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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시시각각 변한다.
“포인트를 모으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군..”
철각패도의 몸을 한 진혁은 팔찌를 슬쩍 쳐다보았다. 팔찌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 칸만 약간 남았을 뿐, 나머지 칸은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지금 또 한 곳을 털어서 재물을 나눠주고 왔으니 내일이면 포인트는 꽉 찰 것이다. 그렇게 되면 팔찌만 하나 더 모으면 된다.
“포인트를 다 모으고 팔찌 두 개. 그 조건만 충족하면 돌아갈 수 있다.”
철각패도는 담과 지붕을 밟으며 공중을 날아다녔다. 엄청난 덩치가 제비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물론 밤이라 본 사람도 없긴 하지만.
철각패도는 몸을 날려 한 객잔의 별원으로 스며들었다. 원보상단의 서예주가 있는 곳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지붕에 사뿐히 내려선 철각패도는 귀를 기울였다.
“아직인가요? 아직 오시지 않으셨어요?”
“도착하시면 연락이 올 겁니다.”
얕은 한숨 소리. 서예주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근심이 한가득 묻어있는 말소리가.
“자금을 거절당했다구요?”
“예. 가능성이 없는 계획에 내 줄 자금은 없다고 했답니다.”
“그러면 그분이 합류한다고 해도 자금을 구해야 하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가 많은 모양이었다. 철각패도는 조용히 몸을 날려 별원의 입구에 떨어졌다. 갑자기 곰 만한 사람이 나타나자 무사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철각패도인 걸 알아보고는 곧바로 안으로 안내했다. 한 명은 안으로 뛰어들어갔는데, 소식을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
“대협. 오셨군요.”
서예주가 활짝 웃으면서 반겼다. 절세미녀의 환한 미소는 진혁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한국에 있을 때 제대로 된 연애 경험도 없었던 진혁 아닌가. 그런데 연예인 뺨치는 미녀가 살갑게 반기니 심장에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
‘와. 환한 불빛에서 보니까 더 죽인다.’
서예주는 철각패도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이상하게 생각하다 얼른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협.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크흠..”
진혁은 다소 멋쩍게 기침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고 차가 나오고 간단한 안부를 묻는 말이 오가고.
“시간이 많이 않으니 바로 본론을 말하는 게 어떤가?”
“예. 대협. 그럼 바로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서예주는 사주까지 갈 생각인데 동행을 해달라고 말했다.
“사주?”
“예. 거기까지 가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주라면 돈황을 말한다. 돈황이라면 서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과의 무역 중심지. 이곳 장안에서부터 돈황까지의 길이 실크로드의 시작 부분이다.
“사주까지 가는 길은 괴물들이 워낙 많아 대 상단이나 가끔 다닌다고 하던데..”
“그러니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것이옵니다. 대협.”
길을 개척할 수만 있다면서 상단으로서는 엄청난 일이다. 거대 상단으로 거듭날 수도 있는 일.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못하는 이유가 있다. 너무나도 위험하니까.
그럼에도 시도하려는 데는 무슨 사연이 있겠지만 묻지 않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미안하지만 동행은 불가하다.”
돈황까지 길을 개척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엄청나게 위험하고. 그런 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팔찌만 하나 더 찾으면 끝이니까.
“대협. 도와주시면 대협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일없다. 그것보다 팔찌에 관한 건 알아보았나?”
서예주는 야릇한 미소를 보였다.
“한 개의 행방은 알아냈습니다.”
“그래? 어디 있지?”
“지금 사주에 있습니다.”
‘이런 젠장. 이거 구라 아냐?’
의심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서예주가 돈황까지 가는 길을 개척하려고 하는데 마침 팔찌가 돈황에 있다니.
“팔찌의 주인이 돈황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서예주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러니 어서 동행하겠다는 말을 하라는 눈빛이었다. 사실 이런 미녀라면 같이 다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진혁은 마음을 추슬렀다. 어차피 팔찌 하나만 더 있으면 2016년 한국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팔찌는 돈황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지?”
“나머지는..”
서예주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내심 같이 가기를 바랐는데, 철각패도가 넘어오지 않아서였다. 그가 같이 간다면 성공은 반쯤 보장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말이다.
“황실에 있는 데,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황실의 정보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가? 그러면 이렇게 하지..”
철각패도는 아까 자금이 모자란다고 들은 걸 이용하기로 했다.
“내가 돈을 내지. 황실 정보라는 걸 감안해서 금자로 십만. 어떤가?”
“금자 십만?”
홍 무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금자 십만 이라니. 최근 시세가 금자 하나로 쌀 한 석을 살 수 있다. 그러니 금자로 십만이면 쌀이 십만 석이다.
‘놀랄 만도 하지 한국에서의 돈 가치로 따져도 3백억 원이 넘는 돈이니까.’
물론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충 그 정도 된다.
서예주도 입이 떡 벌어져서 말을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상단에 요청한 금액이 금자 삼만이었다.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인데, 십만이라니.
“시.. 십만이요? 은자가 아니라 금자로요?”
“어떤가. 그 정도 금액이면 팔찌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겠나?”
알아내고도 남는다. 뭘 훔쳐오거나 누굴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있는지만 알아내는 거다. 그 금액이면 팔찌가 아니라 옥새나 황실 보물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추.. 충분합니다.”
너무나도 큰 금액에 서예주나 홍 무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가겠네.”
금자 절반 정도는 직접 주기로 했고, 절반 정도는 전장을 통해 받으라고 했다. 사혈련이 운영하고 있는 사해 전장을 통해서.
물론 곧바로 가는 척하다가 지붕 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엿들었다.
“아가씨. 이건 정말 큰 기횝니다. 길을 개척하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걸 하시지요.”
“아니요. 다른 건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요.”
누군가가 방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걸 내가 가져야 해요. 그건 새로운 길을 찾는 것 밖에는 없어요.”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괴물의 무서움을 아가씨는 모르고 계세요.”
“홍 무관 아저씨.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말라 죽어요. 그럴 바에는 뭐라도 해봐야죠.”
둘은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팔찌 이야기는 한참 뒤에나 나왔다.
“팔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알아봐야죠. 어디에 있는지.”
“하지만 그러다가 잘못되면 아가씨와 마님께서..”
“그 정도는 각오해야죠.”
진혁은 입맛을 다셨다. 이것도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연 있는 사람들이 뭐 이렇게 많아?’
하지만 알게 뭐냐. 어디 있는지만 알게 되면 바로 움직일 거다. 철각패도 정도면 제아무리 황실에 있는 물건이라도 빼 올 수는 있을 것이다.
진혁은 허공을 날으며 운기조식을 할 장소를 물색했다. 인적 없고 갑자기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안전한 장소를.
***
오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지만, 진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깼다.
‘기대감 때문인가?’
설레고 두근거리는 게 확실했다. 다시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진혁은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여 방을 나왔다.
“어쩐 일인가? 이 시간에?”
먼저 밖에 있던 목세강이 말을 걸어왔다.
“그냥 잠이 좀 오지 않아서요. 그런데 목 표사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나도 잠이 오지를 않아서..”
진혁은 옆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그 무공에 대해서 사부님께 들었던 말이 생각났는데..”
“음? 내 검법 말인가?”
목세강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진혁의 사부 이야기를 듣고 난 후라 더욱.
“예. 사부님께서는 내공의 운용이 다소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무공은 형과 초식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내공의 운용이 더해져야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온다. 진혁은 자신이 보았던 부분을 살짝 언급했다.
“다른 이야기도 하셨는데 그건 기억이 잘..”
“가만. 그러니까 기해혈이 아니라 중극혈로 보내야 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게 무학 이론에 더 맞는다고 하셨습니다.”
원덕강도 내공이 약했다. 그런 사람이 내공의 운용에 관해서 너무 정통한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무학 이론상 그렇다는 핑계를 댄 거였다.
“흐음.. 중극혈이라..”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내공은 잘못 움직이면 정말 큰일 난다. 주화입마에 걸려 죽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지간했으면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는 태사부와 함께 보검이란 걸 보고 왔다.
별다를 것 없는 검이었다. 뭔가 비밀이 있겠지만, 자신의 복수에는 도움이 되진 않았다.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그러던 차에 진혁의 말을 들으니 가만히 있기 어려웠다.
“자네. 날 좀 도와주게.”
목세강은 진혁과 함께 마을 밖으로 나갔다.
“조심해서 해보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저쪽 움막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을 해주게.”
목세강은 조금 떨어져 있는 낡은 움막을 가리켰다. 태사부인 자하 검선이 머물고 있는 움막. 내공이 꼬이고 기혈이 역류하더라도 자하 검선이 오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진혁이 알겠다고 하자 목세강은 신중하게 검법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속도를 중시하는 검법은 아니었지만, 원래보다도 더 느리고 신중하게 움직였다. 마치 둔공을 연습하는 것처럼. 그리고 문제의 부분이 되었다.
‘아직까지는 문제는 없는데..’
바로 여기였다. 내공이 움직이다가 붉은색이 되었던 부분. 진혁도 집중해서 목세강의 움직임을 보았다. 내공이 움직이다 기해혈이 아닌 중극혈로 향했다.
‘색이 변하지 않았다.’
붉은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제대로 된 길이라는 의미. 목세강의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진혁은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희열. 환희.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목세강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짜릿했다. 내공을 중극혈로 인도할 때만 해도 두려움이 앞섰다. 무림인 치고 주화입마에 대한 공포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건 고수일수록 더했다.
내공이 약한 하수들이야 주화입마에 잘 걸리지도 않지만, 걸려도 별문제가 안 된다. 내공이 약하니 몸이 받는 충격도 덜하고 바로잡기도 수월하니까.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과 부딪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고수에게 주화입마는 치명적이다. 시속 100km로 달려오는 자동차와 충돌한 셈. 정말로 운이 좋아야 살아남는다.
‘이게 맞는 길이야. 확실하다. 이거야.’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공이 중극혈로 이동하는 순간 검의가 살아나는 걸 느꼈다. 그건 말이나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였다.
머릿속에 얽혀있던 것이 탁 풀어졌고, 흐릿하게 보였던 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다음 동작으로 이어졌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거 잘하면 뭔가 될 것 같은데?’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목세강은 깨달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집중하고 운이 좋다면 그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 단계 위의 경지로 올라설 것이고.
하지만 대부분이 문을 두들기다가 만다. 깨달음을 얻어 각성을 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아예 그런 기회조차 평생 잡지 못하는 사람도 허다하다.
‘그러니 이런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해야겠지.’
어쨌든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포인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던져놓은 재물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새벽에 일하러 나온 사람들이 발견한 모양.
팔찌의 마지막 칸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실핏줄 정도의 부분만 차면 포인트가 꽉 차는 상황. 진혁도 포인트가 꽉 차면 어떻게 될지 한껏 기대를 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