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는 표사-36화 (36/150)

0036 / 0150 ----------------------------------------------

넉넉하게 갚아줄게.

잠을 자던 서예주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어스름한 천막 안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형태였다.

“대협. 어떻게 이곳까지.”

그녀는 급히 겉옷을 걸쳤다.

“뭐.. 이쪽에 볼일이 좀 있어서.”

“이곳에 볼일이요?”

아무도 다니지 않는 괴물들만 득실대는 곳에 볼일이 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철각패도도 그런 걸 의식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조사할 것이 있어서..”

“아.. 괴물에 대해 조사를 하시나 보군요.”

서예주는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괴물을 조사하려면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힘드니 직접 나선 것이냐고.

‘똑똑하니 알아서 핑곗거리도 만들어주고. 편한 점도 있군.’

“그렇다. 괴물과도 관련이 있지. 조사도 하고 여러 가지 알아볼 것도 있고.”

모두가 사실이다. 철각패도가 아니라 대부분 진혁이 하는 거지만. 그런데 눈치 빠른 서예주는 철각패도의 말이 진실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 정말 괴물과 관련해서 뭘 조사하시는구나. 그래도 이곳까지 오신 건 나를 계속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지?’

서예주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연락이라도 미리 하고 오시지 그러셨어요?”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 게다가 이 일은 아무에게나 이야기하면 안 된다.”

철각패도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종남의 무리가 있다.”

서예주는 그 한마디에 모든 걸 추측했다. 빠져나갔던 건 속임수이며, 몰래 이곳으로 와서 습격할 생각이다. 여기까지 온 건 얼마 되지 않을 거다.

길게 끌 이유가 없으니 공격할 시기는 내일이나 모레. 거기까지 중얼거리는 걸 듣고 철각패도는 혀를 내둘렀다. 정말 머리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였다.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중얼거리던 서예주의 표정이 점점 구겨졌다. 해결할 방법을 떠 올려 봤지만, 방법이 없었으니까. 서예주는 고개를 들어 철각패도를 쳐다보았다.

“대협. 저희를 좀 도와주세요.”

서예주의 안색이 무척 창백해 보였다.

“지금으로써는 저들을 상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전력 차가 너무 커서.”

합류하지 않은 전력과 맞붙어도 다소 우세한 정도다. 그런데 종남의 무인들이 포함된 정예 200여 명이 추가되면 필패.

“일단 내일 저녁에 습격할 것 같으니 준비를 하고 있거라. 반드시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만약 정보가 새나가면 더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서예주는 홍 무관을 비롯한 심복 몇 명의 이야기를 말했다. 목세강의 이름까지는 나왔는데, 진혁의 이름은 없었다.

“목세강의 일행들은 어떠냐?”

“일단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려구요. 목 대협은 믿을만하지만, 나머지는 좀.. 게다가 이쪽에 심어 놓은 자들도 있을 테니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맞는 말이기는 한데 좀 답답했다. 열심히 돕는데도 이상한 생각만 하니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눈치가 너무 빨라도 탈이다. 진혁이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고 의심을 하는 거니까.

‘이 아가씨야. 선의의 거짓말도 있는 거지. 그런 건 좀 대충 넘어가 줘야 하는 거라고.’

물론 이해는 되었다. 온갖 추잡한 술수가 난무하는 상황이니 사람을 쉽게 믿기는 어렵겠지. 어떻게 보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는다는 게 좀 불쌍하기도 했다.

“만약 200여 명이 공격을 해온다면 목세강과 정예 인원을 추려 도망쳐라. 그렇지 않고 다른 일이 벌어진다면 상황을 보아 대처하면 된다.”

진혁은 정 안되면 철각패도의 몸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 그것보다는 테스트도 하고, 포인트도 왕창 얻을 방법을 해 볼 생각이었다.

“예. 대협. 정말 감사해요.”

서예주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하기야 이런 상황이 힘겹기도 하겠지.

“나는 할 일이 있으니 이만 가야겠다. 아마도 잘 해결 될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대협도 몸조심하라면서 걱정하는 서예주를 뒤로 하고 철각패도는 밖으로 나왔다. 은밀하게 움직인 그는 갈저와의 전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갈저의 시체들이 즐비했다.

“어우.. 이거 무지하게 찝찝하네.”

철각패도는 갈저의 시체를 뒤졌다. 마나 스톤을 찾기 위해서였다. 예상한 대로 모든 시체에 마나 스톤이 있는 건 아니었다.

“덩치도 크고 단단하게 생긴 놈에게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마나 스톤이 있는 놈들은 일반적인 놈들보다 강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감각이 아주 이상했다. 물컹물컹하면서도 질척거리고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한지.

“으엑..  이것도 못 해먹을 짓이네..”

헛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마나 스톤을 최대한 많이 모아야 했다. 철각패도는 흐린 달빛 아래서 시체를 뒤졌다. 무척 오랫동안 커다란 그림자가 시체 주변을 돌아다녔다.

물론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진혁은 밤새 무척 바쁘게 움직였다.

***

“조심해서 움직여라.”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자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노을이 지고 어슴푸레한 하늘. 밤은 아니었지만, 밤에 가까운 시간. 200여 명의 사람이 발소리도 죽여가며 이동하고 있었다.

잠시 후면 살육을 할 수 있다는 기묘한 흥분을 안은 채. 이런 일에 익숙한 듯한 그들의 모습은 다소 섬뜩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시각, 성흥 상단의 책임자이자 조사단장은 밖에 나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 이 지겨운 곳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군.”

얼마 후면 모든 것이 끝나고 돌아갈 수 있을 거다. 돌아가면 돈을 챙겨 한동안은 주지육림에 빠져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상상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침이 고였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저 멀리 기다리던 무리가 오는 게 보였다. 그쪽에서 온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절대로 보이지 않을 움직임. 조사단장의 입가에 맺힌 스산한 미소가 더욱 음산해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어디서 괴물 소리가 이렇게 나는 거지?”

유난히 오늘따라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심했다. 하지만 그런 괴성은 이곳에서는 익숙한 일이다. 오늘 유난히 심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큰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괴물의 울부짖음이 허공에 퍼졌다.

“하이고. 오늘따라 왜 저지랄이야? 혹시 또 덤벼들려고 그러는 건가?”

왕칠이 투덜거렸다. 목세강도 바짝 긴장한 상태로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신경을 쓰는 건 괴물이 아니었다.

‘그래. 문제는 항상 사람이지. 사람 같지 않은 놈들.’

서예주에게 말을 듣고 잘못하면 오늘 여기에 뼈를 묻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더러운 놈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권력이 있는 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뭘 하는지는 안다. 그래. 더러운 짓 많이 한다. 하지만 정도가 있는 거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까지 추악한 짓은 하면 안 되는 거다.

“하 표사는 어디 있지?”

“나도 못 봤는데? 어디 가서 또 검 가지고 뭘 하나?”

한천위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기야 진혁은 요즘 틈만 나면 검을 가지고 무언가를 했다. 숲 속 어딘가에서 또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무척 바쁜 것 같던데..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맞아. 평소하고 좀 다르기는 했어.”

왕칠과 한천위가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목세강은 혹시 숲속에 있다가 진혁이 먼저 당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가서 찾아봐야겠어.’

진혁이 무슨 일을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런데 목세강이 움직이려 할 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목세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크와아아!!”

조심스럽게 이동하던 갑자기 옆쪽에서 괴성이 들리더니 한 무리의 갈저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보았던 갈저와는 조금 다른 녀석들이었다.

덩치도 크고 색깔도 달랐다. 지금까지 보았던 갈저들은 회갈색이나 거기에 약간 붉은빛이 감도는 녀석들이었다. 키도 가슴이나 목 정도 왔고.

그런데 지금 나타난 놈들은 일단 덩치가 컸다. 무사들보다도 목이 하나 더 있을 정도의 거구. 거기다 색깔도 녹색이 많이 섞여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으아악!”

삽시간에 무너졌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은 무사들은 갈저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크아아아!!”

놈들은 괴성을 지르며 더욱 흉폭하게 날뛰었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사들은 너도나도 도망치기 바빴다. 물론 개중에는 칼을 휘두르는 자들도 있었다.

“크워어어어!!”

녹색 줄무늬 놀이 울부짖었다. 화가 난 거였다. 인간 하나를 거의 잡아먹을 수 있었는데,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방해한 인간을 마구 공격했다. 그런데 인간이 공격을 해왔고 칼에 맞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분노가 치밀었다. 녹색 줄무늬 놀은 손톱을 세우고 자신을 공격한 무사를 덮쳐갔다.

어둠 속의 괴물은 더욱 강했다.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비명과 뼈가 씹히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그 광경을 멀리서 진혁이 바라보고 있었다.

“힘들긴 했지만..”

진혁은 어젯밤부터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

마나 스톤을 있는 대로 모았다. 생각보다는 많지 않았다. 열 마리당 하나가 나올까 말까 했다. 마나 스톤을 다 모은 다음에는 몸을 바꿨다.

하진혁의 몸으로 마나 스톤을 녹여 검에 발랐다. 마나 스톤을 녹이는 건 진혁밖에 할 수 없었다. 내공으로는 녹일 수 없었다. 철각패도의 몸으로 아무리 해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겹겹이 코팅한 검을 만든 후 다시 몸을 바꿔 근처를 싹 정찰했다. 사혈련에서 얻은 지도를 바탕으로 해서 주변 괴물의 마을을 살폈다.

그리고 적당한 마을을 찾았다. 이곳에서 거리도 멀지 않고 강력해 보이는 놀의 마을을.

“거기까지가 밤에 한 일이었지.”

그리고는 적당한 시간이 되었을 때, 그놈들의 마을 뒤편에 가서 검을 들고 있는 대로 마나를 끌어모았다.

효과가 있었다. 놈들은 두려운 기색을 보이더니 진혁의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마나를 느꼈으니 아마도 포식자가 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우거나 트롤 같은 게 온다고 생각했겠지.’

정말 놈들은 혼비백산하면서 도망쳤다. 그렇게 살살 녀석들을 몰았다. 은홍명이 이끄는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중간에 괴물이 울부짖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그런 소리는 늘 듣는 소리다.

적당한 지점까지 몰고 나서는 일단 내버려두었다. 그러자 놈들은 안심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돌변했다. 사람의 냄새를 맡더니 사냥 모드가 된 거였다.

놀이 머리가 나쁘긴 나쁜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도망치던 주제에 곧바로 사냥하러 움직이다니. 그렇게 해서 놈들이 습격한 거였다.

아수라장. 살육의 축제. 괴물은 날뛰고 피가 사방에 튀었다.

“괴물을 한쪽으로 몰아. 이쪽으로 모이란 말이다.”

은홍명은 뒤에서 지시하면서 발을 굴렀다. 하지만 상황은 불리하게 흘러갔다.

그걸 본 상단 책임자는 이를 갈았다.

“멍청한 놈. 습격을 하라고 했더니 도리어 괴물에게 당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인가. 그냥 조용히 다가와서 습격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오다가 괴물의 습격을 받았다.

상단 책임자는 은홍명의 머리를 헤집어보고 싶었다. 머리에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도 멍청한 건지 한번 보고 싶었던 거다.

“어떻게 해야 하지? 구하기 위해서 무사들을 보내? 하아. 그것도 위험한데..”

무사들을 보내기도 뭐한 것이 그랬다가 괴물에 큰 피해를 입으면 그걸로 끝이다. 서예주도 바보가 아닌 이상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뻔히 알 거다. 당연히 자신들을 죽이려고 할 거고.

조사단장은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그는 무사들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오히려 조사단의 정예를 자신의 주변으로 불러 모았다.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안전하게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진혁이 생각한 대로였다. 자기만 살면 된다는 놈들이었다. 이렇게 나오는 게 저놈들의 습성이다.

그가 피곤했던 것에는 괴물을 두 방향으로 몰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하나는 은홍명이 이끄는 사람들이 있는 방향. 그쪽으로 대다수의 괴물을 몰았다.

다른 소수의 괴물들은 성흥 상단이 있는 방향으로 몰았다. 어느 방향이냐 하면 조사단장과 수뇌부가 있는 천막 쪽이었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진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괴성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성흥 상단의 조사단장이 머무는 천막 쪽이었다.

“타이밍 좋고.”

진혁은 싸늘한 눈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나도 참 좋은 사람이야.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도 주고. 그런데 말이야. 니들처럼 나오면..”

그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이자까지 아주 넉넉하게 쳐서 돌려주는 사람이야. 그게 강호의 법도라면서? 주제 모르고 나서면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거.”

진혁은 비명 소리를 들으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