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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잡으러 갑니다.
“후우.. 이놈의 더위는..”
철각패도는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습하지 않다는 점. 이런 무더위에 습하기까지 했으면 정말 죽을 맛이었을 것 같았다.
이곳에 와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런 날은 정말 에어컨 생각이 간절했다.
“진짜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방에서 침대에 딱 누워서 티비나 봤으면..”
정말 그럴 수만 있으면 금을 산더미처럼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내공이 높으면 한서불침이 된다고 무협지에서 본 것 같은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 딱 그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날은 화장실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냄새나고 불편하고.
그런 상황인데 짜증나는 상황이 닥치면? 자연스럽게 좋지 않은 말이 나가게 된다.
“뭐라? 나보고 사혈련 본단으로 오라고?”
“저.. 저기.. 장로님.”
지부장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저는 그저 전서구의 내용을..”
“알고 있다. 내가 너 보고 언제 뭐라고 하더냐?”
그렇게 말은 했지만, 지부장이 불편해 하는 건 당연했다. 철각패도가 내뿜는 기세를 근처에서 감당해야 했으니까.
평소에 쳐다보기만 해도 살리 떨리는 사람이 철각패도다. 은근히 기세를 흘려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화를 내면 어지간한 사람은 서 있지도 못했다.
그래서 지부장도 지금 다리를 와들와들 떨면서 있지 않은가.
“가지 못한다고 전해라.”
“저기.. 뭐라고 써야 할지..”
요구를 거절하는 내용을 적어 보내야 한다. 무려 사혈련주에게. 지부장이 울상인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모기업 회장에게 시킨 대로 못 하겠다는 메일을 보내야 하는 중소도시 지점장의 심정하고 비슷하려나?’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면 이곳 일이 산적해 있어서 그걸 먼저 처리하고..”
지부장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누가 들어도 구차한 변명인 것 같은 말을. 철각패도는 피식 웃었다.
“이 녀석아. 금검이 여길 다녀갔는데 그런 변명이 통할 성싶으냐?”
“그렇다고 그냥 못 가겠다는 말만 적어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요. 예?”
녀석은 제발 좀 살려달라는 표정으로 애원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봐줄 정도로 철각패도는 인자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갈 수 없다고만 적어 보내랴. 지들이 알아서 해석하겠지.”
“아이고. 그러지 마시고 가서 한 번 만나보시는 게.. 히익..”
지부장은 말을 하다가 철각패도가 노려보자 화들짝 놀랐다. 그는 말이 헛나왔다면서 입을 찰싹찰싹 때렸다. 너무나도 속 보이는 행동.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사혈련주와 철각패도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저런 게 힘없고 아래 있는 사람의 비애.
“그냥 그리 적어서 보내라.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철각패도는 그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건물 안도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있다가는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이도걸을 찾아갈까 생각했었다. 팔찌는 이제 꽉 찬 상태. 정말 실금 같은 부분만 채워지면 2단계도 클리어다.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2단계로 포인트 모으는 게 끝나면 팔찌 두 개가 필요하다. 이도걸이 가지고 있는 팔찌가 필요하게 되는 거다.
‘얘기해서 얻어내든, 아니면 빼앗든.’
그런 이유로 철각패도가 돈황에 아직 머무르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밖에 나가니 도저히 이곳에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곧바로 진혁의 몸으로 이동했다.
- 스으으읏~
잠깐 어지러운 느낌이 나더니 융중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나무가 있고 물이 있으니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그나마 살 것 같네. 그런데 사혈련주는 왜 자꾸 오라는 거지?”
금검을 통해서도 보자고 했고, 거절했는데 또 연락을 해왔다. 이건 무조건 오라는 강요다. 하지야 그럴만했다. 철각패도가 혜성처럼 나타나서는 떡하니 돈황을 먹어버렸으니까.
‘위기감을 느끼는 거겠지. 그런 철각패도를 내버려 두면 자신의 권력에 기스가 간다고 생각할 거야. 그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불러서는 서열 정리를 확실하게 할 생각일 거다. 철각패도의 무공이나 명성을 들었을 텐데, 이렇게 계속 부른다? 자신있다는 뜻이다.
자신이 없었으면 시간을 두고 탐색을 했을 터. 면벽 수련을 한동안 하더니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가?
“어. 대사형 오셨어요?”
“그래. 문주님은 안에 계시지?”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거처에 와 있었다. 제갈 세가에서 작은 장원을 하나 통째로 제공해주었다.
역시나 있는 데는 다르다니까. 진혁은 장원을 쓱 둘러보면서 온위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것 같더구나.”
온위립은 제갈 세가에서 보내온 소식을 알려주었다.
“장소는 대별산. 날짜는 석 달 뒤. 시간은 넉넉한 것 같습니다. 문주님.”
대별산이면 융중산에서도 그리 멀지 않다. 그리고 토벌단을 이끄는 라인업도 대충 나와 있었다.
“무당 중심이군요. 토벌대를 이끄는 건 황서군?”
“무당에서는 차기 도검당주로 황서군을 밀 생각이라고 하더구나.”
황서군이면 본 적 있다. 사협 표국에서 임시 표사로 일하면서 같이 이동했었다. 철각패도로 손속을 나눠보기도 했고.
나이에 비해서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자였다. 성품이나 다른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고. 적어도 위선자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나이나 경력이 좀 부족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삼십 대 초반이니 당주를 맡기에는 조금 이른 게 아닌가? 하지만 다른 곳도 모두 비슷했다. 소림 쪽은 종남의 장세문을 내세웠고, 세가 연합은 남궁표를 내세웠다.
“내 생각이지만 촉망받는 자들에게 일단 기회를 주는 것 같구나.”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문주님.”
괴물을 상대하는 건 결과가 어찌될 지 모르는 거다. 혹시라도 당주를 노리는 거물이 나섰다가 낭패를 당하면 큰일.
그러니 촉망받는 젊은 고수를 내세운 거다. 만약 괴물 퇴치 실적이 다소 부진하더라도 그때 제대로 된 후보가 나서면 되니까.
“그렇게 무당이 황서군을 내세우니 다른 쪽도 거물이 나서기는 부담스러웠겠죠. 그래서 적당한 자들을 뽑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무당의 노림수가 있는 것 같구나.”
사실 황서군에 비하면 두 명은 조금 손색이 있다. 황서군은 실제로 도검당주를 노릴 수도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으니까. 그만큼 승승장구하면서 실적도 잘 쌓아온 자였다.
그에 반에 종남의 장세문이나 세가 연합의 남궁표는 무공이나 명성에 있어서 황서군에 미치지 못했다.
“총인원이 오백 명으로 제한되니 각 문파의 정예를 보내겠지.”
“문파별로 백 명씩 뽑나 보군요.”
인원 제한을 두지 않으면 많은 무인을 동원할 수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래서 참여할 수 인원에는 제한을 두기로 했다.
각 문파가 백 명씩 보내기로 했는데, 제갈 세가도 백 명을 이미 선발해 놓았다. 그중에 현천문의 여섯 명이 들어가 있었고.
‘가만. 이거 잘하면 뭔가 엮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괴물을 잡는 건 현천문을 따라올 사람들이 없다. 그렇다면 이번에 토벌을 하면서 현천문이 엄청난 두각을 나타낼 수도 있다.
“저희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하. 나는 적당히 힘을 보일 생각이다. 너무 감추는 것도 좋지 않지.”
온위립은 이번에 현천문이 어떤 문파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실력을 숨기는 편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삼 할 정도는 숨기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할 것 같구나.”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토벌은 모든 문파 총력전이 될 거다. 무림맹주 자리를 노리는 전초전 성격이니까.
각 문파의 최정예 무사들이 모일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현천문이 두각을 나타내면? 적어도 예전처럼 무시당하지는 않을 거다.
발언권도 어느 정도 있을 생길 것이고. 그렇다고 갑자기 엄청난 대접을 받기는 어렵다. 숫자가 워낙 적어서 문파의 힘으로 따지면 정말 미약하니까.
‘그래도 한명 한명의 발언권은 상당해지겠지. 그러면 목적 달성이지.’
현천문 사람들은 가만히 두어도 무언가 불합리한 일이 있으면 가서 들이받을 사람들이다. 특히 온위립이나 둘째인 호승렴은 체질적으로 그런 걸 그냥 넘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다른 사제들은 안 그러야? 그건 아니다. 나머지 셋도 바른 소리 잘하는 편이었지만, 둘이 워낙 강성이라서 티가 덜 나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 그런데 그 문제도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내공 수위가 30년을 넘어서니 소리를 내지 않게 된 거였다.
“넷째와 막내만 조금 더 수련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더구나. 허허. 정말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허허..”
아마도 내공 수위 30년을 기점으로 무언가가 바뀌는 듯했다. 진혁은 애초에 그 수준을 훌쩍 넘긴 상태라 신음 같은 걸 내지 않은 거였고.
온위립과 호승렴, 온미령까지는 내공 수위가 30년을 넘었다. 호승렴과 온미령은 얼마 전에 넘었는데, 온미령은 너무 기뻐서 울기까지 했다.
여자라서 그런 민망한 걸 참는 게 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제가 둘을 데리고 산에 갔다 오겠습니다.”
“그러려무나. 아예 녀석들까지 경지를 넘기는 게 좋으니까.”
현천문에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문제들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내공 수위를 높이는 게 더 중요했다. 진혁은 둘을 데리고 융중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융중산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색마들이 다른 곳으로 간 거라고도 했고, 괴물들에게 잡혀서 죽었다고도 했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수련을 마치고 현천문으로 가려던 사람들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토벌이 취소될 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게.. 관에서 말이 나온 모양입니다.”
제갈중택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도 이번 토벌에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었으니 실망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괴물을 토벌하는 걸 관에서는 오히려 좋아해야 할 일 아닌가? 하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혈련에서 무슨 일을 꾸민 것 같습니다.”
“사혈련에서요? 아니 사혈련하고 토벌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건 아직 비밀입니다만..”
제갈중택은 온위립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사혈련이 황실과 군을 들쑤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림맹에서 토벌에 성과를 많이 낼수록 황실과 군의 위엄이 훼손되는 거라고 하면서요.”
먹힐만한 이야기였다. 권력자들은 항상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를 꺼리기 마련이다. 그런 존재가 부각되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울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무림인이 토벌에 성과를 내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
사혈련은 그런 부분을 파고들었고, 실력자 몇 명과도 선을 만들었다고 했다.
“말세입니다. 말세. 그런 자들이 어찌 황실에까지..”
제갈중택은 혀를 찼다. 하지만 진혁이 보기에는 딱히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무림맹이나 사혈련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무림맹이 10대 대기업이라고 하면 사혈련은 그 바로 뒤에 있는 대기업이다. 그냥 다 거기서 거기다.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힘쓴다.
‘그러니까 재계서열 11위쯤 하는 대기업이 어떻게든 역전을 노려보려고 정부에 줄을 댔다 이거구만.’
하지만 토벌이 취소되는 건 문제였다. 토벌을 통해서 현천문이 화려하게 등장해야 앞으로 일이 잘 풀릴 텐데, 그 기회가 날아가 버리니까.
진혁은 그날 저녁 철각패도의 몸으로 돌아가 사혈련 지부로 날아갔다.
“장로님... 후우.. 찾으셨습니까?”
지부장은 철각패도가 부르자마자 달려왔다. 얼마나 급히 왔는지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한 채로.
“지금 바로 연락해라.”
“예? 무슨 연락을 말씀하시는 건지..”
“사혈련 본단에 연락해라. 내가 간다고.”
철각패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허공으로 몸을 날리면서 생각했다.
‘사혈련주를 잡자. 아무래도 그래야 일하기가 편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