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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최고시다.
표국주는 이야기만 잘 된다면 상당한 거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열흘을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편이 싸게 먹힐 거라는 계산을 해서였겠지만.
사람들도 은근히 기대했다. 하루라도 빨리 장안에 가길 원했다. 빨리 돈을 받고 좀 쉬었으면 좋겠다면서.
진혁은 장안 태수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자 많은 것들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무척이나 강직하지만, 주변 사람에게는 잘해주는 인물이군.’
진혁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태수가 있는 천막에 들어갔다.
“현천문의 제자 하진혁이 태수님께 인사 올립니다.”
진혁은 장안 태수 손제형에게 인사를 올렸다. 태수의 옆에는 관리로 보이는 자가 한 명 있었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진혁이 청탁을 하러 왔다고 생각해 그런 듯했다.
“그래. 네가 덕강의 제자라고?”
“그렇습니다. 태수 어른.”
기억에 있는 사람이었다. 원덕강의 기억을 더듬었는데, 둘은 친분이 무척이나 두터웠다. 손 태수는 웃으면서 편하게 대하라고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지?”
“사실 제가 연락을 넣은 건 아닙니다.”
진혁은 표국에서 연락을 했다는 점을 밝혔다.
“용케도 나와 덕강의 친분을 알았나 보군. 그거야 그렇다 치고.”
손 태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친우의 제자이니 부탁을 하면 생각해보겠다는 표정으로.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니 자네가 이곳까지 온 것 아니겠나. 얘기를 해보게.”
“표국에서는 장안으로 하루라도 빨리 들어갔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를 이곳에 보낸 겁니다.”
관리는 역시나 하는 표정이었고, 손 태수는 재미있어했다.
“어째 자네는 원치 않는데 억지로 온 것 같이 이야기하는구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원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
“호오. 그래? 그건 왜지?”
진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자신이 말하려는 방향이 맞는지를. 결정을 내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맥을 이용해서 원칙을 어기는 청탁을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손 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크게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너무 융통성이 없는 것 아닌가.”
“어겨도 누구나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는 한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상한 점이 있었는지 태수는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는 걸 거절하면 될 일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진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임시이기는 하지만 표국에 고용이 된 몸입니다. 윗사람의 부탁을 무조건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줄 압니다.”
진혁은 만약 강압적으로 지시했다면 소신을 밝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탁을 했기에 이렇게 이 자리까지 온 거라 말했다.
“그래? 허허. 아주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안 그런가?”
“예. 그런 듯합니다.”
태수 옆에 있던 관리가 대답했다. 그는 처음보다는 표정이 많이 풀어진 상태였다. 태수는 다시 진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러면 내가 어찌했으면 좋겠나? 길을 열어줄까? 아니면 가지 못하게 할까?”
조금은 장난기가 있는 말투. 진혁은 곧장 대답했다.
“이곳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정황을 살피고 계신 태수님께서 공정한 결정을 내려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대답에 손 태수는 파안대소를 했다.
“푸하하.. 역시 덕강의 제자로다. 그 친구의 성품을 똑 닮았어.”
그는 관리를 쳐다보았다.
“어떤가? 내 말이 맞았지? 덕강의 제자가 단순하게 청탁을 하러 올리 없다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성급하게 말씀을 드린 듯합니다.”
태수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자네가 이렇게 직언을 해 주는 게 좋다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주게.”
“감사합니다. 태수님.”
손제형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했다. 오랜만에 친우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지 다정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내일까지만 기다리라고 하려무나.”
괴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급히 달려왔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병사들을 배치하고 수색을 계속할 것이다.
“백성을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그들의 불편함 또한 내가 살펴야 할 일.”
그래서 안전이 확보되면 통행을 재개할 것이라고 했다. 그게 바로 내일이었다. 내일까지 괴물이 발견되지 않으면 그렇게 하겠다는 거였다. 손제형의 대처는 기억 속에 있는 성격 그대로였다.
원덕강은 손제형을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손 태수는 원덕강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다. 기억을 더듬어 여러 곳을 돌아다닌 이야기를 했다.
“사부님은 종종 퉁소를 부시다가 태수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 덕강.. 그 친구 퉁소 솜씨는 일절이었지. 나는 금을 타고 그 친구는 퉁소를 불고..”
손 태수는 아련한 표정이 되었다. 진혁은 그 표정을 보자 짠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이토록 깊은 교분을 나눈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둘이 같이 있던 기억을 진혁도 볼 수 있었기에 더욱 부러웠다.
진정한 친구. 자신은 그런 친구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자신할 수 없었다. 좋을 때야 친한 사람이 넘친다.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어려울 때 빛나는 법.
손제형이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 원덕강은 감옥을 부수고 그를 살렸다. 손제형이 무고하다는 걸 확신했으니까. 대신 부서진 감옥에 앉아 손제형의 무고함을 밝히기를 청했다.
무고한 손제형을 살리는 일이었지만, 국법을 어기는 행동을 했으니 감옥에 스스로 들어간 거였다. 이 사실은 황실까지 알려져 재조사가 들어갔고, 손제형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나와 덕강은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느니라. 앞으로는 나를 네 사부처럼 여기거라.”
“감사합니다. 앞으로 사부님을 대하듯 예를 다하겠습니다.”
“그래. 시간이 되면 가끔 찾아와 네 사부 이야기나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진혁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천막을 빠져나왔다.
‘그래. 저렇게 강직하고 훌륭한 사람과는 좋은 인연을 만들어 놓아야지.’
여기가 아니라 원래 있던 세상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걸어서인지 일행이 있는 데까지는 갈 때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이야. 내일이면 갈 수 있다니.”
표국주는 약속한 돈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진혁은 받지 않았다.
“저는 한 일이 없습니다. 원래 내일까지 괴물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닐 수 있게 할 예정이었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약조한 돈일세. 약속은 지켜야지.”
마진량 표국주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진혁의 손에 쥐여주었다. 하지만 진혁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정말 저는 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돈을 받는 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표국주는 입맛을 다셨다. 사실 뭐가 예쁘다고 진혁에게 돈을 주겠는가. 장안 태수와 친분이 있으니 이렇게 돈을 안기려는 거였다.
진혁도 그걸 뻔히 아니 거절하는 거였고. 이런 사실이 태수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렵게 만들어 놓은 인연이 깨질 수도 있다.
손제형이 왜 무림인을 싫어하겠는가. 관부와 결탁해서 이권을 나눠 먹고, 온갖 협잡질을 해서 그런 거다. 그러니 이런 돈은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태수님을 어렵사리 만나고 왔는데..”
“사부님과 교분이 좀 있으신 거지 제가 태수님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도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
마진량은 잠시 망설이다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그러게.”
마진량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진혁과는 일이 계속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 약간 째려보는 것이 기분이 많이 상한 듯했다.
진혁은 밖으로 나와 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제 이삼일이면 표행이 모두 끝난다며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했다.
“내가 제대로 보긴 봤구만.”
태수나 표국주와의 대화를 모두 엿들은 자하 검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살펴볼 생각이지만 볼수록 탐이 나는 인재였다. 그는 친구인 진원휘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
드디어 장안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이제 세면 할 때가 됐구만.”
그 소리에 다들 크게 웃었다. 임시 표사뿐 아니라 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세면을 할 때가 되었다는 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표사들의 은어였다.
‘실제로도 표행을 하면서는 세면을 하지 않으니 은어가 아니라고 할 수도..’
진혁도 이번 표행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사건이 너무 많이 터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한 이삼일 정도는 푹 쉴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성흥 상단의 장안 지부로 향했다. 표물을 건네주어야 하는 최종 목적지. 표국주는 표단을 건네고 상단 사람들이 표물을 확인했다.
표단은 표행이 떠나기 전에 작성하는 것으로 물건의 수량이나 가격과 같은 표행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적어 놓는 문서였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쉬고 있자고.”
임시 표사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다. 중간에 소실된 물건들이 있으니 셈을 하는 데 좀 복잡할 것이다.
반면 무림맹 사람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있었다. 볼일이 끝났으니 아마도 무림맹 분타에 가는 모양이었다.
“이상한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한참을 기다려도 표국주가 나오지 않자 왕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표물도 모두 옮겨졌고, 표국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낌새가 이상했는지 웅성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다른 데 간 거 아냐?”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셈도 끝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상단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사협 표국의 임시 표사들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사협 표국과 정리를 하면서 그쪽 삯을 우리가 대신 주기로 했습니다.”
무언가 이상했다. 하지만 일단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이름을 부르면 나와서 받아가면 됩니다.”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했다. 뭐. 돈을 누가 주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받기만 하면 그만이지. 돈을 준다는 말에 사람들은 벌써부터 기대를 잔뜩 했다.
“일단 술부터 진탕 먹자고.”
“아무렴. 당연하지.”
그런데 돈을 받은 사람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 이거 이상한데?”
“왜? 뭐가?”
돈을 받는 사람들 모두 돈이 적다고 난리였다.
“곱절로 받기로 했는데 원래 받기로 한만큼 밖에 없다니까?”
“나도. 나도 그래.”
하아. 이 새끼.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보나 마나 뻔했다. 표국주가 잔머리를 굴린 거다. 상단과 셈을 하면서 농간을 부린 것.
사람들이 상단에 따졌다. 받기로 한 것과 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상단 사람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우리는 전달받은 대로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원래 계약한 종이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거기에는 원래 금액이 적혀 있다. 하지만 중간에 계약이 바뀌었다.
진혁은 표국주와 새로 계약한 종이를 꺼냈다.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 중간에 계약을 새로 했습니다.”
“그거야 우린 모르는 일이오. 따지려면 표국에 가서 따지구려.”
상단 사람은 어서 받고 상단에서 나가라고 말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럼 표국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나 알려주시오.”
“그건 우리도 모르지.”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오. 우리 보고 사협까지 다시 가서 받으란 말이오?”
옥신각신했지만 상단 사람들은 단호했다.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는 거였다. 눈치를 보니 표국과 미리 이야기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네? 내가 장안 태수와 아는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럴 수가 있나?’
도대체 표국주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농간을 부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