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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 그리고 뒤끝
“누구냐? 누구길래 종남의..”
철각패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도 않은 채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말을 하던 무사가 갑자기 허공을 날아 벽에 쾅 부딪쳤다. 커다란 멧돼지에 받힌 것처럼 날아가서는 거품을 물은 채 쓰러졌다.
“귀하는 누구시오? 뉘시길래..”
청강검 은홍명은 바짝 긴장했다. 지금 들어선 자의 기세가 워낙 흉폭했다. 손짓 한 번에 사람을 날려보내는 건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자신도 마음먹으면 할 수는 있지만, 저렇게 손쉽게 하지는 못한다. 그 한 수만 봐서는 모르는 거지만, 적어도 자신보다 하수는 아니었다.
“저기.. 철각패도라는 자와 생김새가 비슷합니다.”
옆에 있던 성흥 상단 사람이 조용히 속삭였다.
“철각패도.. 요즘 악명이 자자하다는..”
은홍명의 눈빛이 달라졌다. 얼마 전 무공대사가 당했다는 말을 듣고서 벼르고 있었는데, 스스로 나타날 줄이야.
“귀하가 철각패도가 맞소?”
“그렇다면?”
철각패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은홍명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다면 실수를 한 거겠지. 비겁한 암수 따위는 나에게는 통하지 않거든.”
“웃기는 놈이군. 무공이라는 땡초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냐?”
은홍명은 검을 뽑으며 대답했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청색이 나는 것이 보통 검은 아닌 듯 보였다.
“사혈련의 사주라도 받은 게냐? 아니면 다른 게 있는 건가?”
철각패도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자였다. 오로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놈. 이런 놈들 잘 안다. 윗자리에 계속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하면서 살아온 인간.
“뭐. 상관없다. 그거야 일단 팔다리 중에서 하나 정도 잘라 놓고 물어보면 되니까.”
“뭐라는 거냐? 나이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옹알이 하냐?”
철각패도의 말에 은홍명의 얼굴이 확 벌게졌다.
- 치이잇~
큰소리칠 만했다. 은홍명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무공 대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자였다. 움직임을 보니 계속해서 고된 수련을 해온 것이 확실했다.
- 치이잇~ 치잇 치이이잇~
검이 공간을 베는 날카로운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검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종남파 무인들은 은홍명이 일방적인 공세를 펼치자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덩치는 곰 같은 놈이 경신의 수법이 제법이구나. 다른 재주는 없느냐.”
“그래? 그럼 다른 것도 한 번 보여주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홍명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곧이어 목덜미 쪽에 느껴지는 서늘한 예기. 철각패도는 제자리에서 빠르게 돌면서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곧바로 은홍명의 옆구리에 손바닥을 뻗었다.
- 퍼어엉!!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이 울리더니 객잔 벽에 커다란 구멍이 났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는데, 철각패도도 놀라고 있었다.
‘그걸 피했어?’
완벽한 카운터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아니었다. 상대는 아직 두 발로 서 있었다.
물론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어깨와 팔이 장력에 맞아 너덜너덜하게 변했으니까. 하지만 아직 독기를 품은 눈으로 철각패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독한 놈이구나. 하기야 그런 놈이니 더러운 짓을 하고 다녔겠지..”
“크으으.. 사혈련이냐?”
은홍명의 말에 대답 대신 공격 자세를 취했다.
“때려죽일 사혈련 놈들..”
철각패도가 사혈련 사람이라고 완전히 믿는 듯했다. 사혈련에 칼을 휘두른 게 어지간히도 많은 모양이었다. 뭐.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맙고.
“이 비겁한 놈. 내가 그런 비열한 암수에 당할 것 같더냐?”
은홍명은 갑자기 이상한 말을 내뱉더니 객잔에 난 구멍으로 신형을 날렸다.
‘뭐지? 저 병신은?’
너무나도 뜻밖의 상황에 진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도저히 안될 것 같으니 도망을 친 거다. 그것도 철각패도가 무슨 이상한 수를 쓴 것처럼 하고서는.
“이 사혈련의 악적을 막아라.”
“비겁한 놈. 암수를 쓰다니!”
종남의 무인들이 길을 막았다.
어이.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대결을 한 거라고. 하지만 이렇게 말해봐야 믿지 않을 테지. 이놈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을 테니까.
이런 놈들을 상대하고 있어 봐야 소용없다. 철각패도는 흘깃 이들을 쳐다보고는 곧바로 신형을 날려 문을 나갔다. 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대충 소리만 지르다가 쫓아오지도 않을 놈들이.’
진혁은 은홍명이 어디로 갔는지 살폈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관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이 아저씨. 강호의 일은 관부로 가져가는 거 아니라며?’
그런 자가 자기 목숨이 위험하니 관으로 도망간다는 게 우스웠다. 하지만 그를 비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진혁은 곧바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은홍명이 왜 도망친 줄 알 수 있었다. 엄청 빨랐다. 도망에는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미안. 그 정도는 따라 잡을 수 있거든.
은홍명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사실 죽일 마음은 없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
진혁은 속도를 조절했다. 아슬아슬하게. 은홍명은 숨이 넘어갈 듯 헐떡헐떡하면서 달렸다.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그는 관청이 보이자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바로 뒤에 있는 나를 보더니 혼비백산하더니 똥줄 빠지게 달렸다.
‘딱 좋군.’
은홍명이 관청에 다다르기 직전, 강한 장력을 날렸다.
- 퍼엉~
등에 장력을 제대로 맞은 은홍명은 관청 앞에 털썩 쓰러졌다. 그는 관청 앞에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당분간은 요양에 신경 써야 할 거야. 잘못하면 평생 내공을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진혁은 현천문 사람들과 은홍명을 구경할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은홍명을 치료하려면 은홍명 정도 되는 내공의 고수가 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그런 고수가 이 근처에 있나. 그렇다면 의원인데. 이곳에서 저 정도를 치료할 의원은 딱 한 곳이야.
그리고 거기 의원도 제대로 치료하기는 어려워. 혹시 도움을 받으면 모를까. 누구의 도움이냐고? 뻔하지 거기 의원과 아주 친한 하진혁이지.
***
“저기. 꼭 이렇게 해야..”
은홍명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아무리 철면피라지만 낯이 뜨거웠으니까. 만신창이가 된 채 누워있는 그는 온 문주와 하진혁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내공을 평생 못 쓰게 되어도 괜찮다면 맘대로 하쇼.”
“그건 아니고..”
은홍명도 상당한 무인이라 자신의 상태가 어떻다는 거 정도는 대충 안다. 심각했다.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하면 무공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하진혁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의원 말로는 그가 이 지역에서는 이런 종류를 가장 잘 안다는 거였다.
어제까지 잡아 죽일 것 같이했는데, 도움을 달라고 빌어야 할 처지.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도움이 필요 없으면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
진혁의 말에 은홍명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허어어억..”
“어허. 그렇게 함부로 움직이면 큰일 난다니까 그러네.”
진혁은 조용히 말했다.
“의술을 아는 자로서 다친 자를 고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가? 크흠.. 크흠.. 그럼 부탁 하겠네..”
죽고 싶었다. 대 종남파의 2인자가 현천문 같은 작은 방파. 그것도 문주도 아니고 일개 제자에게 부탁을 하다니. 그것도 쓰레기 문파라고 비웃던 자들인데.
“하지만 현천문의 제자로서 어제 일은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뭐? 그게 무슨.. 커어어억..”
은홍명은 움직이려다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의원은 혀를 쯧쯧 찼다.
“어허.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하나?”
진혁은 잠시 지켜보다 말했다.
“저는 거짓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종남이 잘못을 한 거라면 사과를 하시면 됩니다. 잘못이 없다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치료에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은홍명이 엄청난 갈등을 하는 게 보였다. 물론 사과하지 않으면 제대로 고쳐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의술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사과하면? 그러면 고쳐 줄 생각이다. 많이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은홍명은 계속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 무공을 잃을 수도 있다. 무인에게 그것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걸 모두 잃는다는 말이다. 특히나 이런 놈처럼 가진게 많은 놈은 절대로 그런 걸 포기하지 못한다.
“미안하게 됐소.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오. 부디 양해해주길 부탁하오.”
은홍명은 모기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예? 뭐라고 하셨지요?”
진혁의 말에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싫으면 말고.
“미안하게 됐소. 내가 착각을 한 모양이오. 부디 양해해주길 부탁하오.”
아까보다 조금은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합니다.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한 번 더하려고 했는데, 온 문주가 답을 해버렸다.
“최선을 다하거라.”“물론입니다.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전력을 다해 고통을 선사하마. 내가 쓴 수법이라 어떻게 손을 쓰면 되는지 잘 아는데, 대신 좀 아플 거야.
온 문주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면서 밖으로 나갔고 치료가 시작되었다.
“으아아아악!!”
종남파 무인이 놀라서 뛰어들어왔다. 하지만 치료를 방해할 거냐고 하자 은홍명이 내보냈다.
“끄어어어.. 으허어어억!!”
치료는 계속되었다.
***
은홍명은 며칠 치료를 받다 떠났다. 종남에서 사람들이 와서 데려갔다. 적어도 당분간은 종남에서 현천문을 건드리지는 못할 거다.
악연이 있었음에도 내공을 잃을 뻔한 종남의 고수를 고쳐주었다. 그런데 손을 댄다? 요즘 강호가 개판이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 갈 수는 없다.
은홍명이 떠난 후. 진혁은 장안으로 떠날 준비를 하다 문주에게 내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게 정말이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상단을 따라가면서 좀 알아볼 생각입니다.”
내공만 있었더라면 현천문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거다. 진혁이 보기에도 현천문 사람들은 재능이 있었다.
무학에 대한 이해도나 깨달음은 상당했다. 내공 문제 때문에 무학에 더 집중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내공만 뒷받침되면 다들 절정고수 이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일수록 신중해야 한다. 만약 조금의 실수라도 있으면 떼죽음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여러 가지 확인을 해 보고 확실하면 알려줄 생각이었다.
“어떤 건지 알려줄 수는 없느냐.”
“확실치도 않은데 공연히 기대만 커질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온 문주는 알았다고 하고는 무사히 다녀오라고 했다.
“항상 조심하거라.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사형을 어찌 본단 말이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밖으로 나온 진혁은 기분이 묘했다. 내일이면 당분간 여기에 올 수 없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장안에서 돈황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내일 떠나슈?”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호승렴이었다. 대사형 자리를 나에게 빼앗겼다고 호승심에 불탔던 녀석.
“그래. 이제 한동안 못 보겠구나.”
호승렴은 쭈뼛쭈뼛하면서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만 가서 쉬어야겠구나.”
진혁이 방으로 향하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렀다.
“조심하쇼. 괴물 같은 거한테 죽지 말고.”
“알았다. 꼭 무사히 돌아오마.”
호승렴은 대답은 듣지도 않고는 뒤돌아 갔다. 사제의 모습은 점점 멀어졌지만, 마음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내가 여기를 이래서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진혁은 이번에 괴물들을 상대로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 본 후에 제대로 된 길을 열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마나 심법이라잖아.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마나 심법을 익힌 자들 뿐이야. 이게 확실하면 대박인 거지.”
진혁은 방으로 돌아가면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