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는 표사-105화 (105/150)

0105 / 0150 ----------------------------------------------

같은 말이라도 해석은 다를 수 있다.

“동창에서 사람이 나왔다고?”

“예. 어떻게 할까요?”

현허진인은 수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동창에서 사람이 나왔는데 어찌하겠느냐니. 당연히 이리로 모셔와야 할 것 아니냐.”

현허진인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수하는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동창. 보통 사람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곳이다. 황제 직속의 특무기관이며, 공포의

“동창에서 왜? 태후전의 일이니 딱히 트집 잡을 건 없을 것인데..”

동창은 현허진인이라도 조심스러운 곳이다. 동창에게 잘못 찍히면 어떤 곳이라도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니까.

현허진인은 어떤 무엇 때문에 동창에서 사람이 나왔는지 고민하면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건장하고 무척이나 얼굴선이 굵은 남자가 들어왔다.

“본관은 이형백호 직에 있는 진독평이라고 하오이다.”

“무림맹의 부맹주를 맡고 있는 현허라고 합니다.”

현허진인은 조금 놀랐다. 이형백호라면 동창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위치다. 생각보다 막강한 권력자가 온 것. 게다가 진독평이라는 이름은 강호에도 알려진 이름이다.

그는 황실과 군을 대표하는 삼대 고수 중 한 명이었다. 동창의 이형백호 진독평, 금의위 북진무사 손경백, 정천호 엄경립.

이렇게 세 명은 대문파의 장로급 이상 가는 고수라고 알려져 있었다. 현허진인은 상석을 권했고, 진독평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현허진인은 진독평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물었다.

무림인의 관심사라면 뻔하지 않겠나. 현허진인은 상대의 무공 수위를 가늠해 보았는데,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눈빛이며 움직임, 호흡, 몸의 전반에 흐르는 기세.

모든 것이 고수라는 걸 풍기고 있었다. 자신보다 강하지는 않겠지만, 쉽게 승리를 얻을 수는 없는 그런 고수라고 느껴졌다. 30대의 나이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실력.

“이번에 토벌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아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현허진인은 상대가 정중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 만약 좋지 않은 일이라면 완전히 다른 태도였을 테니까.

“이야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너무 많아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진독평은 날카로운 눈으로 현허진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하나하나 열거하기 시작했다. 토벌전에서 있었던 일부터 세간에 떠도는 무림맹의 비리를.

보통 사람이라면 현허진인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진독평은 가능했다. 동창의 실력자였으니까. 현허진인은 헛기침을 했다.

“커험.. 대부분 근거 없는 소리입니다. 수문이란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소문이란 걸 다 믿을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런데..”

이형백호 진독평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민심이 워낙 흉흉하니 황제 폐하와 태후 마마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허어.. 그런 일이.. 그러면 무림맹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차피 뭔가를 바라고 온 거다. 질질 끌 필요 없이 바로 물었다. 뭘 해주면 되느냐고. 그러자 진독평도 곧바로 응수했다.

토벌 관련해서 공정치 못하다는 말이 많으니 손을 좀 봐야겠다고 했다.

“한번 보시지요.”

진독평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현허진인에게 건넸다. 펴보니 거기에는 토벌 관련해서 수정할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무척 우려했지만, 현허진인은 내용을 살피면서 조금씩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하지만 돈은 좀 깨지겠는데?’

규모를 확 키웠다. 이전에도 적은 규모가 아니었는데, 병사의 수를 많이 늘렸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토벌을 제대로 해서 대장군 두궐륭의 위세를 꺾어보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금군이나 태후 쪽에 줄을 댄 곳의 병사들이 주로 동원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의 상당 부분을 무림맹이 내야 했다.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 정도는 낼 수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 다시 다른 곳에서 보충하면 되니까.

하지만 거의 끝 부분에 가자 인상이 딱딱하게 굳었다. 현천문과 제갈 세가를 한곳에 모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유도 분명했다. 세간에 말이 많다는 거였다. 권력으로 작은 문파를 핍박하는 꼴이라 토벌의 의의에 흠집을 내는 일이니 그걸 사전에 막겠다는 것.

‘이런. 이렇게 되면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는데..’

게다가 그다음을 보고는 더욱 놀랐다.

“아니. 백호께서 직접 참가를 하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의 근심이 크시니 괴물을 퇴치하는 데 솔선해서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허진인은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엄청난 욕을 퍼붓고 있었다. 진독평이 제갈 세가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면 일이 완전히 망가진다.

동창의 실세인 진독평이 있는데, 그 무리를 죽을 곳에 밀어 넣을 수가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무림맹이 끝장난다.

현허진인은 일단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이게 실무자들과도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해서..”

“그러시오. 하지만 시간을 길게 드릴 수는 없소이다.”

진독평은 두 시진을 주겠다고 했다. 현허진인은 속으로는 나이도 어린 새끼가 건방지기 짝이 없다고 욕했지만,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진 대인.”

두 시진 후 현허진인은 몇 가지만 손을 보자고 말했다. 개중에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해서 오히려 더 나아간 내용도 있었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꾼 것도 있었다.

진독평은 바꾼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가부를 결정했다. 대부분 인정해주었다. 채 공공에게 지시받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고 하셨지. 온 문주와 그쪽 사람들이 모여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다른 문제야 대충 넘어가도 그만이다. 그런데 쭉 내려가다 현천문과 제갈 세가의 사람을 세 무리로 나눈 것을 보았다.

“이건 왜 이렇소이까? 이들은 말이 많이 나와서 일부러 모아놓은 것인데.”

“그게 이쪽의 병력 배분 원칙이라서..”

진독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허진인은 혹시나 이대로 진행이 되나 싶었다. 그렇게만 되면 어떻게든 수를 낼 수가 있으니까.

진독평과 함께 있는 자들이야 손을 쓰기 어렵지만,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자들은 죽일 수 있다. 그래서 기대를 하고 있는데, 진독평이 붓으로 그 부분에 줄을 쭉 그었다.

“불가!”

협상? 그런 건 없었다. 진독평은 불가하다는 말만 하고는 그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무조건 그 전에 해 놓은 대로 하라는 거였다.

현허진인의 얼굴이 타는 듯 붉어졌다.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으니까.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난 적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설사 무림맹주라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놈이 자신을 완전히 깔아뭉개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뜨거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름을 느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참아야 했다.

“부맹주. 어디가 안 좋소?”

“아닙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가끔 몸이 좀..”

“어허.. 건강이 제일인 법이오. 그렇게 좋지 않으면 어디 풍광 좋은 곳이라도 가서 좀 쉬시구려.”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라는 소리. 현허진인은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먹을 꽉 쥐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진독평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현허진인이 얻은 거라고는 손에 선명하게 난 손톱자국밖에는 없었다.

***

“온 문주님. 인사드리겠습니다. 이형백호 자리에 있는 진독평이라고 합니다.”

온위립은 과례라면서 손을 흔들었다.

“아니 높은 직위에 있으신 분이 왜 이러십니까. 이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진독평은 빙긋 웃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라고 이러는 거였으니까.

이게 채 공공의 명이었다. 온 문주를 지키라는 명령. 그러자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온 문주를 건드리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복잡할 거 없다. 이렇게 자신이 온위립에게 인사만 한 번 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럼 알아서 소문이 날 거다.

‘이제는 감히 온 문주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겠지.’

진독평은 그렇게 말하면서 현천문 사람들을 살폈다. 채 공공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살펴보고는 조금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고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온 문주만 해도 그렇다. 평범한 무림인처럼 보였다. 멋있게 나이가 든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처음 봤을 때 고수라는 느낌은 없었다.

‘기운을 갈무리할 정도란 말인가.’

하지만 가까이서 살피니 자신이 상대하기 버겁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하고 불편한 느낌. 이런 기운은 자신의 사부 말고는 느껴본 적이 극히 드물었다.

‘무림의 전대 고수나 가능할까.’

현허진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제자라는 자들은 또 뭔가. 20대의 나이라고 하는데 자신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자신도 괴물이라고 사람들이 부른다. 30대에 구파일방의 장로를 찜쪄 먹을 수 있는 실력을 가졌으니까. 그런데 그런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겨우 20대의 나이?

‘미친 문파 아냐? 아니 어떻게 이런 문파가.. 어쩐지 공공께서 극진히 대우를 하라고 하시더니..’

이해가 되었다. 이런 문파라면 당연히 극진하게 대우해야 한다.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더구나 문주가 채 공공과는 막역한 사이라지 않나.

동창제독도 채 공공 앞에서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황실에서 채 공공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건 황제와 태후 정도였다.

황비나 황숙들도 채 공공을 어려워했고, 중신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일한 예외라면 대장군 두궐륭 정도?

“제가 이곳에 있는 한 크게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될 겁니다. 만약 무슨 일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말을 높이시니 제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온위립은 말을 낮추라고 권했다. 이래서는 사람들의 이목도 그렇고, 지휘체계에 혼선이 오기 쉽다면서.

“그렇다면 공적일 때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채 공공과 막역한 사이인데 하대를 하라고? 진독평은 아직 한창인 나이에 죽기 싫었다.

진혁은 자신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일이 잘 풀렸다며 좋아했다. 이제는 위험에 빠질 일은 없을 듯했다.

문주와 공공이라는 사람 사이가 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거야 무슨 상관인가. 일만 잘 풀리면 되는 거지.

‘정말 황실에 높은 사람을 알고 있었네. 뻥치는 줄 알았는데.’

진독평은 여러모로 배려를 해주었다. 현천문과 제갈 세가 사람들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따 비슷한 처지였다. 숙소나 음식도 형편없었다. 그것이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말이 좀 나왔다. 제갈 세가에 지나친 특혜를 준다는 거였다.

“아니. 어떤 놈들이 그런 소리를 한다는 거냐?”

진독평은 화를 내며 당장 색출하라고 했다. 모조리 잡아서 본때를 보여주겠다면서. 그때 진혁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오. 하 소협. 어디 말해보시오.”

진독평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차갑고 강인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기강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투를 앞둔 상황이니 사기도 고려를 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맞는 말이지. 하 소협은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겐가?”

진혁은 진독평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특혜라고 이야기가 나오니 그 말이 들어가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진혁은 자신이 가장 위험한 부대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현천문 사람들은 안전할 테니까 여기서 크면 되고, 나는 포인트가 필요하니까 위험한 데 가서 좀 움직이고. 그게 가장 이상적이야.’

위험한 곳에 가서 뭔가를 해야 포인트를 얻기 쉽다. 전에야 병력 자체가 많지 않아서 큰 소용이 없을 것 같았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병력이 꽤 많았다.

이 정도면 포인트가 제법 짭짤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진독평은 크게 감복했다.

‘허어.. 채 공공께서 현천문 사람들 이야기를 그리하시더니..’

문주를 비롯해서 제자들까지 다들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칭찬을 했다. 처음에는 무공이 뛰어나서 그런 줄 알았더니 성품까지 훌륭하지 않은가.

‘대의를 위해서 위험도 감수하다니. 정말 협객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도다.’

진독평은 감탄을 했다. 물론 채 공공은 조금은 다른 의미로 칭찬한 것이었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