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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변하는 거 아니겠어요?
일을 마치고 받은 액수가 상당해서 마차를 구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대사형. 바로 출발을 해야겠죠?”
“아니다. 시간이 제법 걸릴 테니 오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내일 출발하는 게 좋겠다.”
진혁은 현천문으로 돌아가 사람들의 상세를 살폈다. 아까 관찰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혁이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가 나빠지는 걸 지연시키는 정도.’
진혁은 문주와 두 사제의 혈도를 통해 내상을 다스렸다. 말 그대로 고치는 건 아니고 나빠지지 않도록 안정시키는 정도.
“대사형..”
넷째인 유호군이 진혁의 손을 잡았다. 기골이 장대한 녀석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덜 다쳐서인지 그나마 상세가 조금 나았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내일이면 치료를 하러 떠날 거야.”
“대사형.. 표국 놈들 짓입니다. 사협 표국하고 여기 무관 몇 곳이 손을 잡았어요.”
진혁은 깜짝 놀라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날 습격했던 놈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사협 표국과 근처에 있는 무관들. 현천문과 악연이 있는 곳들이 아예 작정하고 습격을 한 거였다. 손을 쓴 건 고용한 자들이었는데, 의뢰를 한 놈들이 따로 이야기하는 걸 유호군이 들었다고 했다.
“관에 이야기는 했느냐.”
“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조사를 나왔을 때 전부 이야기를 했단다. 하지만 사협 표국이나 무관은 조사하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미 그들이 손을 다 써놓은 거다.
관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조사하지 않을 거다. 정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지 않는 한 말이다.
“대사형. 원통합니다.”
유호군은 진혁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왜 우리만 당해야 하죠? 저놈들은 이런 짓을 하고도 왜 버젓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겁니까?”
씁쓸했다. 뭐라고 할 이야기가 없었다. 세상이 그렇다고? 녀석들의 세력이 강하고 권력이 있으니까? 소림이라는 거대 문파가 배경이라서?
“이건 옳은 게 아니잖아요. 에? 대사형?”
“옳지 않지.”
진혁은 사제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우리가 죄가 있다면 힘이 없는 거다. 무림에서는 그것도 죄가 될 수 있어.”
무림이 아니라 어디라도 마찬가지겠지. 진혁은 유호군의 수혈을 짚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쉬는 게 좋으니까. 격동을 하면 내상이 도질 위험성도 있고.
분위기가 무거웠다. 뭘 어떻게 해도 밝아질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태는 다음 날까지도 이어졌다.
아침에 융중산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데 연무장 쪽에서 기합 소리가 들렸다. 막내인 안규림이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어제 이야기를 듣고 분했던 모양이었다.
진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사제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 안규림 (남, 19세) 내공 수위 3년
- 성장 가능 등급 : 미정.
다른 건 전혀 변화가 없었는데, 성장 가능 등급에만 변화가 있었다.
‘미정? 전에는 분명히 이류 무인이었는데, 미정이라고?’
미정이라고 하면 정해지지 않았다는 거다. 전에는 잘해야 이류 무인이었지만, 더 높은 경지에 갈 수 있다는 걸로 보였다.
‘맞아.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마차가 도착하고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진혁은 환자들을 마차에 나누어 태우고는 곧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현천문을 떠난 마차 두 대를 은밀히 따르는 자들이 있었다.
***
“대사형.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요.”
온미령이 밖을 살피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혁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말을 탄 자들이 예닐곱 정도 따라오고 있었다.
“잠시 마차를 멈추는 게 좋겠다.”
“대사형. 저쪽은 수가..”
진혁은 온미령의 말을 막았다.
“그럼 이대로 계속 가자는 게냐? 저들은 말을 타고 있다. 우리가 저들을 뿌리칠 가능성은 없다.”
진혁은 마부에게 마차를 세우라고 이야기했다. 누워있던 온위립이 힘없는 목소리로 이야기 헀다.
“몸이 상하면 안 된다. 너마저 상하면 현천문은 누가 이끈단 말이냐.”
온 문주는 혈기를 내세우지 말고 현명하게 대처하라고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혁은 마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 오는 괴한들을 맞이했다. 다가오는 자들은 모두 일곱. 수준은 한 놈이 일류, 나머지는 이류였다.
“무슨 일이시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는 거냐? 야반도주라도 하는 건가?”
정중한 물음에 돌아온 건 조소였다. 놈들은 비릿한 웃음을 띠며 천천히 다가왔다.
“환자가 있어 치료를 받으러 가는 중이오.”
진혁은 다시금 정중하게 이야기했고, 괴한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현천문의 첫째라는 놈이 유생같은 놈이라고 하더니 정말이었구만.”
“형님. 웃기는 놈 아닙니까.”
놈들은 웃었다. 한껏 비웃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니놈들은 이곳을 떠나면 안 되니 다시 돌아가라.”
“그럴 수는 없소이다. 지금 위급한 환자가 있소이다.”
괴한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진혁이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자꾸만 이상한 대답을 하는 게 웃겼던 거다.
“하이고. 이놈 보게나. 이렇게 응? 순진무구해가지고.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사시려고 그러세요. 네?”
두목이 건들거리면서 다가왔다. 두목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이놈만 일류였거든. 두목 놈은 검집으로 진혁을 쿡쿡 찌르려고 하면서 다가왔다. 히죽 웃으면서.
“그거야 당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겠지!!”
진혁이 갑자기 달려들며 두목의 가슴을 찔렀다.
- 푸욱~
너무나도 손쉽게 검이 몸을 뚫고 들어갔다. 두목은 검과 진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건 뒤에 있는 여섯 명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섯 명은 아직도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타핫!!”
진혁이 몸을 날리면서 놈들을 베어 갔다. 여섯 놈은 경지도 높지 않은 데다 기습까지 받아 순식간에 상처를 입었다.
몇 놈이 반항을 해보았지만, 진혁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이미 진혁의 수준은 일류 중에서도 최상급 정도는 되었으니까.
괴물을 상대할 때는 그보다 훨씬 강하다. 초절정 고수 중에서도 상위라고 해도 무방할 거다. 하지만 무공 자체가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 상대할 때는 다소 페널티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네놈들 정도는 한 호흡이면 충분하지.”
진혁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놈들에게 차갑게 말했다.
“대사형?”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온미령과 안규림이 뛰어나왔다. 괴한들에게 당하겠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혁이 놀라운 신위를 선보이며 물리쳤다.
“사주에 다녀오는 동안 기연이 있었느니라.”
진혁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뻥은 치면 칠수록 느는 것 같았다.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온미령과 막내 안규림은 정말 잘 되었다면서 크게 기뻐했다.
“어? 대사형. 그러면 혹시 이놈들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짐작은 했지. 어제도 계속 누군가가 살피는 것 같더구나.”
마차를 구할 때도 꼬리가 붙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 그래서 어제 출발하지 않고 오늘 출발한 거예요?”
“그건 아니다. 문주님과 사제들 상세를 좀 다스린 다음에 움직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이다.”
진혁은 가지고 있는 밧줄로 놈들을 묶으라고 했다. 괴한들은 탄식했다. 이렇게 자신들이 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의뢰인은 진혁만 내상을 입히고 나머지는 다시 현천문에 가져다가 처박아 놓으라고 했다. 그 정도는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온미령이나 안규림이야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고, 진혁의 무공도 다른 이들과 비슷하다고 알려졌다.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빗나갔다.
“네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여기서 바로 죽여도 시원치 않겠지만, 살 길을 열어주마.”
진혁은 운이 좋으면 살 것이고 아니면 짐승의 밥이 될 거라고 말했다.
“차라리 그냥 죽여라. 죽여!”
한 놈이 악을 써댔다. 이곳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 이쪽으로 오길래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따라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일부러 유인한 거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짐승들에게 뜯어먹히는 일만 남게 되었다. 피 냄새까지 이렇게 나니 짐승들이 당장에라도 달려올 테니까.
“그러면 관에 가서 누가 시킨 일인지 전부 이야기하겠느냐?”
진혁의 말에 대답하는 놈은 없었다.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사형. 저들을 죽이거나 아니면 관으로 끌고 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안규림이 저들을 저리 두고 가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온미령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진혁을 쳐다보았다.
“저들은 경고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
관으로 데려가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물론 환자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지만, 그다음에는 움직일 것이다.
“당한 건 돌려주어야 한다. 그게 무림의 법이지.”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온미령과 안규림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자신들의 수준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에게 다 방법이 있으니 나만 믿으면 된다.”
진혁은 두 사제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어서 출발하자고 했다. 마차는 밧줄에 묶여있는 괴한들을 남긴 채 떠나갔다.
***
융중산까지는 제법 먼 거리였지만, 별다른 문제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괴의가 있는 곳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 일대에 사는 사람들이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진혁아. 그런데 네 무공은 어찌 된 것이냐?”
온위립은 대부분 잠든 상태였는데, 깨어났을 때 딸인 온미령이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일단 치료받는 게 중요합니다.”
“혹시 방법을 찾은 게냐? 네 사부가 그리 찾고자 했던 그 방법을?”
운위립은 자신의 치료보다는 해결 방법을 찾았는지가 더 중요한 듯했다. 하기야 현천문의 숙원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맞습니다. 찾았습니다.”
“오오..”
온위립은 진혁의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내가 잘못되더라도 네가 사제들에게 꼭 전수해야 한다.”
온 문주는 방법을 찾았다는 말에 크게 격동했다.
“문주님부터 익히셔야죠. 그러려면 일단 나으셔야 하니까 거기에만 집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진혁을 일단 온위립을 안정시키며 괴의가 사는 곳으로 향했다. 괴의의 거처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깔끔하기는 했지만, 화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수하다는 편이 더 어울렸다.
“어찌 오셨습니까?”
“환자가 있어서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동자가 나와 물었고, 진혁이 나서서 대답했다.
“잠시 이곳에 계시면 의원님께서 오셔서 결정하실 겁니다.”
동자는 그리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왜소한 체격의 노인이 한 명 나왔다. 진혁은 그가 괴의 진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진부 (남, 67세) 의원. 내공 수위 62년
- 성장 가능 등급 : 절정 고수.
의원으로서도 최고의 수준이면서 절정 고수였다. 하기야 그 정도 되니까 이렇게 까탈스럽게 해도 뭐라고 하지 못하는 거겠지.
무림인들이 어디 고분고분한 사람들인가. 치료를 받으러 왔다가 수틀린다고 뒤집어엎으려 했던 놈들이 수두룩했을 거다. 그런 놈들 대부분 괴의에게 직접 혼쭐이 났을 테고.
진혁은 일단 공손한 자세로 괴의에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괴의는 진혁은 본체만체하고는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열더니 안으로 들어가서 환자를 살폈다.
진혁은 뒤따라가서 지켜보았는데, 괴의는 환자들을 그냥 쓱 보더니 다시 나왔다. 다른 마차로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진맥도 대충 짚어보는 듯 보였다. 그래 놓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툭 내뱉었다.
“그냥 가봐라.”
흥미가 없다는 소리였다. 진혁은 괴의의 앞으로 나서며 이야기했다.
“이대로 보내면 후회하실 텐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후회를 한다?”
“예.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후회를 하실 겁니다.”
진혁의 말에 괴의가 히죽 웃었다.
“그래? 어디 말해봐라. 내가 왜 후회를 할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