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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는 표사-55화 (5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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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정리만 되는 거 아냐?

솔직히 좀 어색할 줄은 알았다. 그동안 두 사람 역할을 하는 데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연기는 처음이었으니까. 한 장소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해야 한다니.

“대협.. 잠시 말을..”

“어허.. 이놈이 그래도..”

왔다 갔다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시간을 끌 수가 없다. 한 명 연기하고 재빨리 바꿔야 한다. 한참 있다가 대사가 나오면 누가 들어도 어색할 테니까.

그런데 이게 해보니까 만만치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대충은 생각해 놓았지만, 말을 하다 보니까 헷갈렸다.

게다가 어우. 시야가 휙휙 바뀌니까 토 나온다. 아 씨발 졸라 힘들어.

“대협..”

이런 썅. 철각패도 몸인데 진혁인줄 알고 말을 할 뻔했다. 순간적으로 말을 멈추었으니 다행이지 밖에 있는 사람들이 눈치챌 뻔했다. 후아. 근데 뭐라고 하지?

“대협, 대협 하면서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 넘어갈 줄 알았더냐?”

철각패도는 큰소리를 쳤다. 이 정도면 위기는 넘겼겠지? 아닌가? 뭔가 어색했으려나? 아무튼, 이제 진혁으로 몸을 바꾸고 대사를 칠 차례. 그런데.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가? 아니면 안의 상황이 걱정되어서 살피려고 오는 건가? 일단은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

진혁으로 바꿨던 몸을 재빨리 철각패도로 다시 돌렸다.

“누가 내 경고를 무시하고 이곳에 접근하는 것이냐? 다 죽고 싶은 게냐?”

후다닥 하고 멀어지는 게 느껴진다. 후우. 다행이다.

그런데. 정말 이 짓도 정말 못 해먹겠다. 너무 힘들다. 이제 몸 바꾸는 거 더 했다간 쓰러질 지경이다.

“그래. 어디 그럼 이야기를 해 보거라!”

일부러 그 말을 크게 지르고는 그냥 바닥에 누웠다. 혹시라도 누가 올까 싶어서 철각패도의 몸으로 주변을 감시하면서.

좀 쉬니까 살 것 같았다. 바닥에 몸을 눕힌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지만 밖에서는 이런 상황을 모른 채 수군거렸다.

“이제 이야기가 좀 되는 모양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요.”

“이야기가 잘 되어야 할 텐데..”

미안하다. 그냥 쉬고 있다.

행복이라는 게 정말 사소한 데에서 오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이렇게 누워있는 게 이토록 행복하다니.

그렇게 잠시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밖에서는 이야기가 잘 되는 모양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쉴란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지. 그랬다가는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이제는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할 차례. 준비를 했다. 조금 더 쉬고 싶었지만,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하하하! 그래. 너의 말이 일리가 있도다.”

철각패도의 몸으로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외쳤다.

“밖에 듣거라. 나는 토번왕을 만나고 오겠다.”

철각패도는 뒷문을 쾅 열고 나가서는 공중으로 몸을 뽑아 올렸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절륜한 무공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무시무시한 마두 아닙니까. 무림맹에도 저만한 고수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소이다.”

구룡 상단 사람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진원휘도 비슷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친구인 자하 검선과도 겨룰 만한 상대로 보였다.

자하 검선이라면 무림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실력자. 철각패도는 그만큼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어. 저기..”

누군가 외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문 쪽을 향했다. 거기서 진혁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이 살짝 창백해 보였다.

“아이고. 저 마두의 기세를 감당하느라 몸이 상했나 봅니다.”

아니다. 몸을 하도 바꾸었더니 어지러워서 그런 거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대로 철각패도라는 고수를 상대해서 그런 척했다. 일부러 살짝 비틀거리기도 했다.

“하 표사. 괜찮아?”

조사단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고 묻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괜찮습니다. 이야기만 좀 나눈 건데요.”

“어떻게 되었나?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

4대 상단을 비롯해서 중소 상단들, 서역의 상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잔뜩 기대를 하며 진혁의 말을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오해를 풀 수 있었습니다. 이쪽에서 무슨 수를 쓰려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진혁은 일단 숨을 돌리고 뒤통수를 치려는 게 4대 상단의 수작이라며 크게 노했다고 전했다. 사실이었다. 상단 사람들은 사혈련의 장로들만 빠지면 그럴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점만 해결된다면 검은 형제단이 있을 때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했습니다.”

검은 형제단은 보호세와 통행세를 받았다. 그런데 그 금액을 현저하게 낮추어 주겠다. 진혁은 철각패도가 그리 말했다고 이야기했다. 상단 입장에서는 당연히 좋은 일.

“그게 정말인가? 금액을 거의 절반 이하로 낮추어 준다고?”

“예. 그렇습니다.”

진원휘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

“이상하군. 그렇게 좋은 조건을 제시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대신 조건이 있었습니다.”

상단 사람들은 조건이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면 그렇지. 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하는구나 여긴 거였다.

“지금까지 관행처럼 해왔던 불합리한 일들을 모두 금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불합리한 일들이란 무엇이며 잘못은 어떤 걸 말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아서였다.

진혁은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철각패도가 말한 거라고 하면서. 4대 상단의 중소 상단 쥐어짜기나 떠넘기기 같은 것들이었다.

항상 당연시되었던 일들. 4대 상단은 손해가 날 듯하면 작은 상단을 후려쳐서 손해를 메꾸었다. 그걸 금하겠다는 거였다.

중소 상단 사람들은 4대 상단 눈치를 보느라 소리는 지르지 못했지만, 다들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런 마음은 포인트가 되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물론 조금 손해긴 하다. 하지만 그리하면 보호세와 통행세를 절반 이하로 낮추어 주겠다는 말에 혹하지 않을 수 없다. 뜻밖의 제안에 상단 사람들은 주판을 굴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미 이곳은 사혈련의 세력권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일단은 협조해야 한다.

“거기다가 절반 이하로 낮춰준다면 훨씬 이득이 아닙니까.”

“기왕이면 실리를 얻는 편이 좋을 것 같소.”

상단 사람들은 그 정도 조건이라면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얻게 될 이익이 훨씬 컸으니까.

게다가 남쪽 길리 뚫려서 물류의 이동이 이전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느냐는 반론도 있었다. 사파의 거두이니 쉽사리 말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러자 진혁이 다시 나섰다.

“내용을 정리해서 군 책임자의 공증을 받겠다고 하더군요.”

“군 책임자의 공증을?”

사실 이곳에서 군의 세력은 미미하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군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도 뒤에 군부와 더 나아가 황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4대 상단은 철각패도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원보 상단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도걸과는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돈을 좀 주기로 하고서 검은 형제단을 처리하는 일이나 공증 문제를 봐주기로 한 거였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수군거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원보 상단이 이번에 철각패도와 협상을 해서 일이 좀 묘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원보 상단을 통째로 먹으려던 상단이 어디 한둘인가.

“그래요. 내가 알아보니까 상단주인 서예주와 철각패도가 친분이 있다는 소문도 있어요.”

“예? 아니 그렇다면 이건 문제가 완전히 다른데..”

물론 이 소문은 진혁이 슬그머니 낸 거였다. 철각패도와 서예주가 친분이 있다면 원보 상단은 쉽게 건드리기 어려우니까.

진혁이 협상에 성공하는 걸 보고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 여겼다. 그러자 상단 사람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구룡 상단을 비롯해서 서역의 상단까지. 이전에는 협박을 일삼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에서 먼저 다가왔다.

서예주는 어리벙벙했다. 자신이 그렇게 노력해도 안 되던 일이 한순간에 해결되었다. 서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하는 통에 곤란해질 지경이었다.

“예. 제가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예. 예. 예.”

그녀는 수많은 상단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여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

바로 다음 날 진원휘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원보 상단을 찾아왔다.

“이렇게 하지. 원보 상단이 남쪽 길에 관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겠네.”

진원휘의 말에 서예주가 무척이나 기뻐헀다.

“대신 천문 상단과 동정 상단에게도 그 길의 사용 권한을 주는 걸로. 어떤가?”

“좋습니다. 비율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두 곳이라면 저도 찬성합니다.”

4대 상단 중 두 곳이라면 든든하다. 이렇게 상황이 급진전 된 것은 철각패도의 선언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협잡질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 자신은 패도를 추구한다. 정정당당하게 붙어서 상대를 이기는 건 얼마든지 용납하겠지만, 치졸한 수를 쓴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거기다 서예주와 철각패도는 친분이 있으며, 이번 조사단에 엄청난 금액을 투자했다는 말도 돌았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인가? 철각패도가 조사단에 투자했다는 이야기 말일세.”

“그건 대답해드리기 어렵습니다. 투자자에 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게 상단의 불문율 아닙니까.”

서예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치를 챘다. 이 말이 바로 인정이나 마찬가지라고. 진원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로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협상이 완료되고 난 후, 진원휘는 잠시 사담을 나누었다. 서예주와 진혁과 함께.

“철각패도는 무서운 자로군.”

진원휘의 말에 서예주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이 모든 것이 그자의 머리에서 나온 걸 게야. 투자를 하고 사주의 패권을 차지하고 상황을 이렇게 이끈 것 말이야.”

진원휘는 실로 두려운 인물이라고 철각패도를 평했다.

“특히 이곳의 민심을 휘어잡는 걸 보면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이야.”

“저는 좋은 일 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서예주의 물음에 진원휘는 천천히 대답했다.

“기득권의 부패를 공표하게 하고 그들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어. 그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거야.”

지금까지 이곳을 지배했던 자들은 모두 더럽고 부패한 자들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순식간에 지워버리고 돈을 나누어 주었다.

자신들은 기존 세력과는 다르다. 새롭고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실제로도 지금 사주는 사혈련과 철각패도를 칭송하는 말로 가득했다.

“그렇게 해서 순식간에 민심을 자신들 쪽으로 끌어모았어. 이렇게 조금만 지나면 사주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되네.”

그는 무림맹에서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이곳 사람들의 반발이 클 테니까. 명분이 없는 거다.

“무시무시하고 냉철한 자야. 단순한 무인이나 아니라 정말 노련하고 치밀한 자. 나는 솔직히 그가 두렵네.”

“하지만 협조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서로 이득 아닌가요?”

“그러니까 더 무섭다는 게야.”

철각패도가 이끄는 사혈련은 명예와 인심을 얻었다. 그렇다고 손해를 보았느냐? 그것도 아니라는 거였다.

“어차피 그 돈은 성흥 상단이나 검은 형제단의 돈이야. 자기들은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았지.”

게다가 이번에 남쪽 길이 열리면서 물류 이동이 크게 늘 거라고 했다. 그러면 통행세와 보호세를 절반 이하로 줄여도 전체적인 금액은 더 늘 거라고 했다.

“그 계산까지 이미 끝난 상태지. 거기다가 토번왕과 서역 상단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놨어. 군 책임자인 이도걸과도 마찬가지고.”

진원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이게 한 사람이 단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나?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치밀하고도 능력이 뛰어난 자는 처음 보네.”

진원휘는 아마도 앞으로 무림과 상계가 철각패도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며 부르르 떨었다. 정말로 공포를 느끼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냥 포인트 얻으려고 한 건데.. 이도걸이나 투자한 거는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된 거고..’

진혁은 멀뚱멀뚱 진원휘를 쳐다보았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다.

‘이거 계속 이렇게 둬도 괜찮은 건가?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진혁은 상관하지 말고 포인트만 신경 쓰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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