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는 표사-53화 (53/150)

0053 / 0150 ----------------------------------------------

어떻게든 정리만 되는 거 아냐?

진혁의 눈에는 그 사람의 정보가 보인다. 이름과 나이, 직업, 내공 수위 정도를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제대로 정보가 보이지 않은 건 단 두 명.

그중 한 명이 사협표국의 임시 표사로 장안으로 표행을 갈 때 만난 노인이다. 일부러 접근해서 짐을 들어 주었던 그 노인. 진원휘는 바로 그 노인의 친구다.

‘92세라고 해서 깜짝 놀랐었지.’

그래서 기억에 더 남았다. 이곳의 평균 연령이 40세 정도 된다. 내공이 있는 무림인들은 조금 더 오래 살고. 그런데 내공도 없이 92세? 거의 요괴 수준이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하고 천문 상단이 무슨 관계인 거지?’

의문은 곧 풀렸다. 천문 상단의 지부로 가니 거기에 진원휘가 있었다.

“어서 오게.”

그는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진혁을 맞이했다.

“어? 할아버지.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진원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돈황까지 오는 길은 무척 험난하다. 중간에 괴물도 있고. 건장한 장정도 쉽지 않은 길인데 92세의 노인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직은 돌아다닐 만하네. 이래 보여도 건강 하나는 자신 있다니까.”

진원휘는 자신의 다리를 탁탁 치면서 웃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이 무척 이상했다. 누가 봐도 진원휘를 무척이나 어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천문 상단의 상단주야. 그러니 이 녀석들이 쩔쩔매는 거지.”

진원휘는 껄껄대며 웃었다. 놀람의 연속. 전에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그냥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보였는데 거대 상단의 주인이라니.

“왜? 이상한가?”

“예. 솔직히 말해서 전혀 그렇게는 안 보이셔서..”

“보이는 게 다가 아닌 법이지. 그래. 그동안에 어떻게 지냈나?”

진원휘는 차를 권하면서 물었다. 진혁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대충 뭉개서 말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그걸 듣고 싶은 건 아닐 테니까.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자네를 이렇게 부른 건 제안을 할 게 있어서일세.”

노 상단주가 부른 진짜 목적. 진혁은 경청하겠다고 하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알아보니 자네가 남쪽 길에 대해서 가장 잘 안다더군.”

“아닙니다. 그냥 조사단 일행 중 한 명입니다.”

“겸양도 과하면 예가 아니지. 내가 알아보니 자네만큼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던데? 괴초라는 신기한 풀도 그렇고..”

이미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누가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부에서 새 나간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이쪽에 올 생각 없나? 대우는 무얼 원하든 그것보다 더 주겠네.”

스카웃 제의인가? 다른 것보다 원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도 저런 말을 들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저는 원보 상단과 계약이 된 상태입니다. 게다가 제가 상단에서 뭘 할 수 있다고 고용하시겠다는 건지..”

호위 무사라면 저런 조건을 내세울 리 없지. 짐작 가는 건 있었지만, 그런 건 상대가 직접 말하도록 하는 게 좋다.

“위약금이나 그쪽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지.”

확보한 길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진원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남쪽 길을 우리가 독자적으로 뚫으려고 하네.”

의아했다. 아니 이미 뚫어 놓은 길이 있는데, 그걸 잘 활용하는 편이 더 좋은 거 아닌가? 새로 길을 개척하려면 시간과 돈이 든다.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원보 상단과 손을 잡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흐음.. 이런 이야기를 하기 좀 그렇지만, 원보 상단은 버티기 어려울 게야.”

진원휘는 원보 상단이 길을 개척한 건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걸 지킬만한 힘이 없을 때는 소용 없는 일이지. 빼앗기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맞는 말이다. 성흥 상단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검은 형제단의 습격이 성공했으면 모든 걸 다 빼앗겼을 거다.

그래서 4대 상단 중 한 곳과 손을 잡으려고 서예주가 지금까지 움직인 거다. 그 정도 힘이 있는 곳과 손을 잡아야 버틸 수 있으니까.

“그럼 원보 상단과 손을 잡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서로 이득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머지 세 곳과 싸워야 하는데? 아무리 천문 상단이라도 세 곳과 척을 질 수야 없지.”

다른 곳은 원보 상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단다. 천문 상단은 원보 상단과 그래도 인연이 있어서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독자적으로 길을 확보하려는 거다? 그것도 이상했다.

“왜? 뭐가 그렇게 이상한가? 이해가 안 되는 거라고 있는 겐가?”

“솔직히 굳이 길을 새로 확보하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사정이 있지. 내 개인적인 일이라 말해줄 수는 없지만..”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야기했다.

“원보 상단이 만든 길이라면, 나는 사용할 수가 없어. 자네 말대로 손을 잡으면 가능하겠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먼저 거덜이 나겠지. 허허..”

4대 상단 중 세 상단이 작정을 하고 덤비면 그럴 수도 있다. 진혁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만약 원보 상단이 확보한 길을 지킬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옆에 있던 상단 사람들이 피식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작은 상단이 버틸 수가 있다고 보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그래. 중소기업이 아무리 기술개발 해 봐야 대기업에게 다 빼앗기지. 하지만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개새끼잖아?

진혁은 곧바로 반박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진원휘가 갑자기 호기심 어린 눈이 되었다.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힘들 것 같은데..”

“방법이야 찾으면 됩니다. 지금 서역의 상단과도 이야기가 진행 중입니다.”

진혁은 이곳에서 자리 잡는 건 어렵지 않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원휘와 천문 상단의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니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야.

“서역 상인들과 사혈련, 토번왕이 손을 잡고 검은 형제단과 싸우는 모양새더군요. 그들이 검은 형제단을 이긴다면 이곳의 패자는 그들이 될 겁니다.”

“세 곳이 연합을 해서? 그렇다면.. 흐음.. 그럴 수도 있겠지.”

진원휘가 슬쩍 주변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정도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는 듯 다들 눈을 피했다. 진원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말이 사실인가?”

“예. 사실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이지. 내가 직접 그렇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원보 상단이 서역 상단들과 손을 잡는다면 이곳, 사주에서 자리 잡는 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만 진행된다면 자네 말대로 될 가능성이 있군.”

가능성? 그렇게 될 거다. 하지만 아직도 쉽게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뭘 제대로 모르는 자가 떠드는 말입니다. 이 자가 이야기한 세 무리는 딱히 연결점이 없습니다.”

상단 사람들은 헛소리라고 떠들어댔다. 사혈련과 토번왕이 검은 형제단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없다고 했다.

그거야 니들이 아직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습니다. 손을 잡을 가능성이야 충분합니다. 게다가 서역 상단은 지금까지 4대 상단에게 눌려 왔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만들고 싶을 겁니다.”

진원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래. 일리가 있다. 충분히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진원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네 말이 맞아.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되는 걸 우리라고 가만히 두고 보겠나? 특히 이번에 당한 성흥 상단도 그렇고.”

진원휘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원보 상단이 조사단을 꾸렸을 때, 4대 상단이 모두 주목했지. 혹시라도 길이 열리면 그건 엄청난 일이 될 테니까.”

그래서 진원휘도 계속 주시를 하다가 겸사겸사 이곳까지 왔다는 거였다.

“성흥 상단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소림을 위시한 세력이 움직일 게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소림을 비롯한 여러 문파가 움직인다니?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성흥 상단은 소림 쪽의 지원을 받고 있다.”

소림 세력이라면 9파 1방 중 소림, 개방, 종남, 공동, 곤륜을 말한다. 성흥 상단은 그들의 주요 자금줄 중 한 곳이라는 거였다. 그러니 이곳에 다시 자리 잡도록 그 문파들이 힘을 보탤 거라는 말.

“하지만 이곳까지 지원을 보내기에는 시일이 오래 걸릴 텐데요?”

돈황은 중원에서는 아주 멀리 떨어진 변방이다. 한 문파도 아니고 여러 문파가 모여서 지원을 오려면 한세월이 걸릴 터.

“이미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네.”

이런 썅. 하여간 저놈들은 이럴 때만 잽싸요. 지들 이익이 걸렸을 때만. 가만. 그렇게 되면 이곳 사람들과 토번왕의 무리에게서 포인트를 받게 되기 어려울 수도 있겠는데? 그럼 안 되지.

“사혈련이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 자리를 굳건하게 잡는다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사혈련이 빠르게 검은 형제단을 정리하고 이 지역을 접수한다면? 사혈련과 서역 상단, 토번왕의 연합이 아주 단단하다고 느낀다면?

그러면 소림 세력이 무인들을 지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진혁의 판단이었다. 진원휘도 거기에는 동의했다.

“그렇다면야 부담스럽겠지. 이곳에 와도 얻을 것이 없다면야 뭐하러 무인들을 보내겠나.”

“하지만 상단주님. 검은 형제단의 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게 쉽게 정리될 리가..”

상단 사람들은 계속해서 진혁이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혁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데 진원휘는 계속해서 진혁을 붙잡았다.

“그래? 흐음.. 그런데 자네 우리 상단에서 일할 생각 정말 없나?”

어지간히도 진혁이 탐나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계약이 된 상황이라서..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허허.. 하기야.. 그런데 자네는 왜 그렇게 원보 상단을 위해서 애를 쓰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뿐입니다.”

아. 이제는 이런 개뻥도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다. 표정도 정말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고.

‘허허.. 이런 친구니까 그 녀석도 탐을 내는 거겠지.’

진원휘는 자하 검선이 진혁을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공이 뛰어난 자는 많았다. 하지만 심성이 올바르고 인성이 제대로 된 자?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 찾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진원휘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젊은이를 곁에 두고 쓰면 마음이 든든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때가 아닌 듯했다.

“그래. 오늘 이야기를 나누어서 즐거웠네. 이 늙은이 말벗이라도 종종 해 줄 수 있겠나?”

“시간이 되면 자주 들리겠습니다.”

바쁘면 못 올 수도 있어요. 그리고 당분간은 좀 바쁠 예정입니다. 영감님.

진원휘는 무척 아쉬워하면서 진혁을 보냈다. 그는 멀어져가는 진혁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저런 녀석이 있어야 하는데.. 상황 판단도 잘 하고 심지도 굳고. 재물이나 권력에도 휘둘리지 않으니 믿을 수 있고..”

진원휘는 계속해서 입맛을 다시면서 진혁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오해는 점점 깊어만 갔다.

***

상인은 많은 이익을 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기관리는 필수다. 4대 상단 중 세 곳은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며 현재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복잡하게 돌아가는 터라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 원보 상단도 계속해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다들 원보 상단은 알아서 무너질 거라 보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원보 상단은 큼직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어린아이. 언제든 뺏을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간혹 턱없는 헐값에 확보한 길을 넘기라는 자들도 있었다. 구룡 상단은 아예 노골적으로 협박까지 했다.

“아니.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야? 여기서 원보 상단 같은 작은 곳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나? 어?”

대놓고 협박을 했지만, 서예주는 대꾸하지 못했다. 자그마한 꼬투리라도 잡히면 그걸 빌미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저 꾹꾹 참는 수밖에는 없었다.

“원보 상단은 4대 상단도 하지 못한 남쪽 길을 확보한 상단입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도 살아남았다는데 왜 여기서는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진혁의 말에 구룡 상단 사람들이 벙찐 표정이 되었다.

“저 새끼는 또 뭐야?”

저 새끼? 니들 그러다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 또 할지도 모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