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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을 대처하는 방법.
마진량은 의아해 했다. 철각패도의 말이 뜻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표국에는 아무런 볼 일이 없고 단지 왕 표사의 무례만 혼내겠다는 건가? 정말로 왕 표사가 말실수를 한 건가?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기는 한데..’
사파의 거두이니 손을 좀 심하게 쓸 수도 있었지만, 왕 표사 한 명으로 끝난다면야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대뜸 그러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랫사람을 아낀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대협. 저희가 다른 걸로 성의를 보이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뒤편을 한 번 쳐다보았다. 황서군에게 좀 도와달라는 무언의 표시. 황서군도 강호의 물을 먹을 만큼 먹은 자라 나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본인은 무당의 황서군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에서 검각을 책임지고 있소이다.”
무당과 무림맹을 언급한 건 자신의 체면을 보아 적당히 양보해달라는 뜻. 무당과 무림맹. 무림인 치고 그 두 곳을 무시할 자는 없다. 대부분 이 정도 하면 적당히 넘어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철각패도는 달랐다.
“별것도 아닌 일에 온갖 놈들이 다 기어 나오는구나.”
“말이 조금 심하신 것 같소이다.”
황서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무당과 무림맹을 언급했는데도 이리 나온다는 건 두 곳을 다 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
“강호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말로 노닥거렸더냐. 어디 이거나 받아 보거라.”
철각패도는 점소이가 놓고 간 잔을 들어 안에 있는 물을 휙 뿌렸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잔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물을 왜 뿌리나 싶은 거였다. 그런데 곧 사람들은 경악했다. 물이 몽실몽실한 덩어리를 이룬 채 황서군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뭉친 진흙 덩어리가 천천히 날아가는 것 같 같았다. 이런 광경은 강호를 주유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이라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 황서군의 놀람은 더욱 컸다.
‘이런 미친. 무지막지한 공력이다. 태사부님에 필적하는 고수.’
오히려 공력을 실어 빨리 움직이게 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느리게 날아가도록 하는 건 무척 힘들다. 그것도 물과 같은 액체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날아가게 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
황서군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몸을 날려 피한다거나 하는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는 일. 그래도 자신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손에 공력을 모았다.
물론 정면으로 받을 수는 없었다. 저 무시무시한 걸 그대로 받았다가는 피를 토하면서 벽 너머로 날아갈 것이니까. 황서군은 날아오는 물을 측면에서 손으로 감싸며 돌리기 시작했다.
“호오. 태극권이로구나.”
무척이나 유려한 움직임이었지만, 황서군은 죽을 맛이었다. 물에 담긴 공력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전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물 덩어리에 담긴 공력을 해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물에 담긴 공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황서군은 조금 여유가 생겼다.
- 촤아악
속도가 줄어들다 공중에 멈춘 물 덩어리는 형체를 잃고 바닥에 쏟아졌다. 황서군은 철각패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봐주었으니 정사를 떠나서 인사는 해야 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 전부를 죽이고도 남을 고수.
“자. 이 정도면 여흥은 즐긴 것 같고.. 내가 이 녀석 손을 봐주는 거에 불만 있는 사람은 없겠지?”
왕 표사는 간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위해 나서지 못했다. 마진량이 혹시나 싶어서 황서군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
“어떻습니까?”
황서군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저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입니다. 문제를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황서군. 절세기재로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최고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자. 당연히 자존심도 강했다.
하지만 숙일 때와 버틸 때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그렇지 못했다면 강호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황서군의 말을 들은 마진량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왕 표사에게 다가가서는 말했다.
“자네 실수는 자네가 책임지도록 하게.”
왕 표사는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지금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어 보였다.
“손속에 사정을 둬 주시면 은혜로 생각하겠습니다.”
마진량 표국주의 말에 철각패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일로 평생 앉아서 살게 하겠나. 아니면 저승 구경을 시키겠나. 적당히 하지.”
철각패도는 왕 표사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놈이 있다. 권력을 등에 업으면 신이 나서 날뛰는 그런 놈. 철각패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 치는 왕 표사. 두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철각패도는 피식 웃으면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왕 표사는 발소리가 천둥소리 보다 크게 들렸다. 무시무시한 얼굴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심장은 통제를 잃고 펄떡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가쁘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무림인은 혓바닥과 손을 조심해야 하는 거다. 명심해라.”
“예? 예.. 어..?”
갑자기 왕 표사가 커헉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특별한 건 없었다. 딱 두 대였다. 철각패도는 그저 등을 툭툭 건드렸을 뿐이다. 그런데 왕 표사는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흥이 다 깨졌군. 이래서야 술맛이 나겠나.”
철각패도는 휘적휘적 밖으로 나갔다. 점소이가 쭈뼛거렸다. 음식값을 받아야 하는 데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말은 못하고 눈치만 살폈다.
“계산은 2층에서 할 거야.”
그 말을 남기고는 철각패도는 문을 열어젖히고는 나가버렸다.
“어떤가?”
“왕 표사. 어디를 당한 거야?”
사람들은 철각패도가 나가고 나서야 왕 표사에게 우르르 달려갔다.
“몸이.. 그냥 여기저기 쑤시고 힘이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강호 견문이 가장 넓은 마진량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점혈인 것 같은데.. 아마도 그자의 독문절학인 것 같군.”
“저도 어떤 수법인지 잘 모르겠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지라.”
황서군도 고개를 저었다. 급한대로 추궁과혈을 하기는 했지만, 그저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몸의 통증은 그대로였고, 힘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더니 꼴좋다.”
“너무 나댔지. 어? 그런데 자네는 언제 왔나?”
한천위는 옆에 진혁이 있는 걸 보고는 물었다.
“아. 얼마 전에요. 무시무시한 고수 같던데요?”
“허이고. 마 표국주나 황서군이 어찌하지 못할 정도니 사파의 거두겠지.”
원래 같이 표행을 하는 사이라면 같이 분개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워낙 괴롭힘을 많이 당한 터라 오히려 즐거워했다. 사람들은 식사가 아까보다 맛있다고 느꼈다.
***
“그 고수 말이야. 왕 표사한테 혓바닥과 손을 조심하라고 했다던데?”
왕칠이 사람들에게 속삭였다. 사람들이 킥킥댔다. 그렇게 나대더니 제대로 혼쭐이 났다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왜 이리 소란스럽나?! 다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표국의 표사 한 명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제 일로 심기가 불편하다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대놓고 망신을 당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있겠나.
“잘난 척은. 지들보다 조금만 더 강하면 꼼짝도 못 하는 놈들이.”
표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눈치를 봐가며 속삭여댔다. 반면 진혁은 소소하게 포인트가 들어오는 걸 즐기며 조용히 움직였고.
그렇게 또다시 힘든 표행이 시작되었다.
“어이고. 이번 표행은 유난히 힘든 것 같은데?”
왕칠이 나이는 못 속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관도를 지날 때는 그나마 편했지만, 길도 없는 산길을 갈 때는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혁은 적당히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움직였다. 가끔 헐떡대기도 하고, 지친 기색을 내보이기도 하면서.
‘어? 이거..’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곳도 한둘이 아니라 여럿의 기척이.
표행을 할 때 조심해야 할 부류 중 하나가 도적이다. 특히나 이런 산속에서는 이기더라도 피해가 막심하다. 그래서 적당한 사례를 하고 통과하는 경우도 있다.
‘아니야. 그럴 거라면 벌써 모습을 드러내고 돈을 받아갔겠지.’
산적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건 위험하지 않다는 거다. 돈을 받겠다는 뜻이니까. 간혹 무협지에 보면 산적과 표국이 서로 말을 나누다가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다 뻥이다.
싸울 거면 미쳤다고 상대가 대비하도록 하고 싸우겠나. 산적도 그만한 머리는 있다. 싸워서 물건을 뺏을 거면 무조건 습격한다. 그리고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진혁은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그러다 마음에 걸리는 걸 발견했다. 객잔에서 머물기 전과는 대형이 바뀌었다.
‘가만. 전에는 중요한 물건을 중앙에 두었는데?’
지금은 가장 앞쪽에 있었다. 표국의 사람들도 대부분 앞쪽에 있었고. 다만 표국주와 황서군은 여전히 중앙에 있었다. 또 달라진 건 앞쪽에 있었던 자신과 한천위가 가장 뒤에 있다는 점.
‘이놈들 습격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 아냐?’
의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표국 사람들이 평소보다 주변을 더욱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는 건 한 가지 결론밖에 없다.
‘행렬이 긴 편이니 중간을 자르고 들어오겠지. 표국주나 황서군이 있는 곳을 노릴 거야.’
거기에 산적들이 원하는 물건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 사이 앞부분에 있는 자들은 재빨리 물건을 가지고 도망친다. 표국주나 황서군 정도면 싸우다 몸을 빼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금선탈각. 껍데기만 남겨놓고 진짜 중요한 물건과 인력은 빼낸다. 이거지?’
산적들이 표행의 대부분을 잡았으니 도망친 일부는 내버려 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을 옮기는 걸 거다. 이 많은 사람과 표물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임시로 뽑은 사람들은 다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거야?’
같이 표행을 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상식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원래 이럴 작정이었다고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이런 개자식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진혁은 우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갑자기 커다란 함성이 들리더니 사방에서 산적들이 뛰어 나오기 시작한 거였다.
“산적이다!!”
“어서 움직여!”
험악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오는 산적들. 사람들은 허둥지둥거렸지만 이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산적이 표행의 중간을 끊었다. 도망친 건 맨 앞쪽에 있던 극소수. 표국주를 비롯한 황서군은 중간에서 치열하게 산적을 베고 있었다. 아비규환. 진혁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흩어지지 마. 이쪽으로 빨리!!”
앞으로 가봐야 산적을 뚫고 도망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서 도망치는 게 최선. 진혁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참혹한 현장.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초목과 땅이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비릿한 혈향이 눈을 감지 못한 시체 사이로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저놈들도 그냥 산적이 아니야. 분명히 뭔가가 있어.’
일반적인 산적들이 아니었다. 무공을 제법 하는 자들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피해가 더 컸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졌다.
비명 소리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 진혁은 그런 광경을 살피며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다행스러운 건 맨 뒤쪽까지 오는 산적은 거의 없다는 거였다.
“이럴 때 빨리 빠져나가야 합니다. 기운을 내세요.”
사람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그리고 진혁 일행을 본 다른 표사와 쟁자수들이 달려왔다. 지금 안전하게 보이는 건 진혁 일행이 있는 쪽 밖에 없어 보였으니까.
“빨리. 이쪽으로! 어서!!”
진혁이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산적들을 막으며 사람들을 구하러. 그들에게 진혁은 유일한 살길이고 희망이었다.