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 / 0150 ----------------------------------------------
단서, 그리고 뒤끝
“당강이다. 당강이 나타났다!”
야단이 났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쳤다. 괴물에게 잡히면 산채로 잡아먹힌다는 공포에 모두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진혁도 긴장되는 걸 느꼈다. 처음으로 괴물을 보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당강이라는 괴물에 대한 호기심도 들었다.
“하 표사. 뭐해? 여기 있다간 죽어! 당강이라고. 당강.”
왕칠이 진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당강. 이틀 전에 사람들에게 들었다. 이 부근에서 나타난 괴물은 당강이라고. 산해경에 나오는 괴물이라고 했다.
진혁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당강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원덕강이 박학다식하기는 했지만, 산해경을 달달 외우고 있지는 않았다.
“크아아아!!”
괴성이 들렸다. 인간의 목청이 아닌 짐승에게서 나는 소리. 숲에서 언뜻 무언가가 보였는데, 나무와 풀에 가려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어서 움직여요. 홍 무관 아저씨는 뒤쪽을 좀 경계해주세요.”
서예주는 허둥대지 않고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진혁은 조금 놀랐다. 나이도 어린 여자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다니. 늘 느끼지만 정말 대단한 여자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숲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더니 커다란 것이 튀어나왔다.
“크아아아!!”
사람들은 공포에 짓눌려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 못했다. 커다란 덩치. 숲이나 풀과 비슷한 녹색 피부. 손에는 커다란 몽둥이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 도망치려는 사람들의 발버둥. 장내는 갑자기 난장판이 되었다. 진혁도 엄청나게 놀란 상태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어? 저건?”
저건 분명히 오크였다. 게임을 하면서 자주 보았던 판타지 종족인 오크.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여긴 분명히 무림인데 왜 오크가 나오는 거지?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꿈이라면 적어도 장르는 통일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머리가 어지럽고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이봐. 미쳤어?”
왕칠이 진혁을 잡아끌었다. 도망치다 진혁이 멍하니 있는 걸 보고는 다시 온 거였다. 왕칠에게는 진혁이 그만큼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였으니까.
“예..”
진혁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대답하고는 왕칠의 손에 끌려갔다. 하지만 운이 좋지 않았다. 괴물이 왕칠과 진혁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닥친 위험. 진혁은 커다란 몽둥이가 자신과 왕칠을 향해 날아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재빨리 검을 뽑았고 온 힘을 다해 공격을 막았다.
- 카가가각!
나무 몽둥이가 아니라 쇳덩어리였던 모양이었다. 검이 몽둥이를 긁자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진혁은 왕칠의 등을 떠밀었다.
“먼저 가세요.”
“아니. 안 돼. 같이 싸우자고.”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다. 몸을 갈아타는 방법도 있으니까. 하지만 왕칠은 아니다.
“수비하는 건 자신 있어요. 아시잖아요. 적당히 막다가 도망칠 테니까 먼저 가세요.”
왕칠은 머뭇거리다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진혁이 마음에 걸리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이 아저씨야. 걱정 말라니까. 그렇게 자꾸 쳐다보면 나만 힘들어 진다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몸을 갈아타던 할 것 아닌가. 진혁은 주변을 살피면서 오크의 공격을 막았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이야기를 듣기로는 무지막지했는데, 막상 검을 들고 맞서보니 그다지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마헌량 표두보다도 훨씬 쉽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괴물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좌측에 있는 저 무사만 봐도 그렇다. 내공 수위가 30년에 실력도 나쁘지 않은 자였다.
그런데도 일방적으로 밀렸다. 오크가 휘두르는 무기를 제대로 받아내지도 못했다.
뭐지? 저 오크와 내가 상대하는 오크의 실력 차이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상대하는 오크가 덩치도 더 크고 힘도 더 좋아 보이는데.
- 카앙!
하지만 진혁은 너무나도 손쉽게 받아냈다.
“크륵? 크륵?”
오크도 뭔가 이상한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공격을 막는 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오크는 들고 있던 몽둥이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몽둥이를 휘둘렀다.
- 카앙!
또 막혔다. 여유가 좀 생긴 진혁은 이번에는 공격을 해보았다. 지금까지야 조심하느라 방어에 치중했지만, 상대의 공격이 이 정도라면 공격도 해볼 만했다.
괴물은 당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 몸을 무겁게 했던 선입견을 버리고 나니 진혁의 움직임 자체가 달라졌다. 여유도 생겼고.
혹시나 해서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처럼 정보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보이지 않았다.
- 파앗~
공격이 오크의 옆구리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살이 살짝 갈라지면서 녹색 피가 튀었다. 이것도 듣던 것과는 달랐다. 검강으로도 생채기를 내기 어렵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괴물에 따라서 다른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나? 생각이 많아졌지만, 지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진혁은 내공을 많이 끌어올릴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지금 자신이 쓸 수 있는 내공은 아주 미약하다. 그놈의 활성화 때문이다.
활성화가 될 때마다 내공을 조금 더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대략 5~6년 정도? 가지고 있는 내력이 1갑자 정도니까 10% 정도만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르겠다. 일단 이놈부터 해치우고.”
진혁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내력을 몽땅 검에 불어넣었다. 오크의 공격이 약간이나마 느리게 보였다. 아주 약간.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오크의 공격을 피하며 품으로 파고든 진혁. 그의 검이 아래서부터 위로 대각선 방향으로 그어졌다.
- 푸화악~
오크의 가슴이 갈라지며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졌다. 역겨운 냄새가 훅하고 몰려왔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오크가 죽자 이상한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거기에 집중을 할 수는 없었다.
“크아악~ 크와아악!”
갑자기 사방에서 괴성이 들렸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오크들이 진혁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주변을 보니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땅을 밟고 서 있는 건 진혁과 오크들 뿐이었다.
‘동료가 죽어 분노하는 소리인가?’
진혁은 일단 몸을 피하기로 했다. 자신이 상대한 오크 정도라면 수십 마리도 무섭지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공연히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으니.
“크르르르.. 크륵?”
“크르윽? 크륵?”
갑자기 진혁이 사라지자 달려오던 오크들이 어리둥절해 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여기저기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진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크들은 몽둥이로 땅을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한참을 그렇게 하더니 동료의 시체를 가지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
“아이고. 살아 있었네. 살아 있었어..”
왕칠은 진혁을 보더니 정말 다행이라며 울먹였다. 한참 지나도 진혁이 오지 않자 위험을 무릅쓰고 괴물이 나온 곳까지 살피고 온 왕칠이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마구 파헤쳐진 사람들의 시체. 왕칠은 진혁도 그리되었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시체들을 살폈다. 하지만 진혁의 시체는 없었다.
“제가 막는 건 잘한다니까요.”
진혁은 잠깐 공격을 막다가 기회를 보아 바로 도망쳤다고 했다.
“괴물들 힘이 장난이 아니던데, 정말 용하네.”
“그러게 말이야. 하이고. 다시 생각 만해도 소름이 돋는다고. 어유..”
사람들 중에는 괴물이 싸우는 장면을 본 사람도 있다. 상당한 고수들도 괴물의 몽둥이질 한 번에 피떡이 되었다. 그런 괴물과 싸우다가 피했다고 하니 진혁이 엄청나게 대단해 보였다.
“아닙니다. 겨우겨우 막다가 도망친 게 전부인데요.”
진혁은 도망치기 바빴다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진혁에게 대단하다고 했다. 그런데 여자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게 정말인가요?”
서예주였다. 그녀는 진혁에게 방금 한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예. 사실입니다.”
서예주는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진혁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예. 그러시죠.”
진혁은 서예주와 함께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나왔다. 그 뒤를 홍 무관이 따라왔고. 적당한 거리가 되자 서예주가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정말 괴물, 그러니까 당강의 공격을 막았나요?”
진혁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도 있으니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예. 막았습니다. 간신히 두어 번 막은 거기는 하지만.”
“두어 번이라.. 실례지만 하 표사님 내공 수위를 여쭤봐도 될까요?”
서예주도 괴물과의 싸움을 보았다. 내공 수위가 30년 정도 되는 무인도 당강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내공이 거의 없다고 알려진 진혁이 그걸 막아냈다. 그리고 당강을 피해 도망쳤다? 자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이번 공격에서 당강의 공격을 막아내고 도망친 사람은 진혁이 유일했다.
그러니 무언가 의심이 든 거였다.
“내공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습니다.”
진혁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했는데도 서예주는 개의치 않았다.
“상단의 일행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그 정도 정보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알려주지 않으면 빼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진혁은 할 수 없이 이야기했다.
“5년 정도입니다.”
진혁의 뒤에 있던 홍 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 무관도 그 정도라고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서예주는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괴물은 어떻던가요? 무인으로 치면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것 같았죠?”
“예? 흐음. 무인으로 치면..”
대답하기가 난감했다. 마헌량 표두보다도 쉬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훨씬 고수들도 괴물들에게 죽어 나가는 판이었으니까.
“글쎄요? 제가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런 것까지는 정확하게는..”
“정학하지 않아도 좋아요. 괴물에 관한 정보를 모으려고 하는 거니까요.”
서예주 입장에서야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앞으로 괴물을 부지기수로 상대해야 하니 어떤 정보라도 모으고 싶을 것이다. 문제는 알려줄 게 마땅치 않다는 거였다.
“적어도 절정고수 이상인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저도 절정 고수를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말을 흐렸다. 이럴 때는 대충 얼버무려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괴물을 상대하면서 무언가 이상한 걸 느끼거나 그런 게 있나요?”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막는 것도 버거웠고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요.”
서예주는 진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혁은 이상하게 이 여자랑만 있으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해요. 이만 가보셔도 좋아요.”
“예. 그럼..”
진혁은 얼른 일행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진혁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지자 서예주는 홍 무관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보시기에는 어떤 것 같아요?”
“내공이 좀 약해서 그렇지 기본기는 탄탄합니다. 품성도 좋아 보이고..”
서예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뭔가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에요.”
“지금도 계속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어요.”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있다. 저 남자는 교묘하게 진실 사이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조심해야 할 사람인지도 몰라요. 아저씨.”
“예. 아가씨.”
“저 사람에 관해서 조사를 좀 해주세요. 아주 자세히요.”
***
“그러면 사문에 갔다가 장안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진혁은 인사를 하고는 서예주 일행과 헤어졌다. 이곳에서 가야 할 길이 달랐으니까.
진혁은 서예주가 자신을 그다지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전과는 대하는 게 미묘하게 달랐다.
오해가 있어서 그런 거다. 대충 어떤 건지도 안다. 하지만 그건 풀어줄 수도 없고 굳이 풀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서예주는 가장 윗사람이야. 포인트를 많이 얻으려면 윗사람하고는 사이가 나쁜 편이 더 좋을 수도 있지.”
진혁은 그것보다 오크를 죽였을 때 자신이 경험했던 이상한 느낌. 그것이 무언지 알아내는 게 더 중요했다.
“분명히 느껴졌어. 그리고 메시지도 보였고.”
자신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단 사문으로 돌아가는 게 급했다. 진혁은 현천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