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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는 표사-16화 (1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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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시시각각 변한다.

협상을 할 때 가장 힘든 상대는 극단적으로 나오는 상대다. 마진량은 이러지 말라면서 황급히 다독였다.

“내가 주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시 생각해 보게.”

임시로 고용한 자들이 모두 관두겠다고 하면 가져온 표물은 버려야 한다. 무림맹 사람들에게 표물 좀 나르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진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국주님. 저도 의견을 전하는 입장입니다. 사람들이 곱절 아니면 그만두겠다고 하니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니. 꼭 이렇게 나와야겠나?”

표국주는 약간 화를 냈다. 언제 일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있겠는가. 그냥 손가락만 까딱하면서 부리는 것에만 익숙했지.

“내가 알아서 넉넉하게 챙겨줌세. 그러면 되지 않나.”

알아서 챙겨준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을 거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비정규직이라고 돈 떼어먹으려고 하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사람들 의견이 워낙 단호해서. 아시잖습니까.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끄응...”

왕 표사와 마헌량 표두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푸대접에 갑질 횡포까지 당하자 임시 표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곱절을 주어도 손해가 아니긴 한데..’

마진량 표국주는 고민했다. 표물의 손해는 무림맹에서 전부 메꿔주기로 했다. 그 물건만 제대로 지킨다면 말이다. 그러니 사실 임시 표사들이 달라는 대로 주어도 남는 장사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그런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내 손에 거머쥐기를 원하는 게 사람 심리다. 그래서 마진량은 핑계를 대면서 돈을 깎으려고 한 거였다.

“자네들이 잘 좀 설득해 주면 안 되겠나? 손해가 너무 크네. 표국이 위태로울 지경이야.”

마진량은 진혁과 목세강에게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그렇게만 해주면 둘에게는 따로 사례를 하겠다면서.

“여기까지 오는 길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헤치면서 간신히 이곳에 온 겁니다.”

진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표물을 지키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지키려고 이곳에 온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러니.. 저는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목세강이 진혁의 말을 받았다.

“어쩌겠습니까. 서로 뜻이 맞지 않으면 갈라서는 수밖에. 여기서 정리하고 저도 사람들과 술이나 한잔 해야겠습니다.”

마진량은 난처했다. 돈을 더 주기는 아까웠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가져온 표물을 굳이 버릴 이유는 없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돌아다닐지 모른다. 서로 좋지 않게 끝나면 없는 말도 지어내는 게 사람의 일이다.

아마도 사협 표국은 파렴치하고 상종 못 할 곳이라는 소문이 돌 것이다. 그것까지도 견딜 수 있다. 그런 말이야 조금 지나면 사그라질 테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 목세강이 문제였다.

‘무서운 고수라고 했지?’

무림맹의 도검당주 백령진인이 이야기했다. 목세강이 자신에 버금가는 고수인 것 같다고. 그런 고수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척을 지는 건 좋지 않았다.

무림에서는 무공이 곧 힘이고 권력이다. 그러니 엄청난 고수인 목세강과는 원만한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내 들어주지. 들어준다고.”

마진량은 지금은 이들을 달래야 할 시점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진혁은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역시 국주님은 공명정대하십니다. 그러면 문서로 만드시죠.”

진혁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마진량은 기가 막힌다는 듯 진혁을 쳐다보았다.

“아니. 지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저야 국주님 말씀을 믿습니다. 허투루 말을 하실 그런 분이 아니죠.”

진혁은 마진량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타깝다는 표정을 한 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까 있었던 일 때문인지 꼭 문서로 만들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는 터라..”

자신은 그저 의견을 전달하는 것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진량의 눈꼬리가 매서워졌다. 그도 강호에서 구를 만큼 굴렀는데, 지금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진혁은 자신을 농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마진량은 이를 갈면서 문서를 써주었다. 인장까지 찍고.

밖으로 나오면서 목세강이 슬며시 물었다.

“자네. 원래 성격이 이런가? 지금까지 봤던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사람이 어디 한가지 면만 있겠습니까. 하지만 보통은 저러지 않습니다. 제 성격에 맞지도 않고요.”

진혁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세강은 잠시 멈추어 서서 중얼거렸다.

“약자에게는 따뜻하고 강자에게는 당당하게 맞선다는 거로군. 허허..”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착하고 어리숙한 것보다는 좋군. 당분간은 같이 다녀볼까?”

***

“이제 정말 다 왔네. 그려.”

저 멀리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 보이는 촌락이 보였다. 산 중턱에서 보이는 거라 실제로 도착하려면 족히 반나절은 걸리겠지만, 저 촌락이 보이면 표행은 끝이 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장안까지는 사흘 거리였는데, 그 사이에 위협이 될 만한 게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아이고. 오늘은 좀 편하게 쉬겠구만.”

처음보다는 많이 줄어든 수였는데, 다소 분위기가 묘했다. 진혁 일행은 활기찬 분위기였다. 황서군을 비롯한 무림맹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움직였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말도 거의 섞지 않았다.

서협 표국 사람들은 기가 죽어 있었다. 임시 표사와 붙어서 패했으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었다. 서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웃으면서 수레와 함께 걸어가던 진혁은 말을 나누던 쟁자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요.”

진혁은 길을 가던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제가 들어드릴까요?”

“응? 그럴텨? 아이고. 고맙네.”

진혁은 할아버지의 짐을 들고는 할아버지와 말동무를 하며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중얼거렸다.

“히야. 하 표사님은 정말.. 저러기 쉽지 않은데.”

“내 말이. 요즘 저런 사람이 어디 있나. 우리 애도 저렇게 컸으면 좋겠구먼.”

하지만 진혁은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정보가 보이지 않아. 이 할아버지 고수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수.’

약자 편에서 포인트를 얻으려면 강자와 척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가능하면 고수들과 인연을 만들어 놓으면 좋다. 위급할 때 방패막이로 써먹을 수 있으니까.

진혁은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걸어갔다. 그런데 노인을 보고는 긴장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목세강이었다.

‘저 영감탱이가 여기는 어쩐 일이지?’

목세강은 나중에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자신이 있는 걸 보았을 테니 찾아가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괴롭힐 터.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진혁과 두런두런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길을 걸었다.

“아니. 오다가 산적을 만났다고?”

“예. 겨우 목숨만 부지했죠. 그래도 표물은 지켰으니 다행이에요.”

“에잉. 그럴 땐 그냥 도망쳐야지. 죽고 나면 표물이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명색이 표사인데 쉽게 포기할 수야 있나요.”

진혁의 말에 노인의 눈이 잠깐 빛났다. 정말 찰나의 순간 형형하게 빛나서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렇게 움직이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노인은 짐을 달라고 했다. 이 근처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했다면서.

“고맙네. 젊은이. 복 받을 거야.”

“에이. 당연한 일을 한 건데 복은요.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진혁은 밝게 웃으면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노인은 잠시 진혁을 쳐다보다가 맨 뒤쪽에 있는 쟁자수 한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기 저 친구 이름이 뭔가? 나랑 같이 있던.”

“하 표사님이요?”

쟁자수는 이름은 하진혁이고 현천문 소속이며 이번 표행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까지 줄줄 읊어댔다.

“허어. 요즘 같은 세상에 저런 젊은이도 있군. 그래.”

“아이고. 말씀 마세요. 저도 산적에게 잡혀 죽을 뻔했거든요. 하 표사님 아니었으면 죽은 목숨이에요.”

쟁자수 지씨는 진혁이 얼마나 올곧고 정의로우며 훌륭한 사람인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아이고. 이만 가봐야겠네요. 더 물으실 거 없으시죠?”

“그래. 일행이 벌써 저만치 갔구만. 어서 가보게.”

노인은 후다닥 뛰어가는 지씨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냥 보기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노인네 같아 보였다.

노인은 나무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다가 땅이 붉어지고 다시 어둠에 묻힐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계속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러다 어느 순간 콧노래가 딱 멈췄다.

“왔으면 이리 오거라.”

공중에서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건장한 남자가 떨어졌다. 목세강이었다.

“태사부님을 뵙습니다.”

노인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태사부에게 인사하는 게 영 공손하지 못하다?”

“아. 또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어쨌다구요.”

“어허. 이 녀석 보게나.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노인은 혀를 차더니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언제까지 그러고 다닐 테냐?”

목세강은 말이 없었다. 사부의 복수를 하려고 사문을 나왔다. 복수를 마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

“방법은 찾았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 백령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다는 보검 말하는 게냐?

목세강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잊은 게냐. 마음만 먹으면 그런 정도 소식은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

“맞습니다. 그 보검만 얻을 수 있으면.”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에서 저렇게 싸고도는 걸 어떻게 얻으려고. 니 사부 복수 하려고 무림 공적이 될 셈이냐?”

목세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그 검을 한 번 보고 얘기해주마.”

“저.. 저도 같이 볼 수 없겠습니까?”

사부의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정도야 가능할 게다. 백령. 그 녀석이 나에게 빚진 게 있으니.”

노인은 잠시 후 자신과 함께 가자고 이야기했다. 밤에 백령 진인과 만나기로 했다면서.

“그건 그렇고 아까 그 아이는 어떤 아이더냐.”

“하 표사 말입니까?”

목세강은 자신이 보고 들은 걸 그대로 말해주었다. 노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 사부를 많이 닮은 모양이구나. 그 아이의 사부도 무학에 관해서는 천재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느니라.”

“그렇습니까?”

목세강은 처음 듣는 이야기. 노인은 예전 이야기를 해주었다.

“현천문이 지금은 저렇지만, 한때는 무림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느니라.”

물론 아주 예전 이야기. 노인은 자신도 태사부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200년은 된 이야기일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공이 쌓이질 않아 지금 이렇게 되었지. 그 아이의 사부인 원덕강은 나도 탐이 날 정도로 총명했다.”

만약 제대로 무공을 익혔으면 시대를 풍미한 고수의 반열에 올랐을 거라고 말했다. 목세강은 놀란 표정으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태사부가 누군가를 이토록 칭찬하는 건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천고의 기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자신의 사부도 허구한 날 구박받지 않았던가.

“성품도 정말 올곧고 학식도 대단했지. 현천문이 원래 관부와 인연이 깊기도 하지만,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관부와의 인연은 예전에 끊어졌을 게다.”

하기야 별 볼 일 없는 방파와 관부가 가까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지금 문주인 온위립도 기재이긴 하지만 덕강이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 정도지.”

노인은 내공을 쌓지 못한 게 정말 안타깝다고 몇 번이나 탄식했다.

“그 아이 성품이 그렇게 올바른 것도 사부의 영향일 게다.”

“정말 보기 드문 젊은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저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싶기도 한다니까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은 가르칠 수 있지만, 인성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지. 세강아.”

“예. 태사부님.”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데려오려무나.”

“지금이라도 이야기를 해볼까요?”

노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급할 게 무에 있겠냐. 조금 더 살펴보자꾸나. 실수는 한 번이면 충분하니.”

목세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실수 한 번이 사문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몸소 겪었으니까.

“그럼 저는 일단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려무나. 이따 축시에 이곳으로 오면 되느니라.”

목세강은 노인에게 예를 올리고는 숙소로 향했다. 진혁이 있으면 잠시 이야기라도 할까 싶어 찾았는데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진혁은 철각패도의 몸을 하고 장안에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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