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1 / 0150 ----------------------------------------------
황궁이 뭐 별거냐.
정말 우연이었다. 문승강이 사부인 을지검군 주복형에게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따로 누구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다.
그날따라 만났는데 뭔가 이상했다. 알 수 없는 위화감. 은연중에 풍기는 어색함. 그런 기색을 느끼고 슬쩍 떠보았다.
물론 그 전에 살짝 분위기를 잡았다. 진혁은 무공을 봐주는 내내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문승강에게 잠시 쉬자고 했다.
흠칫 놀라는 문승강. 자기 딴에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한 것 같은데 진혁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후우.. 얘기해.”
“예? 무슨 얘기를..”
모르는 척하지만,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말투. 진혁은 분위기를 잡고 말을 이었다.
“얘기해. 알면서도 이렇게 기회를 주잖아. 그러니 다 털어 놓으라고.”
조용조용 이야기했다. 그리고 문승강의 눈을 보았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런 눈초리로. 그러자 문승강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걸 털어놓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엄청나게 고민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진혁은 기다렸다. 차분하게 기다리니 문승강이 이내 포기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공연히 숨겼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그는 쭈뼛거리다가 말을 했다.
“그게.. 문제가 될 건 없어요. 사부님이 믿지를 않으녀서..”
문승강은 진혁에 관해서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말했다.
하아. 이 새끼 봐라? 그걸 떠벌렸어? 진혁은 곧바로 손을 쓰려고 주먹에 힘을 주다가 잠시 생각을 했다.
‘아니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니야.’
이럴 경우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예 앞으로는 말을 꺼낼 생각도 품지 못하게 눌러주는 거다. 하지만 이럴 경우 반발심도 커진다.
당시에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한 기분이 들고 진혁에게 반발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잘 다독여서 그러지 못하게 하는 거고. 대신 이건 잘 먹히면 효과가 크지만 설득하는 게 어렵다.
둘 다 장단점이 있다. 그러니 상대의 성격이나 현재 상황, 컨디션, 오늘의 날씨 등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진혁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문승강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봐. 내가 그렇게 악당인 것 같아?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해할 수 없다는 포즈를 취하는 진혁. 문승강은 그런 진혁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니가 때렸잖아요. 이상한 일도 시키고 정보도 다 말하라고 하고.’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진혁도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물론 내가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는 있어. 하지만 생각해 보라고. 내가 한 일 중에서 나쁜 일이 있었는지.”
만나서 정보를 교환하거나 소문을 퍼트리게 한 정도였다. 특정한 말을 전달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일이라고는 하기 뭐했다.
“다소 과장하거나 일부를 빼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그렇지?”
“뭐. 그건 그런데..”
“정보도 서로 공유했고, 게다가 내가 무공까지 봐줬잖아. 내가 무공을 왜 봐줬겠어?”
물론 문승강을 키워서 무당의 황서군에 맞서게 하려고 그랬다. 그래야 오대검파 내부가 개판이 되니까.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보상 차원에서 무공을 봐준 거다.
“잘 생각해보라고. 네가 한 일로 화산파가 손해 본 것이 있는지. 아니면 네가 피해를 당한 게 있는지.”
“없어. 오히려 넌 큰 이득을 보았단 말이지. 그런데 왜 나를 악당으로 생각하지?”
진혁은 억울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렇게 된 건 무당과 소림이 서로 싸우면서 판을 이상하게 흔들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문승강도 그건 인정했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보라고. 오히려 악당은 소림이나 무당 아냐?”
문승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소림이나 무당의 처사가 잘못된 거라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바로잡아야지. 그렇게 하려고 내가 이러는 거잖아. 아. 방법이 좀 거칠었던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진혁은 그 이상 충분히 보상을 해주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비장한 분위기를 잡고 조용히 말했다.
“사실 말 못할 비밀이 있다. 후우.. 이건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야. 하지만 내 정체가 노출되면..”
진혁은 고뇌하는 듯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무언가 엄청난 비밀이 있고 그 무게감을 짊어진 듯한 얼굴.
“그래서 네가 필요했던 거다. 생각해보라고. 내가 너를 어찌하려고 했으면 그냥 죽이지 왜 살려뒀겠어?”
문승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죽여서 어디다 버렸어도 충분했을 거다. 그럴 만한 실력도 있고 기회도 있었으니까.
진혁은 앞으로는 그런 생각 말고 무공을 높여서 괴물을 퇴치하는 데만 신경을 쓰라고 말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언젠가는..”
진혁은 그 말을 남기고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 먼저 가버렸다. 쓸쓸한 가을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살갗을 쓰다듬었다.
“그래. 뭐 저 사람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지. 음.. 어?”
문승강은 진혁이 돌아가자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중요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좀 이상했다. 아주 복잡하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정리는 안 되는 그런 느낌?
그냥 자신은 잘 모르는 어떤 큰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그런 느낌만 들었다.
“모르겠다. 어차피 말해도 믿지도 않는 거. 그냥 지금까지 했던 대로 하자.”
***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것이 병법의 기초이기는 하지만, 내 이토록 절묘하게 사용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소이다.”
장수는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갈 세가와 현천문의 사람들이 좁은 길목에서 괴물을 맞이했다.
아무리 많은 괴물이 온다고 해도 좁은 길을 통해 올 수 있는 수는 한정이 되어 있다. 옆으로 돌아서 오는 놈들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의 밥이 된다.
“과찬이십니다. 병사들이 잘 받쳐주어서 가능한 게지요.”
제갈중선의 말에 장수는 크게 웃었다.
“아니오이다. 내 성과에 관해서는 분명히 적어서 위에다가 올리고 있소이다. 아마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오.”
보통이라면 이러지 않았을 거다. 자기가 전공을 다 먹었겠지. 하지만 이들은 제독동창이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오히려 공을 적당히 부풀렸다.
그래도 충분했다. 워낙 전공이 출중해서 나머지 전공만 자신이 가져도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오. 내 다른 장군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 쪽이 좀 특별한 것 같던데..”
“저희 제갈 세가의 진법과 현천문 사람들의 무공이 합이 잘 맞는 듯합니다. 게다가 장군의 지휘력이 더해지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게지요.”
“어허허허. 무슨 그런 말을..”
장수는 이런 식으로만 진행되면 품계가 한두 개 오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라고 여겼다. 그만큼 전과가 좋았다.
다른 부대에 비해서 서너 곱절 이상 많은 괴물을 처치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제갈 세가와 현천문이 있었고, 장수는 그걸 꼬박꼬박 기록했다.
전투가 끝나면 지휘관은 그날 있었던 전투에 관해 정리해서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전투가 이루어졌고, 죽인 괴물은 몇 마리다.
특별히 활약을 한 자는 누구이고 뭐 그런 자잘한 걸 다 쓴다. 물론 대략적인 거야 밑에서 해서 올리고 지휘관은 굵직한 내용만 쓰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작성된 내용이 위로 올라가고 거기서 다시 장계를 올릴 제독동창에게로 간다.
“호오.. 오늘도 현천문의 활약이 아주 컸구나. 채 공공께서 무척 좋아하시겠어.”
“그렇습니까? 제는 그럴 것이라 알고 있었습니다.”
“이놈이 아주 그 사람들에게 푹 빠졌구나.”
제독동창은 진독평을 보며 웃었다. 진독평은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 인색한 녀석이었다. 자기가 워낙 잘났으니 어지간한 사람은 눈에 치자도 았았을 거다.
그런데 돌아와서는 현천문 사람들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이번에 그들과 함께 싸우지 못해서 정말 아쉽다며.
“공공께서 관심을 두실 만한 자들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안 그래도 장계를 올릴 때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느니라. 뭐 없는 사실도 아니니 문제될 것도 없고 좋구나.”
없는 전공도 부풀릴 것인데 워낙 잘하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써도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받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런데 무림맹 사람들이 만나기를 원한다고?”
“예. 자꾸 선을 대와서 전부 거절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계속해서..”
제독동창은 피식 웃었다.
“이것들이 동창을 우습게 보고 수작을 부리는구나.”
“어찌할까요? 제대로 손을 좀 보는 것이..”
제독 동창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은 그냥 두거라. 상황이 복잡한데 공연히 더 키울 필요는 없다.”
제독동창은 그리 말하고는 장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작 무당과 소림 쪽은 안달이 났다.
“아니 이거 전체적인 전공에서도 우리가 밀리니 이걸 어찌한단 말입니까.”
무공대사가 이마를 잡으면서 말했다. 떼로 하면 이길 줄 알았다. 하지만 제가라 세가와 현천문은 병사들과 함께 무지막지한 성적을 거두었다.
어떻게 따라갈 방법이 없을 정도였다. 소림의 장로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이제는 다른 말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몇 번을 바꾸지 않았소이까. 그러니 이번에는 여기의 전공으로 도검당주를 결정해야 합니다.”
“나도 알고 있소. 그래 동창에 선을 대는 건 좀 어떻소?”
무공대사의 말에 한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동창이 어떤 곳입니까. 공연히 건드렸다가 오히려 큰일을 당합니다.”
“허어.. 이거 일이 어찌 이렇게 된단 말인가..”
그런 탄식을 하는 건 소림 만이 아니었다.
“수를 내야 합니다. 제갈 세가에서 도검당주가 나오면 절대로 안 됩니다.”
현허진인은 강하게 말했다. 제갈 세가를 궁지로 몰아넣어서 죽이려 한 것이 현허진인이었다. 그러니 제갈 세가나 현천문에서 도검당주가 나오면 끝장이다.
“동창은 물 건너갔소이다. 도저히 손을 쓸 방법이 없어요.”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청광 어르신을 다시 만나봐야겠습니다.”
현허진인은 청광진인을 만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 시각, 해타산에서 멀지 않은 황실에서는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오늘도 괴물들을 크게 물리쳤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이게 전부 황제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이제 겨우 열두 살에 불과한 황제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현천문이라는 이릅이 자주 언급됩니다. 도대체 어떤 곳입니까?”
황제의 물음에 채 공공이 답했다.
“무림의 방파인데 아주 용맹하고 정의로운 자들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세간에서는 무림의 사룡삼봉보다 현천문의 사룡일봉이 더 뛰어나다는 말이 돌 정도입니다.”
무림의 이야기에 황제의 표정에 호기심이 어렸다. 강한 무인을 좋아하는 황제는 그들에 관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라고 명했다.
“장계에 올라온 것처럼 문주인 온위립과 이제자인 호승렴은 불세출의 무공을 가진 자들입니다.”
선봉에 서서 가장 많은 괴물을 벤 것이 그들이었다. 다른 곳의 누구도 이들의 전과에 절반도 미치지 못했다.
“대제자인 하진혁의 전공도 그에 못지 않은데, 이 자는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 위험에 빠진 병사들을 구하는 데 더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오. 그런데도 전공이 이렇다는 건 이자 역시 무공이 엄청나다는 거겠군요.”
황제는 북진무사 손경백과 겨루면 누가 이길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가 아는 가장 강한 무인이 북진무사 손경백이었기 때문이었다.
“겨뤄봐야 알겠지만, 쉽게 승부가 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오. 그래요? 어디 그들을 한번 보고 싶은데, 황실로 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채 공공은 황제에게 조아리며 대답했다.
“폐하께서 원하시면 당연히 올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괴물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니 어느 정도 토벌이 끝나고 나서 부르시지요.”
“맞소. 그래야겠소.”
황제는 하루라도 빨리 현천문의 사람들을 보고 싶은지 자리를 들썩였다. 채 공공은 그런 황제에게 말을 덧붙였다.
“제가 현천문에 관해 찾아보았는데, 태조께서 현천문의 도움을 받으셨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태조께서요?”
황제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황제 폐하. 태주께서 그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시고 크게 감복하여 금황보검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충신의 반열에 오른 자들 아니오. 토벌이 끝나지 않아도 좋으니 바로 그들을 부르시오.”
채 공공은 웃으며 대답했다.
“예. 알겠나이다. 그들을 즉시 이곳으로 부르겠나이다.”
그날 현천문 사람들은 황제를 배알하기 위해서 황궁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