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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는 표사-26화 (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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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 그리고 뒤끝

- 끼이익~

낡은 경첩에서 나는 소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오랜만에 들으니 정감이 느껴졌다. 현천문을 떠난 지도 벌써 몇 달. 떠날 때는 봄이었는데, 벌써 여름이었다.

“사형. 오셨군요.”

“대사형!”

진혁을 본 사제들이 달려왔다. 이제 열아홉이 된 앳된 막내 안규림, 스물이지만 우락부락한 넷째 유호군. 그리고 유일한 여자인 셋째 온미령.

“다들 잘 있었느냐.”

진혁은 호탕하게 웃었고, 사제들은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다. 평소에 무공도 봐주고 살뜰하게 보살펴주는 진혁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그런 진혁이 없으니 얼마나 허전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돌아오니 더없이 반가웠던 거다.

“문주님은 안에 계시느냐?”

“사부님은..”

사제들이 말을 잇지 못했다. 대충 짐작이 갔다. 평소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니까.

“하아. 또 둘째가 사고를 친 게냐.”

“그게.. 이사형과 청류무관 관원들이..”

반항아 기질이 강한 둘째. 스물둘인 호승렴. 이 녀석은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걸 보면 참지를 못했다. 하지만 나쁜 놈은 아니었다. 불의하고 부당한 일에만 그 성격이 나왔으니까.

무공도 뛰어났다. 내공이 약했지만, 이런 지방에 고수가 뭐 그리 많겠나. 하지만 상대의 수가 많거나 내공이 제법 되는 자가 있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끝까지 덤볐다. 덕분에 크게 다치는 일이 많았다. 그걸 문주인 온위립은 참지 못했다. 지금도 정류무관에 가서 한바탕 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의 예상대로 온위립은 청류무관에서 큰소리로 따지고 있었다.

“불의한 일에 나선 것이오. 그런데 이렇게 손을 쓰다니.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오.”

“그게.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한쪽의 말만 듣고서 이러시는 겁니까?”

“오해라니. 당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여럿이거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온위립은 엄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현천문에서 배우고 가는 여제자들을 청류무관의 관원들이 희롱했다. 그걸 본 호승렴이 나섰고 싸움으로 번진 것.

“아니. 젊은 남녀 사이에 말이 오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한창 혈기왕성할 때이니 말입니다.”

“허허. 이보시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게요? 그럼 어디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려 봅시다.?”

청류무관의 총괄 사범은 사정을 하면서 온 문주를 안으로 이끌었다.

“젊은 관원들이 혈기가 넘쳐 그런 거니 좋게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쪽 관원도 많이 상했습니다.”

“잘못을 먼저 한 쪽은 그쪽 아닌가. 그럴 수는 없네.”

사범은 입맛이 썼다. 이게 다 여제자가 현천문으로 몰리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무공을 제대로 배우는 건 대부분 남자들이다. 여자는 그 수가 아주 적고, 그나마 호신이나 다른 용도로 배우는 게 대부분이다.

워낙 험한 세상 아닌가. 그래서 점혈이나 금나 수법을 배우려는 여자들이 많았다. 문제는 그런 여자들이 전부 현천문으로 간다는 거였다.

“그게 여제자들이 현천문에 많이 몰려서 그런 거 아닙니까.”

“허어. 아니 그게 무슨 문제인가? 사람들이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인데.”

왜냐? 점혈이나 금나 수법을 배우려면 몸끼리 접촉하고 주무르고. 뭐 그렇다. 가르치는 사람은 남자고 배우는 사람은 여자. 그렇다.

문제가 많이 생긴다. 관에 추행을 당했다고 발고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못한다. 결혼도 안 한 처녀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니까.

게다가 무관이나 문파에서 가르칠 정도 되면 그래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더러워도 그냥 관두고 만다. 그런데 현천문은 좀 달랐다.

온 문주는 색에 관해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 여자들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전혀 다른 의도가 없이 가르침을 주는구나. 그래서 배운 제자들이 아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그 사람이 또 추천하고. 그래서 지금처럼 된 거였다.

“아무튼, 당사자들이 정중하게 내 제자에게 사과하도록 하시오. 그것만 한다면 더는 문제 삼지 않겠소.”

“하아.. 알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지요.”

온위립은 사범에게 포권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사범님. 아니 왜 저런 자를 그리 어려워하십니까? 무공이 대단한 것도 아니라면서요.”

“모르는 소리 말아아.”

붙으면 100% 이길 자신 있다. 하지만 싸울 명분이 없다. 상대는 이 지역에서 평생 명성을 쌓아온 사람이었다. 불의하고 부당한 일에 맞선 협객으로. 지금도 잘못한 건 이쪽이다.

“명분이란 건 중요하다. 그걸 무시했다가는 크게 될 수가 없어.”

“그러면 이렇게 굴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계실 겁니까?”

그 말에 사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었을 뿐.

이런 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나중에 누군가 입을 열어서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으면 꼴이 우스워진다.

사범은 열린 문밖으로 보이는 온위립의 뒷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눈초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온 문주는 걸음을 재촉해서 현천문으로 돌아왔다.

“문주님.”

“아니. 진혁이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진혁을 본 온위립은 한걸음에 뛰어가 손을 잡았다.

“일단 안에 좀 들어가 있거나. 나는 승렴이한테 갔다가 바로 가마.”

“예. 제가 간단한 치료를 했으니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아! 네가 치료를 했다면 오래지 않아 일어나겠구나.”

온위립은 크게 기뻐했다. 진혁의 의술이 상당하다는 걸 이미 여러 번 보았으니까. 진혁은 잠시 기다리다 승렴으로 보고 나오는 문주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일은 없었고? 괴물이 여기저기 출몰한다는 말이 많던데..”

“괴물과 마주치기는 했지만, 운 좋게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래?”

진혁은 표행 중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당강이라.. 그래..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돼지 같은 데 어금니가 있다고 했지.”

흠산이라는 곳에 당강이라는 짐승이 산다. 돼지같이 생겼는데, 어금니가 있다. 그 울음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 같다. 이것이 나타나면 천하에 대풍이 든다.

산해경에 이런 식으로 적혀 있다. 대풍이라는 건 그냥 붙인 말일 거고. 돼지, 어금니. 이게 포인트일 거다.

“그런데 청류 무관의 일은..”

“그건 잘 해결되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문주님. 청류 무관은 무당 속가 제자가 연 곳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인데 어디 출신인지가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문주님께서 위해를 당할까 그게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진혁은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온위립은 그런 진혁을 보면서 묘한 표정이 되었다.

“너는 네 사부를 정말 많이 닮았구나. 사형도 항상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 사실은 당신께서 그런 일에는 더 나서면서도 말이다.”

진혁은 온위립이 원덕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안다. 이곳에 처음 와서 원덕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온위립은 너무 놀라서 기절을 했다.

온위립은 그래도 내공이 30년 정도 된다. 그런 무림인이 놀라서 기절하는 일은 거의 없다. 평소에 원덕강을 어찌 생각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

그 후로 원덕강의 위패를 모시고는 매일 찾아갔다. 사형은 나아게 아버지였고 사부였다는 말을 늘 했고.

“그건 그렇고, 미령이는 보았느냐.”

“예. 인사는 나누었습니다.”

현천문의 적전제자는 다섯 명이다. 제자는 일반 제자와 적전 제자로 나뉜다. 적전이라는 건 정통을 이어받는다는 뜻.

이 지역에서 현천문의 네 제자는 유명하다. 모두가 헌앙하고 미남으로 소문이 났다. 다만 문주의 딸인 온미령은 미녀라고 불리지는 못했다.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혁이 나타났다. 진혁은 온미령을 무척이나 예뻐했다. 왜냐? 예뻤으니까.

서예주와 비슷한 케이스였다. 진혁이 보기에 온미령은 서구적인 미인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체형도 서구적이었다. 약간 마른 듯하긴 했지만, 건강미가 넘쳤다. 피부도 태닝이 잘 된 느낌이었고.

그런데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게 영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튼, 온 문주는 진혁을 은근히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령도 진혁을 좋아하는 눈치였고.

“사부님.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어떤 것인데 네가 이렇게 어려워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꾸나.”

진혁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수련실을 하루나 이틀 정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수련실을?”

온 문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 복잡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련실. 사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름이었지만, 현천문에서는 문주만 사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간혹 내공 심법을 배울 때 들어가는 경우는 있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주만이 출입하는 곳이다.

대사형인 진혁이고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사용하게 해주어도 된다. 문제는 둘째인 호승렴. 진혁이 오기 전까지는 호승렴이 대사형이었다. 분주 자리를 물려줄 인재라도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데 진혁이 오고 나서 둘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다. 호승렴이 더욱 반항적이 된 데에는 진혁의 몫도 약간은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있겠느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게 떠오르긴 했는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진혁은 적당히 둘러댔다.

“수련실에서 운기조식을 하면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형이라면 수련실을 자주 사용하셨으니 잘 아시겠지. 원래 문주 자리는 사형의 몫이었으니까.”

원덕강이 원래 문주 자리를 이어받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수련실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그는 사문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세상을 떠돌았다. 덕분에 문주 자리는 온위립이 물려받았고.

“이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야 어떤 것이든 해봐야지.”

내공 문제는 현천문의 숙원이다. 내공이 약해서 얼마나 핍박받고 무시를 당했던가. 온위립도 이 지역이니까 그래도 발언권이 있는 거다. 조금만 더 큰 도시에만 가도 이곳처럼 당당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실력이 되지 않으니까. 제아무리 명분이 있어도 처참하게 깨지면 끝이다. 온 문주도 강호인. 그런 걸 모르지 않는다.

“확실히 마옥으로 만들어진 침상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건 분명한데..”

“예. 저도 이번에 표행을 하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서..”

그런데 중요한 부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수련실을 사용하면 뭔가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말씀을 드린 거다. 이렇게 설득했다.

“흐음.. 마옥 침상에서 수련을 하면 내공이 빨리 쌓이는 걸 보면..”

온 문주가 내공이 30년이나 된 데에는 수련실에서 마옥으로 만든 침상을 사용한 것. 그리고 원덕강이 보낸 영약을 먹은 탓이다.

마옥 침상. 현천문의 개파조사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거기서 수련하면 내공이 빨리 느는 이유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만년한옥과 같은 효능이 있는 게 아닐까 했지만, 딱히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옥이라는 이름만 아니었다면 그냥 평범한 옥으로 된 침상이었다.

‘옥 장판에서 원적외선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런데 이번에 오크를 잡았을 때, 무언가 느낌이 왔다. 그걸 확인해야 했다.

“좋다. 내 허락하지. 네가 허튼소리를 할 녀석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문주님.”

그렇게 진혁은 수련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별 거 없는데..”

진혁은 침상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공을 움직여 보면 무언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진혁은 자세를 잡고 내공을 움직였다. 내공이 사지 백해로 퍼지자 몸이 저릿저릿했다. 어딘가에 붕 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리고 심법대로 내공을 돌리자 뭔가 다른 게 느껴졌다. 다른 곳에서 운기조식을 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느낌이.

‘이거다. 분명히 이거야!’

오크를 잡았을 때 자신이 느꼈던 바로 그거였다. 그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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