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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시시각각 변한다.
산적을 피해 겨우 살아남았다. 힘겹게 표물을 가지고 왔고. 그런데 헛수고를 했다니. 그게 어디 할 말인가. 왕 표사의 이죽거림에 한천위가 폭발한 거였다.
워낙 드세게 나오니 왕 표사도 깜짝 놀랐다. 진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 인간은 그렇게 혼이 나고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본성이란 건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 자. 다들 날카로워서 그런 것이니 일단 진정들 합시다.”
표사 중 한 명이 중재를 해서 일단 쉬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왕 표사가 와서는 식사 준비를 하라고 명령조로 말한 거였다. 가장 만만해 하는 왕칠과 을급 표사들에게.
“뭐해? 원래 하던 거잖아. 빨리 안 움직여?”
눈을 부라리자 을급 표사 몇 명이 슬그머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왕칠은 오히려 왕소삼을 째려보았다. 단단히 화가 치밀어 오른 듯했다.
“이 새끼가. 하이고. 눈 봐라. 이러다 사람도 죽이겠다? 어?”
왕 표사는 손가락으로 왕칠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너희들이 할 일을 해야지. 꼭 지적을 해야 움직여요. 하여간 이것들은 말로 해서는 안 된다니까?”
왕칠은 왕 표사의 손을 탁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들 밥은 니들이 해서 먹어.”
“뭐? 뭐라고?”
왕 표사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불같이 화를 냈다.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미쳤나.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만. 어디 임시 표사가. 그것도 을급 주제에.”
왕칠은 그런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환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이렇게 무사히 와서 다행이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식사 준비? 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 병신 취급 당하려고 표물을 이끌고 다시 이곳에 온 건 아니다.
“애초에 표물을 버리고 간 거 너희들이야. 그걸 일부라도 챙겨서 돌아왔으면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맞아. 사람이라면 그게 도리지. 어디서 행패야?”
다른 표사들도 가세했다. 산적에게 당한 후 이곳까지 오면서 사람들은 무척이나 가까워졌다.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서로 챙겨주고 배려하고.
오면서 이야기할 게 뭐가 있겠나. 각자 얘기도 했지만, 주로 한 게 표국 사람들 까는 거였다. 표물을 버렸으니 표사도 아니라는 말. 동료를 그렇게 사지에 버리고 갈 수가 있느냐는 말.
그런데 만났더니 아예 귀찮은 짐짝 취급을 하더니 일을 부려 먹으려고 했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미친놈들. 그래. 미친놈들한테는 매가 약이지.”
왕 표사는 왕칠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명 정도는 때려눕히고 시작해야 말이 잘 먹힌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표국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그저 웃고만 있었다.
한천위가 깜짝 놀라 나서려고 했는데 진혁이 손을 잡았다.
“지켜보죠.”
“그동안 열심히 했지만 왕 표사를 당하기는 어려울 텐데?”
같이 매일 수련을 했으니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왕 표사가 정상이었다면 진혁이 먼저 나가서 말렸을 거다. 하지만 왕 표사는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점혈을 아직 못 풀었지. 그게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몸에 통증도 남아 있고, 움직임도 둔할 거다.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거고. 그러니 잘하면 이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만약 영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나서면 되는 거고.
왕칠은 갑자기 주먹이 날아오자 살짝 당황했는지 손발이 어수선했다.
“어이. 조심해.”
“한 방 먹여 주라고!”
임시 표사들은 일방적으로 왕칠을 응원했다. 이런 것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상황. 왕 표사는 자꾸만 공격을 피하자 짜증이 나는지 더욱 거세게 덤벼들었다.
왕칠의 기세가 변한 건 몇 초식이 지난 후였다. 왕 표사의 공격이 그다지 날카롭지 않다는 걸 몸으로 겪고는 자신감이 붙은 거였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고 느꼈다.
- 퍼어억!
왕칠의 주먹이 표사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배운 대로 상대의 공격을 흘린 다음 반격을 한 거였다. 그것도 진각을 밟으며 무게가 제대로 실린 주먹. 빠르고 정확했고,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했다.
어느 정도의 공격이었는지는 왕 표사의 표정이 알려주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숨을 쉬지 못하고 시뻘게진 얼굴. 강한 충격에 일그러진 표정. 비틀대며 뒤로 물러서는 왕 표사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했다.
왕칠은 결정타를 먹이려고 재차 공격했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상대의 턱을 노리고 빠르고 강하게 올려쳤다. 제대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왕 표사는 큰대자로 뻗을 것이다.
- 파악!
하지만 누군가가 공격을 대신 막았다. 마헌량 표두였다. 왕 표사가 군기를 잡는 걸 지켜만 보다가 상황이 이상해지자 나선 거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왕칠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표두를 쳐다보았다. 아니 지금까지 다 보았으면서 그걸 왜 묻느냐는 그런 표정이었다.
“상급자를 폭행해? 내가 어지간하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군.”
마헌량은 왕칠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임시 표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왕 표사가 먼저 주먹질을 한 거 아뇨.”
“맞아! 그럼 우리는 때리면 맞고만 있으란 소리냐?”
마헌량을 주변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시끄럽다. 너희들도 똑같이 표국의 규율에 따라 벌을 받을 테니 각오해라.”
하지만 표사들의 기세를 줄어들지 않았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마헌량 표두를 비난했다.
“이런 썩을 놈들이! 좋다!! 내가 오늘 똑똑히 가르침을 내려주지. 가장 먼저 내 가르침을 받을 놈이 누구냐!!”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무지막지한 괴성이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삽시간에 찾아온 정적. 그런데 묵직한 음성이 그 정적을 뚫고 올라왔다.
“그 가르침이라는 거. 내가 한 번 받아보지.”
한천위가 마헌량 앞으로 다가갔다. 마헌량이 움직였을 때 천위는 진혁에게 물었다. 자신이 정말 표두와 겨룰 정도냐고.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하게 하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하면서.
“허어. 이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마헌량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다 이를 갈았다.
“그래. 오냐. 예전부터 네놈이 계속 말썽이었지. 강호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려주마.”
마헌량은 작정을 한 듯 그의 무기인 대도를 잡고 자세를 취했다.
- 스르릉
검이 뽑히는 청량한 소리. 한천위도 검을 잡고는 상대를 맞을 태세를 갖추었다. 그의 검에서는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숨 막히는 순간. 천천히 움직이며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두 사람 사이로 가슴을 조이는 긴장감이 흘렀다.
- 카앙!
쇳덩이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너무나도 빨라서 움직임을 놓친 사람이 있을 정도.
‘처음부터 내공을 저렇게 끌어올려? 미친 새끼. 사람을 죽일 생각인가?’
진혁은 다 보고 있었다. 마헌량이 먼저 내공을 끌어 올리는걸. 한 수에 끝장을 보겠다는 속셈. 하지만 한천위도 그걸 알아채고는 따라서 내공을 사용했다.
마헌량의 움직임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빨랐다. 그의 도는 잔상을 남기며 눈을 어지럽게 했다. 거친 숨소리와 기합, 도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사람들의 머리를 쭈뼛쭈뼛 서게 만들었고.
- 캉! 카앙!
무시무시한 공세. 하지만 한천위도 만만치 않았다. 움직임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는데, 마헌량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고 있었다.
‘실력이 더 늘었어.’
진혁은 뿌듯했다. 한천위의 성장이 자신의 일처럼 기분 좋았다. 포인트를 얻지 못한다고 해도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좋았다.
마헌량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상대에게 먹히질 않았다. 오히려 간간이 찔러오는 빛살 같은 반격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젠장. 이렇게 끝낼 수는 없지. 한 방에 끝을 보자.’
질질 끌어봐야 자신에게 불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헌량은 한 방을 준비했다. 허초를 두 번 날리면서 그 사이에 치명적인 암수가 숨어있는 자신의 절초. 그걸 준비했다.
한천위도 상대가 한 방을 준비한다는 걸 알았다.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어!’
수련만 할 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헌량과 대결을 해 보니 전보다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천위는 그렇게 되뇌면서 검을 자신의 몸으로 조금 끌어당겼다.
완전히 움직임이 멎은 두 사람. 들리는 소리라고는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뿐이었다. 모든 게 멈추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다들 긴장감에 짓눌려 호흡이 불편할 정도였다.
먼저 움직인 건 마헌량. 그는 좌우로 공격을 날렸다. 그에 따라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천위의 검.
‘걸렸다!’
두 번의 공격은 허초였다. 진짜는 바로 지금.
- 파앗.
마헌량이 땅을 박차고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그러면서 아래로부터 도를 긁어 올렸다. 한천위룰 두 조각 낼 기세로.
“어엇!”
목세강이 소리를 질렀다. 한천위가 위험해 보였다. 마헌량의 절초에 걸려 몸이 둘로 갈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한천위는 오른발을 축으로 빙글 회전했다.
- 파아앗!
마헌량의 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찢었다. 만약 한천위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정말 두 동강이 났을 터.
하지만 한천위는 이미 마헌량의 옆쪽으로 움직이고 난 후. 그의 눈앞에는 큰 공격을 하고 난 후 허점이 가득한 마헌량의 몸뚱이가 있었다.
- 터어억!
마헌량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나마 한천위가 손잡이로 때렸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된 공격을 했더라면 적어도 어디 한 군데는 잘려나갔을 것이다.
땅에 뒹굴다 허겁지겁 일어나려는 마헌량의 목에 차가운 쇠붙이가 놓였다. 한천위의 검이었다.
“가르침은 잘 받았소.”
한천위는 그 말을 남기고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임시 표사들의 환호성에 주변이 떠나갈 것 같았다. 그에 반해 마헌량 표두는 생기를 잃는 눈동자로 혼이 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누워 있었다.
***
“그러니까 표물을 여기까지 가져온 공로를 인정해달라?”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합니다.”
진혁의 말에 표국주인 마진량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기 싫었다. 지금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후려쳤다. 표행을 마치고도 돈을 일부만 준 적도 있었다.
핑계는 많았다. 따지고 들면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지만. 하지만 상대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거라도 받아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한 푼도 못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돈을 더 토해내게 생겼다니. 마진량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얼마를 더 달라는 겐가?”
“각자 원래 받기로 한만큼 더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진량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 두 배를 달라고?”
진혁은 왜 그리 놀라느냐는 듯 말했다.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표물을 잃게 되면 세 곱절로 보상해야 합니다. 그걸 지켰으니 표사들에게 곱절을 주어도 표국으로서는 이익입니다.”
“그래도 곱절은 너무 많네.”
마진량도 그걸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지 않고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사실 지금이야 분위기가 이렇지만, 장안까지 가면 다른 방법이 생길 것도 같았으니까.
“그러지 말고 천천히 상의하세. 장안까지 가는 동안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 아닌가.”
그러니 장안까지 가면서 조율을 하자. 그게 표국주 마진량의 제안이었다. 진혁은 잠시 생각을 하는 척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목세강이 귓속말을 해왔다.
“시간을 끌 속셈일세. 받아들이지 않아야 해.”
“알고 있습니다.”
진혁 역시 귓속말로 말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마진량에게 말했다.
“국주님. 그렇다면 저희는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
“뭐?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