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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뭔가 바뀐다.
동정 상단의 무사들은 당황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
“칼이 안 들어가!”
분명히 이 정도면 사람이라면 깊은 상처를 입었을 거다. 짐승이라도 가죽을 베고 몸 깊이 칼이 들어갔을 거고. 하지만 갈저는 달랐다. 가죽에 상처만 조금 났다.
게다가 저돌적이었다. 수비를 도외시하고 미친 듯이 덤벼드니 상대하는 무사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원래 미친 듯이 공격만 하면서 달려드는 놈 상대하는 게 제일 까다로운 법이다.
삽시간에 사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죽거나 다친 사람을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 괴물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 무사들은 똑똑히 느꼈다.
“피해. 모두 위쪽으로 올라간다!!”
위쪽이라 함은 진혁의 일행이 지나간 곳이다. 자신들로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이러다가는 모두 죽을 거라는 무거운 감정이 엄습했다.
공포라는 괴수가 내면에서부터 무사들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발이 느려지고 숨이 막혔다. 손이 떨리고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신 차려! 조금만 가면 조사단이 있다. 빨리 움직여!!”
확실히 책임자가 다르긴 달랐다. 그는 그래도 공포에 잠식되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 소리를 지르고 힘을 주어 다그쳤다.
그나마 조사단이 있다는 말에 무사들이 기운을 차렸다. 그들은 있는 힘을 모두 짜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뒤에서 들리는 동료의 소리. 갈저에게 당한 그 소리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하지만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 와드드득
- 까드득 까드득
뼈가 부서지고 딱딱한 걸 이빨로 바수는 것 같은 소리. 무사들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바로 뒤에서 갈저가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목구멍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발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갈저의 쉭쉭대는 거친 숨소리가 바로 뒤에 들리는 듯했다. 어떤 짓을 해도 죽음이라는 사악한 기운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였다.
“어서 이쪽으로!”
바로 그때였다. 조사단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정 상단 무사들은 그 목소리가 천상에서 선녀가 노래 부르는 소리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좌측은 제자리. 우측은 상단 무사를 보호한다. 중앙은 나를 따라 앞으로!”
진혁의 말에 조사단 무사들이 절도있게 움직였다. 그들이라고 갈저를 우습게 보는 건 아니었다. 갈저도 괴물은 괴물. 하지만 두렵거나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조사단 무사들은 적당한 긴장감에 근육이 팽팽해지는 걸 느꼈다. 진혁의 옆에 있던 왕칠이 중얼거렸다.
“이런 기분 오랜만인데?”
“그렇지? 자. 슬슬 가보자고.”
다른 무사가 대꾸하고는 진혁과 보조를 맞추었다. 이곳에 오면서 숱하게 해왔던 일. 그들은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앞으로 나갔다.
다른 무사들에게는 무시당할지언정 스스로에게는 떳떳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늠름하고 의연하게 괴물을 맞이하러 움직였다.
“타앗!”
“하아앗!
짧고 강한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이 힘차게 허공을 그었다.
- 촤아악~
바로 앞에 있는 갈저의 가죽이 베어지면서 녹색 피가 사방에 흩뿌렸다. 쿵 소리를 내면서 쓰러지는 갈저들. 동정 상단의 무사들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은 하지 못했던 놀라운 광경이었다.
엄청난 고수들의 집단처럼 보였다. 조사단의 무사들은 힘 있고 박력이 넘치는 기세로 갈저를 쓰러뜨렸다.
“왕칠, 정씨 아저씨. 셋에 뒤로. 하나. 둘. 세엣!!”
진혁의 말에 옆에 있던 두 무사가 뒤로 빠졌다. 진혁이 앞으로 조금 나가면서 갈저들을 찔렀고, 곧이어 한천위의 검이 사앗 하는 소리와 함께 놈들의 머리를 베고 지나갔다.
허공에 붕 뜬 갈저의 머리.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녹색 피. 환한 달빛 아래 기괴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게 뭐지?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동정 상단의 무사 중 한 명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분명히 자신들보다 한두 수는 아래 있는 무사들이었다. 그렇게 실력이 좋으면 일류 상단에 들어가지 원보 상단 같은 중소 상단에 들어가겠는가.
그런데 지금 보이는 건 뭐지?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상단 무사들은 모두 멍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정리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혁은 동정 상단 무사들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걸어와서는 칼을 휙휙 털었다. 칼에 묻어 있던 녹색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괴물은 저희가 상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동정 상단의 사람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야영지 근처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예? 아니.. 그게..”
호위 책임자는 말을 더듬었다. 그러라고 하기도 뭐했고, 하지 말라고 하기도 뭐했다.
가다가 괴물을 다시 만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보호를 해준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체면은 땅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지는 일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괴물의 공격을 받으면 돕습니다. 언제 어디서 자신들도 괴물의 공격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건 원수지간이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것이 이 땅의 법. 괴물이 지배하고 죽음으로 뒤덮인 이곳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암묵적인 약속.
“이곳은 그런 곳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괴물들의 땅.”
진혁의 말은 상단 무사들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곳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진혁은 무사들의 무리를 가리키고는 지시했다.
“이분들을 모셔다 드리고 오세요. 약속한 장소로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한천위는 대답을 하고는 상단 무사들을 데리고 천천히 이동했다. 상단 무사들은 멀리서 괴물들의 울음 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흠칫흠칫 놀랐다.
그들은 돌아가서 동정 상단 대표에게 증언했다.
“원보 상단의 무사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무예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무시할 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괴물을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습격을 받지 않아서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사들의 얼굴에 서린 공포는 상단 사람들에게도 전염되었다. 그들이 이야기한 내용이 워낙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상자가 났으니 더욱 파급력이 컸다.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은 건 진원휘를 비롯한 경험이 많거나 무공의 고수. 그리고 조사단 사람뿐이었다.
“자네들은 정말 용케 여기를 지나왔구만.”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늘이 도운 거죠.”
진원휘의 말에 목세강이 대답했다. 거대 상단인 천문 상단과 동정 상단의 사람들은 다시는 조사단을 무시하지 않았다.
조사단의 하급 무사라도 상단 사람들이 보는 시선 자체가 예전과는 달라졌다.
***
“왕칠 아저씨. 이야. 정말 실력 좋아지셨네요.”
“그래? 아이고. 자네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정말 기분 좋은데?”
진혁은 정말 감탄하고 있었다. 왕칠은 꾸준히 노력했다.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틈만 나면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그러더니 정말 실력이 놀랍도록 늘었다. 이제는 이류 중에서도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성장 한계에 거의 다다른 거다.
처음에는 삼류 중에서도 나은 편이 아니었으니 대단한 발전을 한 것. 짧은 시간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믿기지 않는 발전이었다.
그리고 실력이 좋아진 건 왕칠만이 아니었다. 조사단 무사들 전체가 실력이 쑥 늘어 있었다.
“사주에서 우리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매일 수련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더라고.”
“하기야. 징그럽게 굴렀지. 크하하하.”
무사들은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다들 크게 웃었다. 진혁은 그동안 자신이 좀 무심했구나 싶었다.
돈황에 있을 때 솔직히 엄청나게 바빴다. 철각패도로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진혁으로 움직여야 할 일도 많았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외부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이에 이렇게 성장을 했다니. 그러면서도 진혁에게 다들 고마워했다.
“다. 하 표사 덕이지. 뭐.”
“맞아. 제대로 된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말짱 꽝이었을 건데 말이야.”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여러분이 해낸 겁니다.”
“에헤. 또 저런다. 하 표사. 그러지 좀 말고 잘난 척도 좀 하고 어? 그러란 말이야.”
사람들의 와하하 웃으며 맞장구쳤다.
즐거웠다. 눈앞에 나타나는 포인트 같은 건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보다는 환하게 웃는 사내들의 얼굴이 눈에 더 들어왔다. 다들 수염이 덥수룩하고 지저분한 얼굴이었지만, 친근하고 정겨웠다.
“자. 그럼 다시 해볼까요?”
“좋지. 하앗!”
진혁의 말에 다들 자세를 잡았다. 아까의 전투도 있고 해서 피곤했을 텐데 모두 신이 난 듯 힘차게 움직였다.
진혁은 돌아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몇 마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제는 크게 지적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저 이들이 열심히 하고 시간이 지나 다음 경지로 가는 것만 남았을 뿐.
“저기 저는 잠시 할 일이 있어서..”
수련이 거의 끝나갈 때 진혁은 조용히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검을 좀 손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몇 명의 검을 가지고 움직였다.
사실 이 검은 손을 볼 필요가 없었다. 마나가 코팅된 게 아니라 중급 마나 스톤을 사용해서 만든 검이니까. 하지만 무사들은 그런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핑계를 대고 나와서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공간을 열었다.
“잠시 넣어 놓고..”
검을 다 넣고는 오크 전사를 찾아 나섰다. 가능한 한 중급 마나 스톤을 많이 확보해 놓을 필요성이 있어서였다.
오크 전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수가 워낙 적기도 했고,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도 한계가 있어서였다.
전처럼 보름이든 한 달이든 시간이 있으면 움직이기가 편할 텐데,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니 먼거리는 갈 수가 없었다.
“아. 이거 참. 뭐 하나 하려면 걸리는 게 왜 이렇게 많지?”
뭔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참 미스터리 했다.
“오늘은 오크 전사는 없는 것 같으니까 돈황 사정을 좀 볼까..”
진혁은 몸을 바꾸었다. 어디론가 쑥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나고는 시야가 바뀌었다. 눈앞에는 끝도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며칠 못 왔지? 다들 기다리겠어.”
철각패도는 몸을 날려 사혈련 지부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지부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이고. 장로님. 연락도 없이 어딜 가셨었습니까요.”
지부장이 달려와서는 난리법석을 떨었다. 다른 녀석들도 걱정을 했다면서 주변을 시끄럽게 했다.
“무슨 일이냐?”
철각패도의 말 한마디에 정리되었다. 사혈련 녀석들은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금검 장로님이 돌아가신다고 하시면서 장로님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래? 그냥 돌아가면 되지 뭐하러 기다려?”
포악한 표정에 냉정한 말투. 사혈련 녀석들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철각패도가 안으로 들어가자 소식을 전했는지, 금검 교무국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바쁘셨나 보군요.”
“토번왕하고 서역 상단들하고 할 일이 있어서..”
“정말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자들을 다 발아래 두셨는지..”
교무국은 아부를 떨었는데, 의외로 스킬이 훌륭했다. 아부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기분을 좋게 했다.
‘역시 사이코패스 새끼는 달라. 가면이 완벽한데?’
“그런데 그냥 가지 않고 왜 기다린 건가?”
“꼭 알려드리고 갈 이야기가 있어서 말입니다.”
금검은 웃었는데, 철각패도는 거게 무척 음침하다고 느껴졌다.
“뭔가?”
“사혈련주님이 한 번 뵙자고 하십니다. 함께 장안으로 가시죠?”
“련주가?”
철각패도의 표정이 굳었다. 사혈련주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혈련주가 부른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자신이 정식으로 임명하지도 않은 장로가 사혈련을 대표하듯 활개를 치고 다녔으니까. 철각패도는 고민이 되었다.
사혈련 장로의 기억이 있는 그는 사혈련주를 만나기가 꺼려졌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가만히 있지 않을 인간이었다. 자신의 명에 복종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복수했으니까.
‘장안으로 가야 하나?’
잠시 생각하던 철각패도는 금검에게 말했다.
“가지 못한다고 전해라.”
내가 뭐 종놈이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게? 나 철각패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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