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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게 갚아줄게.
왕칠은 신이 났다. 자신이 고수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갈저. 괴물 중에서 그나마 상대하기 수월한 놈이다. 비교적 그렇다는 거지 손쉬운 상대라는 건 절대 아니다. 이류 무사도 일대일이 버거운 만만치 않은 괴물.
검으로 베어도 질긴 가죽 때문에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사실은 마나 보호막 때문이지만. 그래서 지금까지는 정말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야 겨우 상처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야아아압!”
- 촤아아악~
왕칠은 우렁찬 기합과 함께 힘 있는 검격을 뿌렸다. 갈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 평소였다면 검이 살짝 튕겨 나왔겠지만,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듯 직선이 그어졌다.
쩍 벌어지는 목 부분의 가죽. 갈저는 손으로 목을 잡은 채 컥컥댔다. 몸을 적시며 주르륵 흘러내리는 녹색 피.
“후우.. 후우..”
조금은 거칠어진 호흡. 하지만 왕칠의 입가에는 여유와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기운이 넘쳤다. 심장과 근육에 활력이 돌고 감각은 예민했다.
그동안 수련으로 많이 늘었다고는 했지만, 아직은 제대로 된 이류 무사라고 할 수도 없는 정도. 삼류에서 갓 이류로 넘어간 그런 정도일 거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일류 무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트아핫!”
자신감이 붙어서일까. 왕칠의 검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단호하게 갈저의 심장을 꿰뚫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는 괴물 갈저. 왕칠은 갈저를 발로 차면서 검을 빼 들었다.
생기를 잃은 갈저가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왕칠은 눈길도 주지 않고 다른 갈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건 한천위 정도 되는 무사는 되어야 보여줄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한천위나 목세강도 비슷했다. 너무나도 손쉽게 갈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상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괴물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수준급의 이류 무사를 상대하다가 삼류 무사를 상대하는 느낌? 대충 그 정도 느낌이었다. 진혁이 주변에 없는데도 갈저를 상대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진혁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진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각, 진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갈저를 상대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마나를 일으키면 조금 주춤거리지? 어디..”
진혁은 현천문의 마나 심법을 마음껏 운용하면서 갈저를 상대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운용할 수 있는 마나가 많아졌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제 가지고 있는 마나의 20% 정도는 사용할 수 있는 듯했다.
“20%면 내공으로 치면 12년 정도인가?”
그 정도 내공이라면 갈저를 상대로 평수를 이루기도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진혁은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갈저를 상대했다.
그것이 바로 내공과 마나의 차이. 그리고 마나를 검에 집중하면 갈저, 그러니까 놀이 주춤거리면서 물러났다. 본능적으로 강한 상대라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음? 거의 끝나가나?”
진혁이 보니 놀 무리가 물러나고 있었다. 전투가 끝났다는 이야기. 그는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그는 빙 돌아서 자연스럽게 무리에 합류했다.
전투가 끝나고 왕칠은 진혁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진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동료들이 왕칠을 먼저 덮쳤다.
한천위나 목세강도 활약을 펼쳤지만, 둘은 원래 고수. 오늘 가장 눈에 띈 건 왕칠이었다.
“이.. 이봐. 오늘 어떻게 된 거야?”
“자네 무슨 영약이라도 먹은 겐가?”
조사단에서 무력을 담당하는 사람들. 그중 가장 급이 떨어지는 사람이 왕칠이었다. 가장 밑바닥 무사. 그런데 오늘 미친듯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어? 말 좀 해봐.”
“그래. 같이 좀 알자고.”
왕칠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동료 무사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게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기분 좋았다. 목에 힘도 팍 들어가고 어깨도 으쓱했다.
“별거 있나. 그냥 오늘 운이 좋았던 게지.”
왕칠은 약간 으스대며 말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다. 기분이 붕 떠서 자신도 모르게 우쭐대는 듯한 말이 나왔다.
“아.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 줘.”
하루 이틀 함께 지낸 동료가 아니다. 왕칠의 실력이야 자신들이 더 잘 안다. 물론 꾸준히 실력이 좋아지고는 있었지만, 오늘 보여준 정도는 아니었다.
검을 지고 강호를 주유하는 사람들에게 무공은 생명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다면? 그렇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 널리고 널린 곳이다. 강호에 비급이나 보검이 나오면 피바람이 부는 것도 비슷한 이유.
“그게.. 음..”
왕칠의 입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사실 왕칠은 조금 난감했다. 딱히 말해줄 게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얼떨결에 말했다.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어.. 나는 뭐.. 그냥 수련을 한 것 말고는..”
그리 큰 소리가 아니었다.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의 소리. 그런데 누군가가 외쳤다.
“수련? 설마.. 수련을 하다가?”
“자네.. 깨달음을?”
왕칠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깨달음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해가 된다는 듯한 표정. 놀랍다고 하면서 부러워하는 얼굴. 그렇게 왕칠이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다.
곧바로 무사들은 진혁을 찾기 시작했고, 엄청나게 많은 무사들이 부탁을 해왔다. 자신의 무공도 좀 봐달라는 거였다. 진혁은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 거절하면 욕을 먹을 게 뻔해.’
누군 봐주고 누군 안 봐주느냐고 따질 거다. 왕칠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에 다들 흥분한 상태였으니까. 그러면 포인트는 마이너스가 되고. 그럴 수는 없다.
“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수련을 하는 건 여러분의 몫이라는 거 알아 두셔야 합니다.”
진혁은 자신이 시간이 되는 범위 안에서 봐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얻는 건 본인들에게 달린 거라고 했다. 깨달음 같은 엄청난 걸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무사들은 그거면 충분하다며 좋아했다. 그런 배움의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세 사람과 면담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어떻게 한 거지?”
“맞아. 검에다가 뭘 했어? 오늘.. 그냥 막 썰리는데. 어우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왕칠과 한천위도 궁금해했지만, 특히 목세강이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죄송한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며칠 정도만 더 시간을 주시면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며칠이라..”
며칠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궁금해하면서도 알았다고 했다. 진혁을 그만큼 믿으니까.
“자네가 한 게 맞지? 그래서 오늘 갈저를 상대하기 쉬웠던 거지?”
진혁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목세강은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싸우는 도중에 느꼈다. 분명히 백령진인이 가지고 있던 검과 비슷한 기운이었다. 무림맹에서 신줏단지 모시듯 한 그 보검과 같은 기운.
“며칠이야 기다릴 수 있지.”
목세강은 그 말을 하면서 진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드디어 사부의 복수를 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았다고 생각하면서.
‘이거 변명 거리를 빨리 만들어야겠는데?’
실험은 성공적이었지만, 뭐라고 변명할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 하지만 시간을 벌었으니 적당한 그 사이 만들어 내면 된다.
일단은 무사들의 무공을 봐주고, 혼자 떨어져 실험을 했다. 코팅해 놓은 마나가 날아가는 속도나 어느 정도 코팅이 되었을 때 어떤 효과가 나는지 등을. 그러면서 변명 거리도 같이 생각했다.
여러 가지 실험을 하던 중 진혁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성흥 상단이 있는 천막이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
“그자가 분명히 괴물에 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그렇게 신경을 쓸 것까지 있나? 내공도 쓰지 못하는 놈인데.”
성흥 상단 책임자의 말에 은홍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성흥 상단의 조사단장 천막 안에는 제법 많은 자들이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천수에서 돌아가겠다고 했던 은홍명과 종남의 무사들. 사실 그건 일종의 속임수였다. 그들이 빠지면 전력이 현격하게 약해진다. 그렇게 해서 상대가 방심하길 기다린 거였다.
“무공이야 다른 손을 빌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괴물의 약점이나 상대하는 방법 같은 걸 알고 있다면 반드시 데려와야 합니다.”
“뭐. 그렇기는 하지.”
만약 그런 걸 알고 있다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정보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포섭을 하려 했건만.
“조금 고지식한 것 같더군요. 선량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호구라고 해야 하나. 뭐 그렇습니다.”
“선량한 사람? 그냥 멍청한 걸세. 아무튼, 알았네. 그자는 죽이지 않게 주의를 하지.”
은홍명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제부터가 정말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진다. 원보 상단의 조사단을 도륙하는 일.
“모레 해가 뜰 때면 모든 게 끝나 있겠군.”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처리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상단 책임자는 원보 상단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으니 문제없다고 말했다.
“이쪽 전력이 상당히 약해져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지요. 게다가 다른 사람들 눈치 살필 것도 없으니..”
“크흐흐. 그렇지. 문제가 될 것 같은 놈들도 같이 처리를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성흥 상단에서 고용한 자들 중에서도 일부는 제거할 생각이었다. 어디 가서 공연히 떠들고 다니면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하여간 뭣도 없는 놈들이 강호의 법도를 몰라요. 주제도 모르고 나섰다가는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거. 그렇게 간단한 걸 왜 모르는지. 나 참.”
“그러니까 항상 당하고 사는 거지요. 뭐. 그 덕에 우리가 챙기는 것도 있으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크하하.”
자기들끼리 비웃으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건 이미 결정된 것처럼. 그런데 그걸 천막 위에서 듣고 있는 자가 있었다.
‘하. 이 새끼들 봐라?’
철각패도는 어떤 기척도 내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서예주는 무사들 노리갯감으로 쓰다가 나중에 죽이겠다. 원보 상단에 남아 있는 자와는 이미 이야기가 된 후다. 바로 흡수할 거다. 별별 추악한 이야기가 다 나왔다.
일부는 노예처럼 부릴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진혁이었다.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잡아서 가두고 부려 먹겠다고 했다.
모인 사람들은 이번에도 제법 짭짤하겠다면서 키득거렸다. 여자가 없어서 그게 좀 아쉽다는 자도 있었다.
‘쓰레기 집하장이구만. 가지가지 쓰레기들이 다 모였어.’
철각패도는 이들이 내일 저녁에 습격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면 이 근처에 있다는 건데..’
아마도 천수에서 떠나는 척하다가 다시 뒤를 따라왔을 거다. 아마 어제나 오늘 정도 따라잡은 듯했다.
‘어디들 있는지 좀 보자.’
철각패도는 살그머니 천막을 떠났다. 그가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순간.
“음?”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이상한 낌새라도?”
은홍명의 주변을 살피자 다른 사람이 물었다. 은홍명은 잠시 기운을 살피는 듯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간 이질적인 느낌이 나서.. 뭐 내가 좀 예민해진 것 같구려.”
“하하. 저쪽에서 대협의 이목을 속일 자가 있겠습니까. 최고수라고 해봐야 목세강이라는 자인데.”
“하기야 그렇긴 하지.”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오늘따라 아주 예민하게 날이 서 있던 은홍명의 감각. 하지만 훨씬 고수인 철각패도의 기운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철각패도는 조사단 주변을 뒤지고 다녔다. 은홍명이 이끄는 자들은 조사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철각패도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오호라. 여기들 계셨구만.’
꽤 많은 수였다. 200여명 정도 되는 자들이 불도 피우지 않고 숨어 있었다.
‘그냥 여기서 다 죽일까?’
급습을 하고 불을 지르고 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났다. 테스트도 겸해서 시도할 만한 작전이 떠오른 거였다.
고민이 되었다. 작전이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잘 풀리면 정말 아무런 피해도 없이 이놈들을 처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원보 상단의 조사단까지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경고는 해야겠다. 그런데 이곳까지 철각패도가 나타나면 좀 이상한데..’
진혁은 고민했다. 지금 서예주를 찾아가서 경고하고 싶었는데, 그러자니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고민 끝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디까지나 포인트를 얻어야 할 사람들이 줄어들면 안 되니까 알리는 거야. 그리 생각하면 철각패도는 서예주가 있는 천막으로 조용히 몸을 날렸다.
“포인트. 그래. 포인트 때문이야. 포인트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철각패도는 혹시라도 일행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을 막기 위해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