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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 그리고 뒤끝
‘똑같은 기운이다.’
확실했다. 오크를 잡았을 때 자신의 몸으로 들어온 기운. 그리고 지금 운기를 할 때 서서히 몸 안으로 들어오는 기운. 이 두 가지는 같은 기운이었다.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운기조식을 할 때는 내공이 늘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달랐다.
‘분명해. 여기서 게속 운공을 하면 내공이 늘어난다.’
마옥으로 만들어진 침상에서 무언가가 나오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게 왜 오크를 죽이면 나오는 거지?
진혁은 계속 운공을 하면서 자신이 느낀 감각이 확실하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곧바로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방으로 갔다.
방에서도 운공을 해보았다. 아주 미약한 것이기는 했지만, 수련실에서 느꼈던 감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정도가 너무나도 희미하다는 게 달랐다.
물이 가득 찬 대접에 간장 한 방울 떨어진 느낌이랄까. 온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었다.
‘정리를 해보자.’
다른 곳에서 운공을 할 때는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현천문에서 운공을 하면 아주 약하지만 기운이 느껴진다. 수련실에서는 그것보다는 훨씬 센 강도로 느껴지고.
“오크를 잡았을 때는 중간 정도?”
수련실에서 느낀 것보다는 약했지만, 자신의 방에서보다는 강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메시지도 떴다.
‘뭐를 흡수해서 활성화가 되었다고 했어.’
이놈의 깨지는 글자가 문제였다. 흡수한 게 뭔지, 얼마나 활성화가 되었는지가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자신에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거였다.
“어디 보자. 이런 것과 관련한 기억이..”
진혁은 원덕강의 기억을 뒤졌다. 두 고수의 모든 기억을 흡수한 건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미쳐버렸을 거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헷갈리는 상황이 되었을 테니까.
흡수한 부분은 아주 적은 부분이었고, 나머지는 필요할 때마다 찾아보았다. 어떤 사실에 관해 집중하면 기억이 떠오르는 식이었다.
기억을 더듬다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원덕강이 먹은 영약. 천년하수오를 삼켰을 때도 비슷한 기운을 느꼈다는 거였다.
“천년하수오라서 그런 건 아니야. 그 전에 먹었던 천년하수오에서는 그런 기운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진혁은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보았다.
내공이라는 건 특정 기운을 몸에 축적하는 거다. 어떤 기운을 축적하느냐에 따라서 내공의 성질이 달라진다. 소림은 황금색, 화산은 자색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현천문은 내공이 쌓이질 않아. 그런데 이곳이나 수련실에서는 쌓인다는 거지.’
그렇다는 건 이곳이나 수련실에는 세상에 없는 어떤 기운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기운이 오크에게도 있고.
이 세상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기운.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괴물 중 오크는 그 기운을 가지고 있다.
“이거 마나 아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 세상에서 넘어온 오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마나라면? 그리고 그 마나 때문에 무림 고수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 거라면?
“마나를 호신강기처럼 두르고 있다면 그럴 수 있어. 일리가 있다.”
크고 강한 괴물은 초절정 고수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작고 약한 괴물은 병사나 무림인이 죽인 적도 있다.
가만 그럼 나는 왜 오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거지? 나보다 내공이 강한 자들도 견디지 못했는데, 나는 쉽게 잡았어. 왜지?
“현천문의 내공과 무공이 다른 거구나.”
괴물을 잡는 데 최적화 된 무공인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원덕강이 보았던 아주 오래된 책. 현천문의 역사가 기록된 책에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너무나도 오래된 기억이라 선명하지 않았다. 진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장서고로 향했다. 문을 여니 낡은 종이 냄새가 확 풍겨왔다.
“어디더라? 여기 근처일 건데..”
진혁은 기억을 더듬어 책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하던 책을 찾을 수 있었다. 현천문의 역사를 기록한 책. 거기에는 현재의 내공 심법인 현천심법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본래 본문의 심법은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나, 그 이름이 이상하다고 하여 현천 심법으로 바꾸었다. 원래 명칭은.. 마나 심법!!”
소름이 쫙 돋았다. 이것은 중원의 무공이 아니었다. 진혁은 책을 더 뒤적였다.
- 아주 오래전, 세상에 괴물이 나타나고 괴이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괴물을 막을 수는...
- 개파조사께서는 요상한 복장을 한 자의 도움을 받아 새로이 무공을 창시하시니 손짓 한 번에 괴물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 ... 제자 여럿을 받아들이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가 되었다.
“마나 심법이라서 그런 거였어. 기를 사용한 게 아니라 마나를 내공으로 사용한 거야.”
그래서 오크를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거다.
“가만. 이거.. 나는 괴물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잖아? 그리고 괴물을 잡을수록 강해지고.”
이게 무슨 횡재란 말인가.
***
진혁은 상단을 따라 사주까지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온 문주는 크게 걱정을 표했다.
“꼭 가야겠느냐. 가는 길이 너무나도 위험한데..”
“이미 약조를 한 일입니다. 그리고 상단에서 철저하게 준비를 했으니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문주님.”
진혁은 고수들도 많이 간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것이 원덕강의 제자이기 때문인지, 사윗감으로 생각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무척이나 걱정하는 건 확실했다.
“사부님. 사부님!”
막내인 안규림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
“사형들이 지금 위험합니다.”
안규림은 종남파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전했다. 그의 말로는 종남파 사람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했다.
“뭣이?”
온 문주는 분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혁도 막내를 재촉해 사제들이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중간에 문도 하나를 잡고는 귓속말을 하고는 급히 뒤따랐다.
그들이 객잔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심각했다. 넷째은 유호군은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었고, 둘째 호승렴은 만신창이였다.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
온미령도 안색이 파리한 것이 내상을 입은 듯했다. 반면 종남의 무목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멀쩡했다. 얼굴에는 비웃음이 보였다. 이제 주제를 알았느냐는 그런 표정.
“이게 무슨 짓들이냐?”
온위립의 호통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일어났다. 그러자 종남파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대가 현천문의 문주 되는 사람인가?”
“그렇소. 그쪽은 종남에서 오셨소?”
작은 문파이기는 하지만 문주를 이토록 하대하는 건 실례되는 일. 하지만 상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소이다. 본인은 종남의 은홍명이라 하오.”
“청강검..”
청강검 은홍명. 종남의 2인자라고도 볼 수 있는 자였다. 장문인인 분광검 은태명과는 친척이자 사형제.
“그런데 공명정대한 종남파에서 어찌 우리 현천문을 이리 핍박한단 말이오.”
“핍박? 우리가 언제 그랬다는 거요?”
오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저들이 먼저 현천문의 무공을 비웃었다. 형편없는 삼류 무공이라고. 내공이 쌓이지 않는 심법은 왜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참았다. 그런 멸시와 조소는 많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치지 않았다.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배알도 없는 연놈들이라고 했다. 문주가 어떤 자인지 보지 않아도 뻔하다고 했고.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런 사실이 없단 말이오?”
“허어.. 우리 종남에서 그런 천박한 말을 내뱉었을 리가 있나. 그저 내공이 쌓이지 않는 심법이라는 게 좀 의아하다는 말을 했을 뿐이오.”
딱 잡아뗐다. 온 문주는 이들이 작정을 하고 시비를 건다는 걸 알았다.
‘성흥 상단이구나. 그들 때문에 이러는 거야.’
진혁은 왜 이러는지 짐작이 갔다. 성흥 상단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다. 청강금 은홍명이라는 거물이 직접 올 줄은 몰랐지만.
성흥 상단은 소림을 중심으로 한 파벌과 관계가 깊다. 소림과 종남, 공동, 곤륜, 개방이 뭉친 파벌.
‘소림은 무공대사가 봉변을 당해 그걸 수습하느라 바빴을 거고, 그나마 가까이 었는 종남에서 사람이 온 거겠지.’
우리를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보여주겠다는 심산이다. 그런 걸 온 문주도 짐작한 모양이었다. 항의는 했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쪽 제자들이 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있소이다.”
“이런. 이런.. 뭔가 잘못 들었겠지. 우리 말이 옳다는 걸 증언할 사람도 있소.”
그 사이에 누군가를 포섭해 놓은 모양이었다. 이래서는 해결이 나지 않는다. 은홍명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그쪽에서 말을 잘못 알아듣고 소동을 벌였으니 종남으로서도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소이다.”
“무슨 소리요. 실례를 먼저 한 것은 그쪽이오.”
은홍명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이 정도로 몰아붙이면 상대가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계속해서 강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바로 말했다.
“지금 내가 거짓을 말했다는 거요?”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오. 정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다면 관부로 갑시다.”
온 문주의 말에 은홍명은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강호의 일을 관부에 맡겼단 말인가. 이거 우습군. 우스워.”
청강검 은홍명은 실력을 겨루어 해결하자는 의도를 진하게 드러냈다. 작정을 한 거다. 만약 무력을 사용하게 되면 온 문주는 불구가 되거나 죽게 된다.
“깨끗하게 해결합시다. 강호인은 검으로 말하는 법 아니겠소.”
온 문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현천문의 제자들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도 더러웠다. 하지만 힘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저기. 관에서 나온 모양입니다.”
휴. 이제야 오는 모양이다. 혹시 몰라서 문도를 시켜 관에 연락을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이곳에서도 현천문이라고 하면 그래도 무시하지는 못하니까.
“이거 공교롭게 되었군.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합시다.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요.”
은홍명은 충분한 배상을 하고 공식적인 사과도 곁들여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돈도 뜯어내고 망신도 주겠다는 거였다. 거절하면 문파를 아예 거덜 낼 생각일 것이고.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현천문으로 돌아왔다.
“으아아!!”
둘째 호승렴이 주먹으로 벽을 때렸다. 다들 그러고 싶었다.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고 피를 토할 것 같은 심정. 하지만 온 문주는 엄하게 말했다.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강호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그래도 너무 분합니다. 저들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사문을 욕보이고 사부님을 능멸했습니다. 그런데도 잘못은 우리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호승렴의 불같은 말을 들은 온 문주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다. 잘못을 알고도 가만히 있으면 그것 역시 옳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줄 필요는 없느니라.”
온 문주는 자신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진혁은 가만히 궁리해 보았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온 문주가 원만하게 해결할 방법은 없을 듯했다.
아마도 혼자서 굴욕을 감당하고 상당한 재물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진혁은 피식 웃었다.
“이거 간만에 꼭지 도네?”
진심으로 화가 치밀었다. 진혁은 곧바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고, 팔찌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
“하하하. 어떻소?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아이고. 역시 대단하십니다.”
은홍명은 함께 온 성흥 상단 사람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저런 자들은 적당히 해서는 또 머리를 세우지. 그러니 아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게 눌러야 하는 거외다.”
“어련하시겠습니까. 대인만 믿겠습니다. 잘 처리해주시면..”
상단 사람은 은근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쾅!
객잔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종남파 무사 한 명이 문 쪽으로 갔는데,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튕겨 나갔다. 종남파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서며 칼을 뽑았다.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저벅저벅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그는 종남파 무사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뻗었다.
“니가 은홍명라는 개새끼냐?”
철각패도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폭풍처럼 객잔 안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