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 / 0150 ----------------------------------------------
사람은 변할 수도 있기는 한데..
이동한 거리가 비슷해서인지 다들 비슷한 때에 야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어지럽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 물건들과 시체.
“어떻게 된 거지?”
“뭐야? 어? 이거 뭐냐고?”
진혁은 오면서도 계속해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감지를 해봐도 몬스터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지? 내 감각에 이상이 생긴 건가?’
알 수 없었다. 진혁은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괴물의 습격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갈저야? 당강?”
무사들은 뭐가 습격한 거냐고 물었다. 그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이번 조사만 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갑작스런 습격이라니.
놀이나 오크? 아냐. 그런 건 아니야. 그러면 혹시 미노타우르스가?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그런 놈들이 왔던 흔적이 아니야.
몬스터가 왔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곳에서 버텼을 거다. 어지간한 습격이라면 본대 전력으로도 지금까지 버틸 수는 있을 거다. 목세강과 무사들이 있으니까.
그런데도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건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는 거다.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상황이었을 테니까.
‘그럼 어디로 갔지?’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면 흔적이 남는다. 진혁은 살피는 범위를 넓혔다. 야영장 안이 아니라 밖을 살폈다.
“이쪽이다. 이쪽으로 이동했어.”
사람들이 이동한 흔적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진혁의 주변으로 모였다.
“어. 맞네. 저쪽으로 간 것 같아.”
“어? 저쪽은?”
그쪽은 녹색 줄무늬 놀의 마을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괴물의 마을. 굳이 괴물의 소굴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다들 그 방향을 보면서 웅성대고 있는데, 진혁이 바로 지시를 했다.
“일단 확실하지 않으니 무리를 셋으로 나눕시다.”
진혁은 나갔던 무리 중에서 둘을 좌우로 보냈다. 앞쪽에서 왔으니 움직였다면 옆이나 뒤쪽일 터.
“나머지는 나와 함께 이 흔적을 따라갑시다.”
먼저 일행을 발견하는 쪽이 호각을 불기로 했다. 급박한 상황. 사람들은 진혁의 말에 따랐다.
무공이나 조사단 내에서의 공식적인 위치는 한천위가 높았지만, 진혁의 말에 이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은연중에 진혁이 사부 같은 위치에 있기도 했고, 지시가 지금 상황에서 적절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려갔을까.
“칼 소리가 들린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진혁은 조금 더 속도를 높이라고 명했다.
조금 더 가자 중간중간 널브러져 있는 시체가 보였다. 조사단의 무사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복면을 하고 있었는데, 복장과 무기도 아주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진혁과 일행은 나는 듯이 달려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일단의 무리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버텨라! 신호를 했으니 곧 나간 사람들이 돌아올 거다!”
홍 무관이 사람들을 지휘하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힘겨웠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도망쳐 그나마 이곳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서예주의 판단이 옳았다. 덕분에 아직은 살아있을 수 있었고.
그녀의 판단은 효과가 있었다. 녹색 줄무늬 갈저가 중간중간 나타나자 적도 당황했다. 괴물은 적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덕분이 어찌어찌 이곳까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였다.
“차핫!”
“모두 없애 버려!”
적의 거센 공격이 조사단을 휘몰아쳤다. 적의 수는 200여 명. 게다가 하나같이 수준이 높았다. 목세강과 비견될 만한 고수도 두엇 있었고.
반면 본대에 남아있는 사람 중 무사는 50여 명. 목세강이 고수이기는 했지만, 열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목세강은 두 명의 상대편 고수에게 잡혀 다른 곳에는 정신을 돌릴 여력이 없었다.
‘젠장. 어디서 이런 놈들이.’
목세강은 상대의 검을 피하며 이를 갈았다.
이놈들은 절대로 평범한 도적 떼가 아니었다. 도적 떼에 이렇게 고수가 많다고? 웃기는 소리다. 이 정도 고수들이라면 도적 떼를 하는 것보다 많은 돈을 벌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게다가 자신을 막고 있는 두 놈. 이놈들은 어지간한 문파의 장로급이다. 이런 전력이 사람은 거의 다니지 않는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다.
‘정말 두 놈만 아니었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한 놈이라면 어떻게든 수를 낼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둘이 덤비니 이들을 막는 것만 해도 힘겨웠다.
사람들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죽음의 향기가 목줄을 움켜쥐었다. 사신의 손이 심장을 쥐어뜯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목소리.
“전원 전투 준비!!”
진혁의 외침에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며 소리를 질렀다.
“우와아아!!”
“와아아!!”
갑작스러운 함성에 적들이 당황했다. 거기에 진혁의 명령이 다시 떨어졌다.
“공격!!”
진혁이 먼저 검을 들고 달려나갔다. 진혁을 꼭짓점인 쐐기 모양으로 무사들은 달려들었다. 그들이 얼굴에는 망설임이나 두려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동안 생사를 함께해 온 동료를 구해야겠다는 일념만 가득했다.
일방적으로 공격하던 적은 갑자기 뒤에 나타난 진혁 일행에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무리를 둘로 나누어 진혁 일행을 막았다.
진혁은 달려가며 반지를 끼고 봉인을 확 풀었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마나를 전부 검에 끌어모았다.
- 채앵!
첫 충돌. 거기서 희비가 완전히 갈렸다. 적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형편없이 무너졌다. 정말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처럼 와르르 쓰러져버렸다.
“우현은 본대 방향으로, 좌현은 조금씩 뒤로!”
진혁은 적의 진형을 뚫고 들어가서는 완전히 헤집어 버렸다. 진혁의 지휘 아래 무사들이 움직였고, 적은 완전히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후퇴해라. 후퇴해라!!”
적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황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진혁은 적을 뒤쫓는 대신 일단 본대와 합류했다.
“괜찮습니까? 다들 무사해요?”
“대부분은. 약간의 피해가 있기는 했지만..”
목세강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나마 피해가 적기는 했지만, 죽은 자도 제법 되었다. 진혁도 이를 악물었다. 장안에서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차가운 땅바닥에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누굽니까? 어떤 놈들이에요?”
한천위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누군가 옆에서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았다. 다른 무사들의 기세도 비슷했다. 동료가 쓰러져 있는 모습에 다들 눈이 돌아갔다.
“일단 정리를 합시다. 저렇게 놔둘 수는 없으니까.”
사람들은 분을 삭이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크게 다쳤지만, 다행스럽게도 목숨은 부지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십여 명의 동료가 저승으로 떠났다.
화장을 했다. 괴물이 득시글대는 곳에 묻을 수는 없었다. 음식을 잔뜩 만들고 시체와 함께 불을 붙였다.
“잘 가시게.”
“가다가 출출하면 음식들 먹고. 어? 맘껏 먹으..”
어제만 해도 함께 웃었는데. 같이 수련하면서 실력이 늘었다고 좋아했는데. 지금은 저기에 누워 있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길이 하나같이 붉었다. 처연한 표정으로 뜨거운 동료의 마지막을 쳐다보았다.
***
철각패도는 적의 시체에서 걷어낸 옷가지나 무기를 들고 돈황으로 달렸다. 돈황에 있는 사혈련 지부의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간 그는 가지고 간 물건을 바닥에 툭 던졌다.
“이 지역에 이런 거 쓰는 놈들이 어떤 놈들이냐?”
“뭐야? 이놈은?”
덩치가 산만한 놈이 눈을 부릅떴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를 부리느냐는 표정이었다. 다음 순간 그놈은 정신을 잃었다.
- 뻐억!
- 콰앙!
놈은 철각패도의 손바닥에 얻어맞고 공중을 날아 벽과 충돌했다. 다들 눈만 껌뻑였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사혈령 사주 지부의 사람들 머리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에게 말을 많이 하게 하지 마라. 누구냐?!”
묵직한 음성이 웅웅거리면서 사람들의 머리를 울렸다. 사람들은 후다닥 그 자리에 엎드렸다. 자신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고수가 강림을 한 거였다.
지부장이 엉금엉금 기어서 물건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건들을 살폈다.
“이건.. 검은 형제단..”
“검은 형제단?”
지부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이쪽에서는 꽤나 큰 세력을 일구고 있는 무력 집단입죠. 회족이 많기는 한데, 다른 데서 죄를 저지르고 합류하는 놈들도 있는 곳입니다요.”
이곳에서 여러 이권에 개입하는 몇 개의 세력 중 하나라고 했다. 그렇다면 딱히 원보 상단을 공격할 이유는 없었다.
“그놈들이 사용하는 게 확실하다는 거지?”
“예. 이 표식과 칼은 그놈들만 사용하는 겁죠. 예.”
이유가 있다면 누군가의 의뢰를 받은 것. 대충 짐작은 갔지만, 그래도 확인차 물어보았다.
“그래? 그럼 누가 거기에다가 의뢰를 했는지도 알 수 있나?”
“그건 알아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손을 쓰기 어려운 곳이라서..”
그렇다면 직접 가서 알아보면 된다.
“그놈들 본거지가 어디지?”
“저기.. 그 놈들은 정말 미친 놈들입니다. 혼자서 가시는 건 위험한..”
- 콰앙!
철각패도가 손을 내리치자 돌바닥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어디냐?”
“예. 거기가 어디냐 하면..”
철각패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거지를 알았으니 가서 물어보면 된다. 밖으로 나가는 그를 향해 지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철각패도 장로님이 아니신지..”
“맞다.”
지부장은 다른 말을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철각패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검은 형제단의 본거지는 돈황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부장이 일러준 곳으로 가니 누가 봐도 여기가 본거지겠구나 싶은 곳이 있었으니까.
- 콰앙!!
정문이 박살 나며 나무가 흩날렸다. 철각패도는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갔다.
- 삐익!
“침입자다!”
안에서 사람들이 뛰어 나왔다. 철각패도는 태산처럼 그 자리에 굳건하게 서 있었다.
“누구냐?”
휘어진 칼을 든 놈이 말했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칼과 똑같이 생긴 칼. 철각패도는 칼과 옷가지를 바닥에 던졌다.
“이게 너희들이 쓰는 물건이 맞냐?”
하지만 건물에서 나온 검은 형제단 사람들은 철각패도를 노려보기만 했다.
“누구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보아하니 한어를 할 줄 아는 놈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말하는 건 아주 소수였고, 귓속말로 뭔가 수군거리는 놈들이 있었다.
“너희는 대답만 한다. 저거 너희들이 쓰는 거 맞지?”
대답 대신 몇 놈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그래. 그것도 대답이 될 수 있겠구나.”
- 퍼버벙!
손을 몇 번 앞으로 뻗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달려오던 세 사람이 세 방향으로 날아갔다.
건장한 남자 셋이 피를 토하면서 허공을 날아가는 모습은 주변의 분위기를 싸늘하고 섬뜩하게 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
귓속말이 오간 후 한 명이 나섰다. 대답은 옆에 있는 어린아이가 했다.
“이분이 책임자다.”
“여기 있는 사람이 검은 형제단의 전부냐?”
아이가 속삭이고 남자가 말을 했다. 그걸 다시 아이가 이야기했고.
“왜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장과 많은 전사들은 지금 이곳에 없다.”
“이런.. 때가 좋지 않았군.”
다른 일이 있거나 아직 복귀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철각패도는 혀를 찼다.
보아하니 쭉정이들만 있어 보였다. 무력도 약하고 별 볼 일 없는 놈들. 그런데 책임자라는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하면 전사들이 와서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닥쳐라!!”
철각패도는 소리를 질렀다. 내공이 실린 소리에 건물이 드드드드 흔들렸다.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감히 철각패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잘 듣고 똑바로 전해라.”
“예. 예..”
철각패도는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남쪽에서 온 사람이 이걸 주고 갔다고 해라. 그러니 여기서 모두 기다리라고 해라. 내가 다시 올 때!”
모두 숨을 죽였다.
“이곳은 공동묘지가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