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0 / 0150 ----------------------------------------------
지금 잡으러 갑니다.
현천문은 폐허나 다름없어 보였다.
“아니. 고작 그거 관리를 안 했다고 이렇게 되나? 어휴..”
“어머.. 이 먼지 봐.. 청소부터 해야겠어요.”
망가져서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대문과 먼지투성이 건물. 지금까지의 현천문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자들이 달라붙어 정리하니 곧 말끔해졌다. 그리고 제갈 세가에서 힘을 썼는지 재산 문제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역시 힘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 편하다. 그렇게 찾아가서 해명하고 아니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던 관리들이 알아서 정리를 다 하다니.
그렇게 정리를 마친 후 진혁은 온위립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조용한 곳에서 수련을 하려고 합니다.”
“수련을 할 거면 이곳에서 하지 그러느냐.”
그건 곤란하지. 이 사람아. 철각패도로 사혈련 먹으려고 하는 건데. 여기 있으면 시간을 낼 수가 없잖아.
“조용한 곳에 가서 여러 가지 정리를 좀 하려고 합니다.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음.. 뭐. 너야 알아서 잘 하겠다만..”
온위립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연락할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무림맹에서 손을 써서 토벌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면서.
“한 달 내로는 돌아오겠습니다. 그 정도면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달이라면야..”
황실이 반대하는데 토벌이 성사될 리 없다. 설사 무림맹에서 엄청난 로비를 해서 토벌을 한다고 해도 늦춰지면 늦춰졌지, 앞당겨질 리가 있나.
그래도 한 달이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이야기했다. 돈황에서 장안까지 도착하는 게 문제다. 도착만 하면 정리하는 데는 며칠이면 충분할 테니까.
‘철각패도의 내공이면 문제없지. 미친 듯이 달리면 보름이면 충분할 테니까.’
온위립은 잠시 망설이다 허락했다.
“네 실력이 출중한 건 알겠다만 조심하거라. 이럴 때일수록 매사에 조심해야 하느니라.”
그는 갑자기 힘이 생기면 실수를 하기 쉽다며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연륜이 묻어나오는 따뜻한 이야기였다.
“항상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 너는 사형을 닮았으니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게다.”
진혁은 다른 사형제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저기. 우리끼리 괴물을 잡으러 가도 될까요?”
막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다들 초롱초롱한 눈으로 진혁을 쳐다보았다. 다들 실력을 더 키우길 얼마나 원하는지 보였다.
진혁도 좀 안타깝기는 했다. 현천문의 제자들은 전부 오성이 뛰어났다. 특히 호승렴은 천재였다. 투지도 누구 못지 않았고.
하지만 그놈의 내공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아야 했으니 속이 썩어 문드러졌을 거다. 그래서 더 무인들과 마찰이 있었을 것이고.
“도망치는 걸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도 좋다.”
“예?”
진혁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막내가 눈을 껌벅였다. 하지만 온미령은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실력을 과신하지 말라는 거군요. 그렇죠? 대사형?”
“그래. 조금 전에 문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더구나.”
갑자기 힘이 생기면 주체를 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행동은 곧바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괴물을 상대하는 건 항상 신중해야 한다. 저번에도 보았겠지만, 상상하지도 못한 것으로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까.”
“정말 그 술법은 이상했어요. 어유. 느낌이 막 이상한 게 더듬는 것 같고..”
다들 진혁의 말에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분위기였다. 한 명만 제외하고. 호승렴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진혁이 면벽 수련을 한다고 하니 자신도 그 사이에 미친 듯이 수련하겠다는 의지가 넘쳐 흘렀다. 그렇게 해서 언젠가는 진혁을 따라잡겠다는 속셈일 거다.
진혁은 호승렴을 보면서 가볍게 미소지었다. 미안. 나는 니가 따라올 수 없어. 영원히 불가능할 거야. 하지만 그걸 알려주지는 않을 거야. 영원한 희망고문이겠지만, 그게 니 팔자인데 어쩌겠니.
“그것만 명심한다면 괴물을 잡으러 가도 된다.”
“예. 대사형. 명심할게요.”
이들 실력이면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거다. 미노타우르스 같이 아주 강한 놈만 만나지 않는다면.
진혁은 사제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현천문을 나섰다. 불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호승렴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다.
‘뭐. 저 정도 호승심은 있어야지. 그런데 저렇게 계속 크면 황서군이나 남궁표보다 앞설 수도 있겠는데?’
진혁은 만약 토벌이 시작되면 가장 주목받는 게 호승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적당히 실력을 숨길 테니까.
***
장안 부근까지 이동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중간에 몬스터가 있기는 했지만, 피해가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철각패도가 누구인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다. 전부 다 잡으면서 이동하는 거야 어렵겠지만, 몸 하나 움직이는 건 일도 아니다.
“승부는 내일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일단은 장안에 들러 정비를 좀 할 생각이다. 휴식도 취하고 무기도 손을 보고.
사혈련주를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그래도 적을 경시하는 건 금물. 게다가 무슨 함정을 파놓았을 수도 있다.
“몰래 들어가서 조사를 할 수 있으려나..”
은신술을 쓰면 가능은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함정이 있더라도 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는 게 철각패도의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래. 좀스럽게 무슨 조사냐. 그냥 힘으로 때려눕히면 끝이지.”
사파면 사파답게 놀아야 하는 법. 철각패도는 정비를 하기 위해서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밤에 은밀하게 그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습니다.”
흑수 갈맹. 사혈련의 세 장로 중 한 명인 그가 철각패도를 찾아온 것이다.
“오랜만이군. 그런데 내가 오는 걸 감시하고 있었나?”
“언제 오신다는 말씀이 없으셔서 애들을 풀어놓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귀한 분인데 허투루 모실 수야 없지요.”
철각패도는 흑수 갈맹을 쳐다보았다. 같은 말이라도 뉘앙스라는 게 있다. 조롱을 하는 건지, 진심인지, 아니면 공치사를 하는 건지. 조금은 느낌이 달랐다.
진심인 것 같았다. 적어도 갈맹은 철각패도를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철각패도가 도착했다는 걸 사혈련이 안 건 당연한 거다. 철각패도 같은 사람이 움직이는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 무슨 일인가?”
“말씀드린 대로 생각보다 조금 빨리 오신 것 같습니다. 지금 련주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철각패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언제는 오라고 해 놓고 자리에 없다?”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부러 자리를 비우신 게 아니라 중요한 일이 있어서 누군가를 만나러 가신 터라.”
갈맹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싶어서인지 철각패도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철각패도는 계속 기분이 상했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갈맹은 정보를 조금 더 털어놓았다.
그로서는 철각패도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하니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군의 요직에 있는 분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군? 대장군이라도 만나러 간 모양이군.”
철각패도는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사혈련이 황실과 군을 움직이고 있다고 했지? 그럼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사혈련주가 무림맹을 싫어하기는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런 이유에서 토벌을 방해하지는 않았을 거다.
무언가 다른 게 있다. 황실이나 군에 연줄을 만드는 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 재물이 들어가야 가능한 일.
하지만 사혈련 장로의 기억에는 거기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조금 더 정보가 필요했다.
“군이라.. 그런데 사혈련이 황실이나 군과 그렇게 붙어먹는 사이였나?”
흑수 갈맹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황실이나 군과 선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철각패도가 알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듯.
“이쪽 일을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어느 정도는.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갈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철각패도가 야심이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렇제 않다면 사혈련 내부의 일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화가 풀린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적당히 맞춰주었다.
“줄이야 계속 있었습니다만 어디 가까워지기 쉬운 곳입니까.”
그렇다는 건 최근에 힘을 줬다는 얘기로군. 그렇다면 더 수상한데? 무림맹을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 굳이 이 시점에 왜 그랬을까?
사혈련의 세력은 구파일방의 한 곳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것도 투탑인 소림이나 무당에게는 현저하게 밀릴 거다.
가장 바닥이라고 볼 수 있는 공동이나 점창 같은 곳보다는 강할 테지만. 그런데 이번에 무림맹을 제대로 자극했다.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어차피 좋은 사이는 아니었는데 새삼스러울 게 뭐 있겠습니까?”
갈맹은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했지만, 웃기는 소리였다. 무림맹과 사혈련 사이가 좋지 않은 거야 다 안다. 그렇다고 이번처럼 사혈련이 대놓고 무림맹을 엿 먹인 적이 있었던가?
지금까지는 없었다.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런 짓을 하겠나. 그런데도 이렇게 나오는 건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거겠지.
뭐. 그거야 만나서 직접 알아보면 된다.
“그래서 련주는 언제 오지? 아니면 내가 련주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나?”
“사흘 안으로 이곳으로 오실 겁니다. 그동안 편히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갈맹은 아예 숙소를 사혈련 안으로 옮기라고 권했다. 너무 정중하게 대해서 오히려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니. 됐다. 오면 이곳으로 연락이나 주라고.”
“알겠습니다. 시중들 아이를 한 명 보낼 테니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죠.”
“시중은 무슨. 눈을 하나 붙여 놓으려는 거 아닌가.”
갈맹은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본련의 대장로님께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저는 정말 철각패도님이 련에 큰 도움이 되시리라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이 녀석은 처음부터 나를 영입하려고 했었지.
“시중은 됐으니 연락이나 주게.”
그렇다고 감시자를 곁에 둘 수야 없지. 진혁으로 언제 몸을 바꿀지도 모르는데.
“알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갈맹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리고 얘기했던 것보다 하루 먼저 연락이 왔다.
“내일 올 줄 알았더니..”
“철각패도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움직이셨다고 합니다.”
연락을 하러 온 녀석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절도있게 말했다.
“그렇다면 가야겠군. 앞장서라.”
“예. 대장로님.”
사혈련에서는 아예 대장로라고 부르기로 방침을 정한 모양이었다. 명칭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실권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중요하지.
큰소리로 인사를 해대는 사혈련 조무래기들. 은근히 경계를 하는 혈도 임평백. 웃으면서 포권을 했지만, 눈은 뱀 같은 금검 교무국. 그리고 손 까만 애.
철각패도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련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가 안내받은 곳은 련주의 집무실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은 주변에 들이지 않고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처음 만나는군. 내가 사혈련주일세.”
사혈련주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인사했다. 자신이 철각패도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조금은 의식이 되는지 계속해서 철각패도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철각패도요.”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진솔한 대화는 서열을 정한 후에 나올 테니까 지금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다.
“먼저 이야기를 좀 해야겠군. 사주에서의 일은 인상 깊게 들었네.”
철각패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 사혈련주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만 지가 불러서 내가 이곳에 온 걸로 아는 건가?’
눈치를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오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다가 바로 가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고.
야. 내가 련주의 부름을 받고 헐레벌떡 뛰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야? 이런 썅.
“이거 안 되겠네. 일단 오해를 풀고 시작하는 게 순서 같군.”
철각패도는 주먹을 말아쥐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