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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는 표사-52화 (5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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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의 지배자.

토번왕은 바위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건물들이 여럿 보였다.

“멈춰라!”

병사들이 창을 내밀며 철각패도를 막았다.

- 스읏~

- 투둑..

철각패도는 대답 대신 손을 쓱 그었고, 중간이 잘린 창이 바닥에 떨어졌다. 당황하는 병사들. 철각패도는 병사들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 삐이익~ 삐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뛰어 나왔다. 철각패도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유롭게 걸었다.

병사들은 조금 뒤에서 주춤거릴 뿐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조금 전 손을 허공에 대고 쓱 그었는데 창이 잘렸다. 그런 고수에게 어떻게 덤비겠는가.

“무슨 일이냐?”

병사들과는 차림새가 다른 자가 나왔다. 부관이나 장수 정도의 급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의 호통에 병사 한 명이 다가가더니 귓속말을 했다.

“멈추시오. 뉘신데 이곳에 와서 이리 행패를 부리는 게요?”

“토번왕을 불러 와라.”

철각패도는 대답 대신 명령을 했다. 그 말에 병사들의 기세가 조금 달라졌다. 분노, 격한 감정. 그런 것들이 표정에 나타났다.

토번왕이라는 자를 조금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이들에게 이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철각패도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행패를 부린다고 소리를 친 장수의 몸이 붕 뜨더니 철각패도의 손을 향해 날아왔다.

장수는 버둥거리면서 몸부림을 쳤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철각패도의 손을 향해 허공을 날아갔다.

“어.. 저거..”

병사들은 당황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광경을 언제 본 적이 있겠나. 무슨 수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공포의 무거운 그늘에 짓눌렸다.

장수는 이내 철각패도의 손에 잡혔다. 갑주를 걸친 장수를 손에 든 철각패도는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토번왕!! 어서 나와라!!”

커다란 소리가 바위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병사들은 내공이 섞인 사자후에 정신이 멍해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병사들 사이로 덩치가 커다란 중년인이 한 명 걸어 나왔다.

“당신이 철각패도구려.”

사자를 닮은 사내였다. 커다란 눈과 풍성한 수염. 거칠고 사나운 야생의 느낌을 풀풀 풍기는 그런 사내. 그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모두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가 가르랑다냐?”

“그렇소.”

철각패도는 손에 쥐고 있던 장수를 휙 던졌다. 병사 여럿이 장수를 받았는데, 던진 힘을 이기지 못해 우르르 쓰러졌다. 하지만 어디를 다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힘 조절을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뻔한 거 아니겠나. 그것보다..  여기서 들을 텐가? 아니면 안에 들어가서 들을 텐가?”

토번왕 가르랑다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철각패도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본거지에 혼자 쳐들어와서는 이토록 무례하게 굴다니.

“이런 미친놈을 봤나?!”

장수로 보이는 사람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뛰쳐나왔다. 하지만 철각패도의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 퍼엉!

철각패도가 손을 뻗자 커다란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장수는 마치 말에 들이받힌 것처럼 공중을 날아갔다.

“아무래도 안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군. 어디로 가면 되나?”

철각패도는 어서 안내를 하라고 토번왕에게 재촉했다.

“안됩니다. 저 자를 어찌 믿고.”

“믿지 않으면 별다른 수가 있느냐. 별일 없을 테니 여기서들 기다려라.”

토번왕은 부하들을 달랬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는 아는 거다. 이 정도 무위를 선보인 건 경고라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의 건물로 안내했다.

부하들은 모두 성난 눈으로 철각패도를 노려보았다. 다들 기골이 장대하고 무척 강인하게 생긴 자들이었다.

“좋은 부하들을 두었군. 이 정도 했는데도 기세가 죽지 않다니.”

“토번의 후예를 얕보지 마시오. 이 정도에 굴복할 용사들이 아니오.”

철각패도의 중얼거림에 토번왕은 힘을 주어 말했다. 웃기는 녀석. 그래. 그렇게 말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곳이오.”

철각패도는 토번왕이 가리킨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보다는 조촐했다. 화려한 장식이나 값비싸 보이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토번왕의 성향이 어떤지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오. 왜 이곳까지 와서 이러는 건지 말해 보시오.”

토번왕은 당당한 자세로 말했다. 눈에서는 정기가 흘렀고 어떤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철각패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너희 같은 족속들을 잘 아는데..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

징한 놈이었다.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도 쉽사리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토번왕은 바닥에 누워 쿨럭대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입에서 피를 토했다.

“차라리 죽여라!!”

아직도 기세가 죽지 않은 모습.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내가 왜 얼굴을 때리지 않는지 아느냐?”

“...”

토번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너희에게 살 길을 열어주러 온 거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런 자가 이런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철각패도는 혀를 찼다.

“이봐. 토번왕. 행패는 니들이 먼저 부렸잖아. 검은 형제단을 도모하자고 했는데 왜 깽판을 치냔 말이다.”

“원래 우리가 제거하려고 했던 자들이다. 원래 우리의 전과가 되어야 할 자들이니 우리 권리를 찾으려고 한 것뿐이다.”

항상 그렇다. 욕심이 문제인 거다. 토번왕도 이래저래 이야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이 얻을 게 줄어들어서 이러는 거다.

“너희 없어도 얼마든지 검은 형제단을 없앨 수 있다. 나 혼자서도 가능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건 너도 동의하지?”

토번왕의 멱살을 잡고 눈앞까지 끌고와서 말했다.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내뿜은 기세는 살벌했다. 토번왕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보았으니까.

“내가 너의 얼굴을 건드리지 않은 건 너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함이다.”

토번왕은 수긍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떡이 되도록 패 놓고 체면을 살려준다고?

“소리를 차단했으니 밖에서는 여기서 벌어진 일을 듣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지.”

철각패도는 그냥 다 죽일 수 있는 데도 이렇게 하는 건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이야기가 된 대로 따라라. 그러면 너희에게도 좋을 것이다.”

토번왕 심각하게 갈등하는 게 보였다. 이 정도 했으니 이제는 당근도 좀 줄 때다.

“나는 너희들이 그렇게 꼬장을 부려도 될 상대가 아니다. 내 성질 같았으면 이곳을 폐허로 만들었을 거다. 하지만..”

철각패도는 토번왕의 눈을 노려보았다.

“너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이런 번거로움을 감수했다.”

그러면서 토번왕에게 검을 하나 툭 던졌다.

“너희의 원래 고향은 이곳보다 훨씬 남쪽이라고 들었다. 맞느냐?”

“그.. 그렇다.”

“그리고 그곳은 괴물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간다고 하더군.”

철각패도는 검을 가리켰다.

“그 검은 괴물을 벨 수 있는 보검이다.”

괴물을 벨 수 있다는 말에 토번왕의 눈이 커졌다. 그게 사실이라면 무가지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철각패도는 토번왕의 표정을 보고 핫산이 약속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믿기지 않으면 직접 보여줄 수도 있다. 그 검이 일반적인 검과 어떻게 다른지.”

토번왕은 온통 검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정말 괴물을 베는 보검인지 확인하려 했다.

“너희가 검은 형제단을 도모할 때 함께 하면, 이 검을 꾸준히 제공해 줄 생각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로 이런 검을 계속 주겠다는 말입니까?”

토번왕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뭐하러 헛소리를 하겠느냐. 너희들 그냥 다 죽이면 그만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무서운 자였다. 괴물보다도 훨씬 무서운 게 이자일지도 모른다고 토번왕은 생각했다.

“이 검을 가지고 고향으로 가라. 그리고 거기 사는 동포들을 구해라.”

“아.. 동포들을..”

토번왕은 흔들렸다. 철각패도는 닭살이 돋는 걸 느꼈지만, 장중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너희는 토번의 영화를 다시 일으키고 싶은 거 아니냐.”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철각패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여기서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다짐했다. 오그라드는 말이지만 해야 한다고.

“이 검을 가지고 괴물을 처치하는 너와 부하들을 생각해 봐라. 그걸 고향 사람들이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신의 군대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고.”

토번왕의 눈이 몽롱해졌다. 이제 넘어왔다. 섭혼술이 제대로 먹혔다.

“신의 군데.. 신의 군대..”

토번왕이 미소 지었다. 검을 들고 괴물을 물리치며 고향 사람들을 구원하는 광경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철각패도는 결정타를 날렸다.

“나를 믿고 따라라. 그러면 과거의 영화를 되찾을 수 있다. 나를 따르겠느냐.”

“따르겠습니다. 철각패도님을 따르겠습니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섭혼술은 성공 확률이 극히 낮았는데, 이 정도면 잘 된 편이다. 먼저 두들겨서 정신이 없게 만든 다음, 욕망을 부추기면서 술법을 걸었다. 그게 성공 확률을 높였다.

“그러면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러면 너는 토번의 영화를 되찾고 진정한 토번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철각패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짓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토번왕 가르랑다가 세력을 키우면 키울수록 자신에게는 이득이다.

그 사람들을 통해서 포인트를 얻을 수 있으니까. 이게 칸이 찰수록 점점 더 많은 포인트가 필요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짓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다.

‘하이고. 참 세상 살기 힘들다.’

철각패도는 그렇게 푸념하면서 문을 나섰다. 나머지는 토번왕이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서예주는 4대 상단 중 한 곳과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천문 상단. 하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가씨.”

“아니에요.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예요.”

홍 무관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른 4대 상단과 척을 져야 해서 어렵다는 거 아닙니까. 천문 상단 한 곳이 다른 세 곳과 척을 질 리가 없습니다.”

성흥 상단을 제외한 세 곳이 이미 말을 맞춘 모양이었다. 세 상단의 연합과 손을 잡자고 제안을 해왔다.

원보 상단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조건이 너무나도 나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단 세 곳이 뭉친 이상 저희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바바 상단과 손을 잡으면..”

“아시잖습니까. 바바 상단은 중원에는 아무런 거점이 없습니다.”

서예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저들끼리 뭉치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인연이 좀 있던 천문 상당까지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늘 그래 왔다. 이익을 위해서는 저런 행태를 보인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서 4대 상단의 두꺼운 벽을 아무도 뛰어넘지 못한 거다.

올라오려고 하면 힘을 합쳐 눌러버리니까. 이러다가는 빼앗기는 걸 오히려 걱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데 숙소로 일단의 무리가 찾아왔다.

“아니. 천문 상단의 지부장이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서예주는 혹시 자신들과 손을 잡으러 온 게 아닌가 싶어서 크게 환대했다. 하지만 지부장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여기 혹시.. 하진혁이라는 분이 계십니까. 현쳔문 분이라고 하던데..”

“예? 제가 하진혁입니다만..”

다들 진혁을 쳐다보았다. 지부장은 후다닥 진혁 앞으로 달려오더니 급히 물었다.

“혹시 진원휘라는 분 아십니까?”

“진원휘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진원휘? 누구지? 계속해서 생각했는데, 갑자기 머리를 탁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아. 그 할아버지.”

할아버지라는 말에 지부장은 놀란 눈이 되더니 진혁의 손을 잡았다.

“저랑 같이 지부에 좀 가시죠.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 무슨 일이신지..”

“가서 들어보시면 압니다. 하 대협을 저희가 모시는 거니 걱정 마시고 가시지요.”

진혁은 얼떨결에 천문 상단의 지부장을 따라 나섰다. 사람들은 모두 멍하니 진혁을 쳐다보았고, 진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뭐지? 그 할아버지가 뭐가 있는 건가?’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문 상단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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