결정을 하겠습니다. 다른 외적인 조건은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진혁의 말과 비무의 결과가 삽시간에 무림맹에 퍼졌다. 전임 각주들의 문파는 난리가 났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서군이가 패했다니?”
부맹주인 현허진인은 믿지 않았다. 차라리 당주인 진혁에게 졌다고 하면 그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름도 변변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무사에게 패했다?
그것도 사룡 중에서 으뜸이라고 하는 황서군이? 무당의 자랑이자 무당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황서군이?
“자세히 말해 보거라.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게냐?”
현허진인은 어떤 협잡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연무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당한 승부였다고 말했다.
“서군이가 방심을 한 게로구나. 이런 못난 놈!”
“방심을 한 것도 있긴 한데.. 상대의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현허진인은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마교나 황실에서 보낸 첩자가 아니라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럼 그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게냐?”
“그건 아니고 당주에게 지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현허진인은 좀 더 자세히 말해보라고 했지만, 그자도 소상히 알고 있지는 못했다. 현허진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아보라고 명을 내렸다.
“무슨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셋 다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느냔 말이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현허진인은 이 문제는 혼자서 대처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에게 긴급히 연락을 했다.
“다 아시겠지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소이다.”
“이거 큰일 아닙니까. 본때를 보여주려다가 오히려 낭패를 보게 생기지 않았소.”
진혁을 일단 궁지에 몰자고 현허진인이 제안을 했고, 다들 동의했다. 무림맹주 선출도 중요하지만 당주 자리에 듣도 보도 못한 자가 앉으면 안 되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무림맹의 주요 자리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차지여야 했다. 그것이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모두 생각했다.
그러니 일단은 진혁을 당주 자리에서 몰아내자는 데 합의한 거다. 협조를 하지 않으면 혼자서 뭘 어쩌겠나. 그러다가 적당한 꼬투리를 잡으면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된다.
그런데 일반 무사 중에서 각주를 뽑아 앉혔다. 그걸 어떻게든 흠집을 내보려 했는데 오히려 망신만 당했다.
“지금 도검당주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어요. 일반 무사들은 아주 그가 대단한 업적이라도 세운 것처럼 군단 말입니다.”
“그건 위험하지요. 그런 자가 있으면 일반 무사들 통제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사람들이 주요 직책을 맡고 있지만, 대다수의 인원은 일반 무인들이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일 없이 잘 통제가 되었다. 하지만 다수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
“이렇게 합시다. 이미 엎질러진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도검당주를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합시다.”
소림의 무공대사가 말했다.
“누가 그 자리에 앉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그자를 내려오게 해야 합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일반 무사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칠 수가 있어요.”
“그건 안 될 일이지요.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소이까.”
무공대사는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황실에서 이번에 토벌을 한 것을 두고 매우 만족한다고 하더군요. 그걸 이용해봅시다.”
“흐음.. 그렇다면 도검당이 토벌 전면에 나서게 하자는?”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무림맹에서 무력을 담당하는 곳이 도검당이니까요.”
황실에서 가장 골치 아파하는 곳에 도검당을 보내자는 거였다. 가장 골치가 아픈 곳은 다시 말해 가장 괴물이 날뛰는 곳이라는 거다.
가장 위험한 곳에 보내서 처리하자는 뜻. 죽어도 좋고, 살아도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책임을 물어 끌어내리고.
“하지만 황실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 큰일 아닙니까.”
“그거야 대비를 해야겠지요. 일단은 토벌에 우리 전력은 모두 빼는 겁니다.”
무공대사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전력은 제외하자고 했다.
“그렇게 되면 도검당주는 일반 무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 테고, 그들로 좋은 성과를 내기란 요원한 일이지요.”
“하지만 그들만 가지는 않을 테고 병사들도 보낼 것 아닙니까.”
현허진인의 말에 무공대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는 현허진인과 무공대사 둘만 남게 되었다.
“그쪽에서도 잘라버려야 할 자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 기회에 처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면 될 겁니다.”
“오호. 그런 수가 있었구려.”
황실이나 군부에도 제거해야 할 대상이 분명 있을 거다. 대놓고 죽이기 어려울 때 어려운 임무를 맡기거나 위험한 전쟁터에 보낸다.
“무당에서 태후전은 움직여보지요.”
“소림은 대장군과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손쉬운 기회다. 정치 감각이 있는 태후나 대장군이 거절할 리 없다. 대신 그들이 제거되고 나면 바로 병력을 이끌고 가서 전과를 올리면 된다.
그러면 골칫덩어리들은 모두 없어지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진다. 무공대사와 현허진인은 웃으면서 차를 마셨다.
***
“생각했던 것보다도 반응이 뜨겁습니다.”
각주를 일반 무사 중에서 뽑은 효과가 상당히 컸다. 다들 목이 말라 있었던 거다. 자신들도 인정받고 싶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요직은 전부 구파일방 아니면 오대세가의 몫이었다. 정말 간혹 일반 무사가 그런 자리에 오르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그건 정말 드문 경우였다.
하지만 이번에 도검당의 각주 세 명이 모두 일반 무사 중에서 뽑혔다. 그리고 그들은 당당히 전임 각주와 비무를 해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사실 일반 무사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요직에 앉은 사람들이 명문 출신이 아닌 무사들을 따로 일반 무사라고 부르기 시작했지요.”
검각의 각주가 공손하게 말했다.
“그런데 최근에 조금 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괴물을 토벌하러 나가야 한다는 말이..”
“괴물이야 모든 사람의 골칫거리이니 그놈들을 잡는 일은 좋은 거 아닙니까.”
하지만 진혁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겠죠.”
제갈벽린의 말에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혁은 오히려 괴물을 잡으러 가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는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진혁은 그 문제는 자신이 알아보겠다고 하고는 무림맹을 나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몸을 바꾸었다.
“어디 보자.”
낙양에 있는 자신의 방에 도착한 철각패도는 서신이 하나 와 있는 걸 발견했다. 돈황에서 전서를 날린 거였다.
철각패도는 내용물을 확인했는데, 거기에는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도걸이 죽어? 아니 그럴 리가?”
철각패도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