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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는 표사-21화 (2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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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최고시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이 시작에 움직이는 사람은 두 종류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려는 자. 그리고 그걸 막는 자.

‘열 사람이 도둑 한 명 막기 어려운 법이지.’

게다가 그 사람이 엄청난 고수라면 더욱 막기 어렵다. 철각패도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서협 표국 사람들이 있는 별채를 제집 드나들 듯 다녔다.

- 핏 핏

그가 손을 뻗자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지풍으로 수혈을 누른 거다.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지만, 중간에 일어나면 곤란하니까.

‘너희들의 업보이니 그런 줄 알아라. 그러게 누가 그딴 식으로 살라디?’

철각패도는 마헌량에게 다가가 혈도 여기저기를 눌렀다. 그냥 대충 누르는 게 아니라 아주 세심하고 심혈을 기울여서. 정말 정성을 다해서 점혈을 했다. 소림사 방장이 오더라도 해혈하기 어려울 정도로.

점혈을 다한 후 혹시나 싶어서 방안을 뒤졌다. 역시나 표국의 자금은 없었다. 하기야 그런 중요한 자금을 아무 데나 두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예상한 일. 철각패도는 개의치 않고 다음 방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모든 방을 다 돌고 나왔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되겠지.”

그 말의 여운이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철각패도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침 볕이 별채를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어이고.. 몸이 왜 이러지?”

마헌량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술 마신 다음 날은 다 비슷하다. 머리 아프고 속 쓰리고. 몸도 찌뿌둥하다. 그런데 다른 때보다 그 느낌이 너무 강했다.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침상에서 일어났는데 제대로 걸음을 걷기조차 힘든 게 아닌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마현량 표두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너도? 이런.. 분명히 누가 장난을 친 건데..”

“예. 형님.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습니다.”

표국주인 마진량의 말에 동생 마헌량 표두가 답했다. 둘 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마헌량이 말을 내뱉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입을 닫았다. 표국주도 대충 짐작이 가는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이럴 짓을 할 건 그놈들뿐이지.”

“하지만 그들 중에서는 그 정도 고수가 없는데..”

마헌량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천위가 실력이 부쩍 늘기는 했지만, 이런 점혈을 하는 건 무리였다.

점혈은 기본적으로 내공을 사용한다. 내공으로 기의 흐름을 막아 여러 가지 이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점혈의 기본. 그런데 지금 당한 점혈 수법은 상당한 고수의 작품이었다.

“아니. 있다. 이럴 짓을 할 수 있는 게 한 명 있어.”

“그게 누굽니까?”

“목세강!”

마헌량의 두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목세강. 그자가 그 정도로 고수란 말입니까?”

“그래. 당주님이 이야기를 해 준 것이니 틀림없다.”

무림맹 도검당주인 백령진인의 말이라면 틀림없을 것이다. 표국주는 짜증이 나는 듯 기둥을 쾅 때렸다.

“술을 마신 건 다 속임수였겠지. 아마도 우리가 붙여놓은 자를 따라왔을 거다.”

그런데 마헌량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형님. 이거 왕 표사가 당한 점혈하고 상당히 흡사합니다.”

“뭐? 그럼 철각패도가 왔었단 말이냐?”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방식이나 증상이 너무 비슷해서..”

마진량도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유사점이 많았다.

“철각패도가 왜 이런 짓을?”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목세강이라면 말이 된다. 이런 식으로 골탕을 먹이는 이유가 있으니까. 받아야 할 돈, 그게 목적일 거다.

하지만 철각패도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

“그 정도 고수가 할 짓이 없어 이런 짓을 하겠느냐. 그냥 비슷한 점혈 수법이겠지.”

“하긴 그렇긴 합니다. 원한이 있다면 이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수법을 썼을 테고..”

딱히 원한도 없다. 객잔에서 있었던 일이야 왕 표사로 끝냈고. 그 이후로는 부딪친 일이 없으니까. 둘은 이 점혈이 목세강의 짓이라고 결론 내렸다.

“자금이야 전장에 맡겨 놓았으니 상관없지만, 몸이 이래서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당장 상단 사람과 만나야 하는데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형님.”

오늘부터 의뢰를 받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되었으니 낭패였다.

장안까지 표행을 마치고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건 손해가 너무 크다. 그래서 보통 돌아올 때 할 수 있는 의뢰를 받는다. 그런데 이 꼴이 되었으니 난감할밖에.

“황서군 대협은 어떻게 연락이 되었느냐?”

“예. 형님. 급히 연락해서 곧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황 대협이라면 해혈이 가능하겠지.”

그렇지 않았다. 얼마 후 찾아온 황서군은 이들의 몸을 살피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고절한 수법이군요. 어렵겠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마진량은 다른 방법은 없느냐며 애원하듯 말했다.

“저도 처음 보는 수법입니다. 사문의 어르신들이라면 혹시 방법을 아실지 모르겠지만..”

황서군이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라면 무당파의 장문인과 같거나 더 높은 항렬의 인물들이다. 지방의 작은 표국 국주가 해혈을 해달라고 그 사람들을 부른다?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당장 황서군에게 눈총을 받을 거다. 마진량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그리고 내공은 끌어올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기혈이 역류할 수도 있으니까.”

황서군은 사실 무척 놀라고 있었다. 표국 사람들 모두에게 점혈을 했는데 그 수법이 아주 교묘했다.

하수들은 잘하면 해혈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심력도 많이 소모해야 가능한 일이라 그런 말을 안 했을 뿐이다.

하지만 표국주와 표두를 비롯한 고수들. 그러니까 표국에서 그나마 고수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에게는 조금 더 풀기 어렵게 해 놓았다.

상대의 내공 수위에 따라서 조절을 했다는 거다. 그건 내공을 쓰는 것이 경지에 올랐다는 거다. 황서군도 흉내는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세밀하고 정교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저기.. 혹시..”

마헌량이 혹시나 싶어서 질문을 했다.

“대협. 혹시 일전에 철각패도가 점혈을 한 일 기억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지..”

“혹시 그 수법과 비슷한 것 같지 않나 해서 말입니다.”

황서군은 잠시 생각을 더듬었다.

“철각패도라.. 흐음.. 아니요. 다릅니다.”

비슷하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분명히 달랐다. 그때의 점혈은 육체적인 제약을 가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이번 점혈은 내공의 사용을 억누르는 방식.

“증상이 유사해서 비슷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다른 수법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점혈이 풀릴 것 같습니까?”

“그건 경과를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지금은 뭐라 이야기를 하기 어렵군요.”

자신보다 고수의 수법이다.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 몸에 넣어 좋은 내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대략 보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했다가 틀리기라도 하면 낭패. 상황을 봐가면서 말해주는 편이 나았다.

더구나 이들은 무당과 긴밀한 관계도 아니었고. 황서군은 무림맹 분타에 말해 도움을 받거나 다른 사람을 알아보라고 했다.

“소림에 연락을 넣어보는 게 어떻습니까?”

마진량과 마헌량 형제는 소림의 속가제자에게 무공을 배웠다. 원래는 소림 계열에 청을 했어야 맞는 일. 하지만 장안에 그만한 고수는 없었다.

백령진인이 떠나면서 그나마 있던 고수들을 전부 데리고 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당의 황서군에게 부탁을 한 거였다.

“일단 사람을 찾아보고 다른 건 몰라고 오늘 성흥 상단 사람은 봐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 준비하죠.”

***

한천위는 해장을 하자마자 다시 성흥 상단을 찾아가자고 말했다. 표국 사람들은 찾을 수 없으니 상단에 가서 따지자는 거였다.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목세강이 혀를 찼다. 성흥 상단은 하북에 본거지를 가지고 있는 상단이다. 상단의 특성상 여러 무림 문파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하지만 가장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은 소림이다.

“현재 무림맹주가 소림의 무원대사이니 그 덕을 꽤 보았지.”

“그런가요?”

목세강의 이야기에 한천위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그 모습에 진혁은 피식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런 정치적인 역학 관계는 몰라도 그만이다. 하지만 무림인, 특히 고수가 될수록 그런 걸 모르면 여러모로 피곤하다.

무림맹은 9파 1방과 5대 세가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큰 단체가 만들어지면 꼭 파벌이 생겨난다.

현재 무림맹에는 세 파벌이 있다. 소림을 중심으로 한 파벌. 무당을 중심으로 한 5대 검파. 마지막으로 5대 세가의 연합.

이 세 개의 파벌이 서로 자기 세력에서 맹주를 내겠다고 지금부터 신경전이 대단했다. 무림맹주가 되면 그만큼 큰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그 권한은 돈과 직결되어 있고.

“그런데 그게 우리 돈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헌천위의 말에 목세강이 한심하다는 듯 타박을 했다.

“사협 표국이 성흥 상단하고 계속 거래를 하는 게 왜 그렇겠냐?”

“뭐. 그동안 의뢰를 잘 했나보죠.”

웃기는 소리였다.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나.

“표국주와 표두가 모두 소림과 인연이 깊어서 그런 겁니다.”

“어..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던 한천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가만. 그렇게 친한 사이라는 건. 그럼 이 자식들이 처음부터 우리 돈을 떼먹으려고?”

“성흥 상단 정도 되는 곳에서 이런 적은 돈 때문에 그럴 리는 없겠죠.”

아마도 잘 아는 사이이니 부탁을 들어준 정도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가서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거다. 알겠냐?”

“맞습니다. 성흥 상단에서는 오히려 사협 표국을 감싸고 돌 겁니다.”

진혁까지 거들자 그제야 한천위는 포기하는 듯했다.

“아우. 그럼 그 돈을 어디 가서 찾아?”

분은 풀리지 않은 듯했지만. 목세강은 진혁을 슬쩍 바라보았다. 사실 자신은 그 돈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돈이 곤궁한 편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다. 정말 목숨을 걸고 일해서 받기로 한 돈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찾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네라면 좋은 생각이 있을 듯한데.”

“저라고 특별한 수가 있겠습니까. 상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기야. 일을 허투루 하는 사람들이 아니지. 특히나 이런 일은.”

계약이나 법 관련된 일은 철저한 게 상단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그래도 일단 고변은 할 생각입니다.”

“자네. 혹시.. 태수에게 이야기를 할 생각인가?”

장안 태수와 인연이 있다는 걸 가장 잘 아는 게 목세강이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태수가 나선다면 제아무리 성흥 상단이라 하더라도 뻣댈 수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진혁은 빙긋 웃으며 묘한 말을 남겼다.

“뭐. 비슷하기는 한데 좀 다른 것 같네요.”

***

“발고가 들어왔다?”

“예. 그렇습니다.”

장안 태수 손제형은 관리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겐가. 그거야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면 될 일이지.”

“그래도 알아는 두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손 태수는 빙긋 웃었다.

“자네도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나보구만.”

“꼭 그런 건 아니오라..”

관리는 조금 난처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발고 내용을 살피다 하진혁이란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천막에서 태수와 나누던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라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발고 내용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거였고, 심각하다면 심각했다. 성흥 상단과 사협 표국이 모의해서 임시 표사들의 임금을 빼돌렸으니 조사를 해달라는 내용.

본인들에게야 생계가 달린 문제겠지만, 단순하게 금액으로 보면 큰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단과 표국이 작당해서 힘없는 백성의 돈을 갈취한 일이었다.

“사실이라면 반드시 중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야 국법의 지엄함이 바로 설 것입니다.”

“그렇겠지. 일단 자네가 조사를 해보게.”

전임 태수가 얼마나 해먹었는지 기강이 엉망이었다. 앞으로 일을 제대로 하려면 부임하고 초반이 중요한 법. 손 태수는 이번 사건을 본보기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세하게 조사하리라 믿네.”

“여부가 있겠습니다. 확실하게 파헤치겠습니다.”

관리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물러섰다. 그 대화를 지붕 위에 누워서 듣고 있던 철각패도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자. 그럼 이거저거 준비를 좀 해야지..”

철각패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원래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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